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우주는 거대한 다중우주의 극히 작은 일부분” [책&생각]

고명섭 기자 2024. 5. 17. 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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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이론물리학자 머시니 호턴
‘양자 경관 다중우주론’ 안내
‘양자 경관 다중우주 이론’을 창안한 여성 이론물리학자 로라 머시니 호턴. 위키미디어 코먼스

무한한 가능성들의 우주
다중우주의 비밀을 양자역학으로 파헤치다
로라 머시니 호턴 지음, 박초월 옮김 l 동녘사이언스 l 1만9000원

우리를 둘러싼 이 우주는 홀로 존재하는가? 아니면 다른 여러 우주들과 함께 존재하는가? 세계 이론물리학계는 ‘단일우주론’과 ‘다중우주론’ 두 진영으로 양분돼 있다. 단일우주론은 로저 펜로즈, 카를로 로벨리, 폴 데이비스 같은 저명한 물리학자들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다중우주론 진영에는 리 스몰린, 브라이언 그린, 맥스 테그마크가 속해 있다. 단일우주론자였던 스티븐 호킹은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다중우주론 연구에 몰두했다. ‘양자 경관 다중우주 이론’의 창시자인 알바니아 출신 이론물리학자 로라 머시니 호턴(미국 노스캐롤라이나대학 교수)은 대세가 다중우주론 쪽으로 기울었다고 보는 사람이다. ‘무한한 가능성의 우주들’(2022)은 머시니 호턴 자신의 학문 여정과 20세기 우주론 연구 역사를 교직해 ‘양자 경관 다중우주 이론’이 탄생하기까지를 설명하는 책이자 다중우주론이 왜 단일우주론의 대안이 될 수밖에 없는지 그 이론적 근거를 이야기하는 책이다.

단일우주론은 고대 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부터 20세기 물리학까지 거의 모든 우주론을 지배한 이론이다. 우주는 우리가 속한 우주 하나뿐인데, 그 우주는 빅뱅에서 시작해 오늘의 인류를 탄생시키기까지 진화해왔다는 것이 단일우주론의 믿음이다. 그러나 단일우주론은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는데, 그 약점을 물리학자 로저 펜로즈가 1970년대에 수학 계산으로 제시한 바 있다. 우리의 우주가 빅뱅을 통해 탄생해 오늘에 이를 수학적 가능성은 ‘10의 10승의 123승’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펜로즈의 계산대로라면 우리 우주의 탄생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곤경을 피해 가려고 단일우주론자들은 우리 인류가 존재한다는 것이 이 불가능한 일이 일어났음을 입증한다는 ‘인류 원리’를 제시한다. 또 우주의 진화 국면마다 ‘미세조정’(fine-tuning)이 이루어져 난관을 뚫고 나갔다는 논리를 동원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런 설명은 사태를 얼버무리는 것일 뿐이다. 이 책에서 머시니 호턴은 여러 우주론을 철저히 검토해보고 나서 단일우주론으로는 이 우주의 시작을 설명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으며, 결국 다중우주론으로 연구 방향을 틀었다고 말한다.

머시니 호턴에게 이론적 돌파구가 열린 것은 2000년대에 들어와 ‘끈이론’ 연구자들이 이룬 성과였다. 끈이론은 20세기에 등장한 양자이론의 기묘한 세계를 밝히려는 새로운 이론이다. 거시 세계는 고전 물리학으로 설명되지만, 미시 세계는 양자이론을 동원해야 한다. 이 미시 세계에서 양자는 입자이자 파동으로 존재한다. 끈이론은 이 양자들이 11차원의 끈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끈이 진동해 다양한 양자를 만들어낸다고 생각한다.

우주의 탄생 시점으로 돌아가 보면 초기 물질은 아원자보다도 훨씬 작아 양자이론을 적용해야 한다. 2004년 끈이론 연구자들은 우주 탄생을 연구하던 중 빅뱅을 일으킬 수 있는 ‘10의 600승’ 가지의 ‘위치 에너지 집합’을 발견했다. 이 무수한 집합이 일종의 경관(풍경)을 이룬다고 하여 이 발견 내용을 ‘끈이론 경관’(string theory landscape)이라고 부른다. 애초에 끈이론 연구자들이 찾으려 한 것은 단일우주의 기원이었는데, 그 연구 도중에 ‘우주를 무수히 생산할 수 있는 공장’ 시나리오를 발견한 것이다. 머시니 호턴은 그 끈이론의 발견을 다중우주론과 연결했고 거기서 ‘양자 경관 다중우주 이론’이 탄생했다.

머시니 호턴 다중우주론의 얼개를 쉽게 이해하려면 태반과 배아의 비유를 생각해보는 것이 좋다. 끈이론이 발견한 ‘양자 경관’을 태반이라고 하고 그 안에서 요동하는 ‘양자 파동’을 우주의 배아로 보는 것이다. 우주의 배아인 양자 파동(양자 우주)이 양자 경관이라는 태반에서 에너지를 얻음으로써 빅뱅과 인플레이션을 거쳐 거대우주가 된다. 그런데 끈이론이 알려주듯 배아가 태반에 자리를 잡을 경우의 수는 10의 600승에 이른다. 무수히 많은 양자 우주가 양자 경관에 자리를 잡는 것인데, 어디에 자리를 잡느냐에 따라 태반 곧 양자 경관에서 얻는 위치 에너지가 달라진다. 에너지가 적은 곳에 자리 잡은 배아 곧 양자 우주는 빅뱅을 일으키지 못한다. 위치 에너지를 충분히 공급해주는 곳에 자리 잡은 양자 우주만이 빅뱅을 일으켜 실제 우주로 자랄 수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이 양자 우주의 중력 문제다. 양자 중력(=양자 요동)은 양자 우주를 안으로 붕괴시키는 힘이다. 반대로 양자 경관의 에너지는 양자 우주를 팽창시킨다. 이 두 힘이 적절한 균형을 이루어야 양자 우주가 붕괴하지 않고 빅뱅에 이를 수 있다. 우주 탄생 시점의 양자 세계는 이 두 힘이 줄다리기를 벌이는 곳이다. 그 양자 우주 가운데 에너지가 낮은 곳에 자리 잡은 양자 우주는 붕괴하지만, 에너지가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양자 우주는 거시 우주로 성장한다.

이렇게 보면 우주가 탄생하는 과정은 다윈의 자연선택을 닮았다. 적절한 자리에 놓인 양자만이 자연의 선택을 거쳐 우주로 자라나는 것이다. 이렇게 선택받은 우주들이 전체 다중우주를 구성한다. 이 다중우주는 그 수가 엄청나게 많고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지녔다. 이런 다중우주를 대안 모델로 상정하면 단일우주론의 여러 난점을 해결할 수 있다. 양자 경관 다중우주론의 계산으로는 생명체가 출현할 가능성이 우리 우주보다 더 큰 우주도 있다. 그렇게 보면 우리 인간이 사는 우주는 그리 특별하다고 할 수 없다. 우리 우주와 유사한 우주가 얼마든지 더 있을 수 있다. 펜로즈의 계산이 틀린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다중우주론이 상당 수준의 관측적 검증을 통과했다는 사실이다. 머시니 호턴의 다중우주론은 양자 우주가 거시 우주로 팽창하려면 ‘양자 얽힘’이 풀려야 한다고 가정한다. 그 양자 얽힘이 풀릴 때 양자 우주에는 흉터가 생기고, 흉터의 흔적은 그 뒤 우주가 아무리 커져도 그대로 남는다. 2005년 그 흉터에 해당하는 ‘거대 거시공동’이 하늘에서 관측됐다. 다중우주론이 가설만은 아니게 된 것이다. “우리의 우주는 거대한 다중우주의 극히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 머시니 호턴의 이 확신대로 다중우주론이 옳다면, 우리는 이제껏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큰, 거의 무한대에 가까운 우주 그룹 안에 살고 있는 셈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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