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건전재정 얼굴을 한 긴축…가난하게 만드는 자본의 농간

최원형 기자 2024. 5. 17.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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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축'(austerity)은 정부 예산 적자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일련의 정치경제 정책을 말한다.

주목받는 젊은 경제학자 클라라 마테이(미국 뉴스쿨 교수)는 '자본 질서'에서 긴축의 진정한 목표는 경제학자·기술관료의 주장처럼 "국가 경제의 체질 개선, 경제 지표 회복" 따위가 아니라, 노동 대중을 어르고 위협해서 "자본주의의 대안 체제를 봉쇄하는 것"이라 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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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목받는 젊은 경제학자의 질문
1차대전 뒤 영국·이탈리아 분석
자본주의 대안 제시 틀어막으려
경제학자·기술관료 합작 결과
‘자본 질서’는 ‘경제를 살린다’는 긴축이 과연 누구에게 이익이 되는지 묻는다. 게티이미지뱅크

자본 질서
긴축이 만든 불평등의 역사
클라라 이(E). 마테이 지음, 임경은 옮김, 홍기훈 감수 l 21세기북스 l 2만8000원

‘긴축’(austerity)은 정부 예산 적자를 줄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일련의 정치경제 정책을 말한다. “건전재정”을 앞세워 정부 지출을 마구잡이로 줄이고 있는 윤석열 정부에서 보듯, 현대 자본주의 체제에서 많은 정부들이 ‘경제 살리기’를 위해 긴축을 활용한다. 긴축은 예산 삭감, 역진세, 디플레이션, 민영화, 임금 억제, 고용규제 완화 등으로 대다수에게 고통을 주는데, ‘경제 살리기’ 효과는 과연 실재하는 것일까?

주목받는 젊은 경제학자 클라라 마테이(미국 뉴스쿨 교수)는 ‘자본 질서’에서 긴축의 진정한 목표는 경제학자·기술관료의 주장처럼 “국가 경제의 체질 개선, 경제 지표 회복” 따위가 아니라, 노동 대중을 어르고 위협해서 “자본주의의 대안 체제를 봉쇄하는 것”이라 짚는다. 지은이는 1차대전 직후 영국과 이탈리아에서 벌어진 일들을 파고들어, 긴축이 어떤 배경에서 어떤 목적으로 탄생했는지 조목조목 짚어나간다.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1차대전을 겪으며 큰 위기를 맞았다. 자본주의는 생산물을 팔아 이윤을 얻는 관계가 사회 전반에 동질적으로 적용되어야 비로소 가능한 체제다. 이 ‘자본 질서’를 떠받치는 것은 생산수단의 사유화와 고용주-노동자 사이 임금관계란 두 기둥이다. 그런데 전쟁 시기 국가가 공급을 관리하고 가격을 책정하는 등 대대적으로 경제에 개입하면서 “임금관계와 생산수단의 사유화가 ‘자연스러운’ 게 아니라, 계급제 사회에서 정치적으로 선택된 결과임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가격을 ‘인격 없는 시장’의 자연법칙(경제)이 아닌 국가(정치)가 결정한다면, 그 역시 민주적 의사결정의 대상이 아닌가?

‘자본 질서’를 쓴 경제학자 클라라 마테이. 뉴스쿨 누리집 갈무리

영국과 이탈리아는 각각 고전적 자유주의와 파시즘의 발상지이나, 긴축의 관점에선 그 역사적 행보가 거의 같았다. 종전 뒤 영국의 광부 노조 운동과 길드 사회주의 운동, 이탈리아의 협동조합 운동 등 두 나라에서는 ‘경제 민주화’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거셌고, 급진적인 노동자들은 한발 더 나아가 생산과정을 지배하는 ‘공장 평의회’ 결성, 시위와 공장 점거 등으로 아예 자본주의 체제를 넘어서려는 ‘신질서 운동’을 폈다. 안토니오 그람시가 참여한 잡지 ‘오르딘 누오보’의 활동은 그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지향점을 잘 보여준다.

지은이는 긴축이 이런 상황에서 노동계급을 정치에서 떼어내어 다시 ‘인격 없는 시장’에 종속시키기 위해 자본계급이 발명해낸 수단이었다는 사실을 파헤친다. 전후 영국의 재무부와 이탈리아의 파시즘 정권에서 경제학자들과 기술관료들은 ‘생산을 늘리고 소비를 줄여야 산다’는 식으로 위기의 원인을 노동 대중에게 돌렸고, 정부 지출을 줄이고 고금리를 유지하는 통화·재정·산업 3가지 방면의 긴축 정책을 개발해 시행했다. 이들은 국가의 경제 행위를 축소해 정치적 논쟁을 무력화하고, ‘독립적’ 경제기관을 설립해 경제적 의사결정을 민주주의로부터 떼어놓았으며, 객관적·중립적인 권위를 부여해 경제이론이 계급관계와 무관한 것처럼 만들었다. 국제연맹이 1920년 브뤼셀과 1922년 제네바에서 연 국제재정회의는 긴축 모델이 벼려지고 확산되는 장이었다.

지은이는 “다수를 가난해지게 하여 노동자를 자본가의 이익에 순응시키”는 것이 긴축의 본질이라 짚는다. 2차대전 이후 국가 개입과 공공 복지가 잠시 살아났으나 1970년대 이후 긴축은 다시 주된 지배의 수단으로 정착했으며, “독재, 경제이론, 긴축의 혼합은 현대사에서 반복되는 추세”다. 이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아야 새로운 길을 모색할 수 있다.

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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