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손으로 그린 학살과 항쟁, 그리고 치유 [책&생각]

최재봉 기자 2024. 5. 17.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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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 경험 담은 그림 에세이
뇌졸중 반신마비에 왼손 작업
문학소녀에서 시민군 거쳐
장애 안고 살기까지 자취 빼곡
“내가 만난 사람들이 이렇게 조각조각 이어져서 넓은 치마처럼 펼쳐지는 느낌이 들었어.” 오월의봄 제공

양림동 소녀
나의 오월이 시작되는 곳
임영희 글·그림 l 오월의봄 l 1만6800원

임영희(68)는 2011년 급성뇌졸중으로 쓰러져 오른쪽 몸이 마비되었다. 2년 동안 병원 생활을 해야 했고, 익숙하지 않은 왼손으로 밥을 먹느라 음식을 흘리기 일쑤였다. 장애를 입은 몸으로 힘겹게 코로나 시대를 통과하던 2020년, 아들의 권유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워낙 그림에 소질이 없었던데다 오른손이 아닌 왼손으로 그려야 했기에 서투르고 어설펐지만, “미적미적하며 그린 그림이” “처음 경험하는 후련함”을 선사했다. 진도에서 태어나 중학교 때 광주로 유학을 오고, 푸른 청춘의 봄에 광주 5·18을 만나고,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사회운동을 계속하다가 장애를 얻기에 이른 삶의 발자국이 하나씩 그림으로 되살아났다. 그렇게 그린 그림 80여점으로 지난해 7월 광주에서 전시회를 열었고, 그 그림들에 자신의 내레이션을 입혀 아들 오재형 감독이 연출한 30분짜리 단편 애니메이션 ‘양림동 소녀’는 여러 영화제에 초청되었고 상도 받았다. 5·18 44돌에 즈음해 출간된 ‘양림동 소녀’는 그 애니메이션의 단행본 버전이다.

“무수한 여성들이 시위에 참여했어. 빨간 리본을 머리에 묶고 여성들이 손잡고 같이 대항하는 모습을 이렇게 그려봤어.” 오월의봄 제공

첫 그림은 해맑게 웃는 소녀가 진도에서 배와 버스를 갈아 타고 광주로 유학 오는 장면이다. 도시에서 소녀는 혓바닥이 튀어나올 정도로 맛있는 도넛을 처음 먹어 보고, 교내 백일장에서 시로 당선하는 문학소녀로 성장한다. 스물이 넘어 해방신학에 매료된 임영희는 양림동 벽돌집에 세들어 살면서 유신 반대 성명서를 전달하거나 벽보를 쓰는 등 민주화 운동을 벌이다가 경찰서에 잡혀가 야구 방망이로 무자비한 구타를 당하기도 한다. 그 무렵 양림동으로 이사 온 소설가 홍희담의 집을 살롱 삼아 드나들며 시대를 걱정하는 말을 나누었다. 임영희가 시몬 보부아르와 프리다 칼로, 로자 룩셈부르크의 이름을 따서 양림동 카페 ‘보프룩’이라 이름 지은 이 집을 기반으로 전남 지역 최초의 독립 여성단체 송백회가 창립되었고, 그는 이 단체의 간사를 맡아 활동하는 한편 극단 ‘광대’의 단원으로 공연 연습을 하던 중 5·18을 맞았다.

“YWCA에서 대본 연습 중이었는데 바로 앞 무등고시학원에 군인들이 난입해서 곤봉을 휘두르는 모습을 봤어. 나는 봤지. 군인들이 광주 시민을 학살하고 있었어.”

“사람들이 차에 김밥이나 수건 뭐 이런 거 다 올려주고, 동네 사람들은 동네마다 빗자루를 들고 나와서 청소하고 (…) 다들 즐겁고 따뜻한 표정이었어.” 오월의봄 제공

바로 옆에서 총에 맞아 죽은 사람도 여럿 봤고, 군인들에게 쫓겨 다니다 밤에는 악몽을 꾸기 일쑤였다. 5월22일 도청 앞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 공수부대의 발포로 “금남로가 순식간에 피바다가” 되고, “남겨진 신발들이 시계탑 앞에 막 쌓여” 있는 모습도 목격했다. 그럼에도 임영희는 청바지에 면티 차림으로 분수대 주변에서 시위를 계속했다. 항쟁이 끝나면 사형당할 각오까지 했다. 23일 계엄군이 일시적으로 물러난 뒤에는 시민들이 “서로서로 보살피고 서로서로 배려”하는 “신성한 공동체”를 맛보았다. “그런 세상을 내가 맛보게 된 것이 태어나서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이었지. 지금도 생각하면 가슴이 울렁거린다.”

YWCA 건물에서 먹고 자며 일하던 임영희는 계엄군이 쳐들어온 27일 새벽 다른 두 여성과 함께 마지막으로 빠져나왔다. “새벽 네 시쯤이었나. 나와서 담 넘어서 녹두서점 쪽으로 걸어가는데 뒤에서 막 총소리가 비 오듯이 들리더라고.”

“도피 중에 갑자기 난소에 이상이 생겨서 급하게 수술해 하나를 떼어냈어. (…) 몇 달 새 사람이 메말랐고 고통스러웠재. 이렇게 머리끝에서 발까지 대못으로 박힌 것 같은 고통이었어.” 오월의봄 제공

5·18이 끝난 뒤 서울에서 도피 중일 때에도 5·18의 진실을 알리는 카세트 테이프를 녹음했고, 광주로 돌아와서는 ‘무등의 꿈’이라는 마당 공연을 펼치고 소설가 황석영의 집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 노래도 함께 녹음했다. 그 사이에 난소에 이상이 생겨 수술을 했고, 누군가에게 쫓기는 느낌과 불면증을 달고 살았다. 5·18 이후에도 꿋꿋하게 사회운동에 매진하던 그에게 뇌졸중은 장애와 장애인을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편견에 눈을 뜨는 기회가 되었다. 은퇴한 남편과 함께 시골로 이사해 살고 있는 그는 곡절 깊은 지난 삶을 그림과 글로 풀어 놓으면서 마음이 치유되고 자유로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병원에 있을 때 뇌졸중 환자들끼리 열 명 정도 모여서 모임을 만들었어. (…) 다들 절뚝절뚝 거리면서 커피숍 안으로 들어갔는데, 거기 있던 사람들이 슬슬슬 우리를 피해서 가는 거야.” 오월의봄 제공
“스무 살 청춘의 나는 이렇게 꽃도 들고 머리에 화관도 쓰고 녹색의 평원을 맨발로 걸어가고 있어.” 오월의봄 제공

“이렇게 상상력을 발휘해서 그리고 색을 입히니까 조금 치유가 된 것 같더라. 굳었던 생각과 사고들도 좀 풀린 느낌이야. (…) 그래서 앞으로? 아름다운 노년이 전개되지 않을까 싶어.”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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