“찔렀다, 쐈다, 실려 갔다”…광주 교도소 주검 실종 미스터리

정대하 기자 2024. 5. 17.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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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항쟁 당시 사망한 것으로 공식 인정을 받았으나 주검을 찾지 못한 희생자는 모두 73명이다.

3공수 하사였던 김승식(69)씨는 지난 7일 전남 해남에서 한겨레와 만나 "5월21일 오후 광주교도소에 도착했던 군 트럭에서 12구의 주검을 내렸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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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계엄군들이 시민들을 붙잡아 군용트럭으로 끌고 가고 있다. 한겨레 자료

5·18 항쟁 당시 사망한 것으로 공식 인정을 받았으나 주검을 찾지 못한 희생자는 모두 73명이다. 이들은 모두 ‘행방불명자’(행불자)로 처리됐다. 5·18 행불자 문제는 정부가 5·18 관련 사망자 숫자를 공식 발표한 초기부터 큰 이슈였다. 사람들은 정부 발표를 신뢰하지 않았고, 공식 사망자보다 훨씬 많은 수의 시민들이 계엄군에 희생된 뒤 사라졌다고 믿었다.

이런 생각은 1980년대 초반부터 불린 ‘오월의 노래 2’라는 민중가요에 “왜 쏘았지 왜 찔렀지 트럭에 싣고 어딜 갔지”라는 가사로 등장한다. 이 노래 가사가 만들어지기까지는 1980년 5월21일 전남대에서 광주교도소까지 이어진 공수부대의 억류자 이송작전도 중요한 배경이 됐다.

“짐 쟁이듯 차곡차곡 사람을 포개 넣어버렸지요. 차 안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 틈이 없을 정도였어요.”

1980년 5월21일 전남대에 억류됐다가 광주교도소까지 군용 차량으로 이송된 김병준씨. 정대하 기자

김병준(65·광주시 서구 양동)씨는 14일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팔을 뒤로 묶어 움직일 수 없었다. 물컹물컹하게 밟고 있었지만, 누워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울 방법이 없었다”고 말했다. 3공수여단 군인들은 1980년 5월21일 아침 전남대 대학 강의실과 강당에 억류했던 시민 200여명(군 기록 120여명)을 방송용 탑차와 군용 수송트럭 2대에 나눠 싣고 4㎞가량 떨어진 각화동 광주교도소로 이동했다. 도보 감시하는 군인들이 겹으로 차를 둘러싼 채 이동해 평소 차량으로 움직일 때보다 시간이 많이 지체됐다.

옛 광주교도소 항공사진. 한겨레 자료

군인들은 차에 태운 시민들을 무력화하려고 군 트럭에 최루가스인 시에스(CS) 분말을 살포했다. 김씨는 “팔이 최루가스 분말로 범벅되면서 화상을 입고 진물이 났다”고 말했다. 호흡 곤란을 느낀 시민 1명이 차 안의 작은 창을 깼다. 김씨는 “곧바로 창 안으로 대검이 쑤셔 들어왔다”고 전했다. 5월19일 차량 시위를 하다 붙잡혔던 그는 억류 49일 만에 풀려났다. 김씨는 “그때 교도소에서 살아 나온 108명이 ‘108회’라는 계 모임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주검을 본 목격자는 많다. 3공수여단은 오후 4시께 광주교도소에 도착했다. 3공수 하사였던 김승식(69)씨는 지난 7일 전남 해남에서 한겨레와 만나 “5월21일 오후 광주교도소에 도착했던 군 트럭에서 12구의 주검을 내렸다”고 말했다. 이튿날 트럭 안에서 총에 맞은 주검 1구도 수습했다. 김씨는 “연대 정보장교가 13명의 주검 얼굴을 모두 촬영했다”고 했다.

3공수여단 하사였던 유아무개씨는 5·18민주화운동진상규명조사위원회(5·18조사위)에 “5월21일 밤 한 상사의 지시로 달이 떴던 시간에 손수레 2대로 주검을 옮겼다. 한 구덩이에 2구씩 3곳, 한 구덩이엔 3구를 묻었다고 들었다”고 진술하기도 했다.

정대하 김용희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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