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것’ 김민기 뒤에 장일순이 있었다 [책&생각]

양선아 기자 2024. 5. 17.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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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주기 맞아 ‘참어른’ 삶과 사상 조명
“사람은 하늘” 동학 사상에 영향 받아
생전 무위당 장일순의 모습. 녹색평론 김종철 전 발행인은 장일순이 노자의 성정을 가졌으며, 공자처럼 사람들 가운데서 대화적인 사람이었다고 말했다. 삼인 제공

장일순 평전
걸어 다니는 동학, 장일순의 삶과 사상
한상봉 지음 l 삼인 l 3만원

최근 방영된 다큐멘터리 ‘학전 그리고 뒷것 김민기’의 여진이 계속되고 있다. 많은 사람은 음악가이자 공연제작자였던 김민기의 삶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앞것’이 아니라 ‘뒷것’을 자처하며 가난하지만 재능 있는 예술인들을 길러낸 그는 수많은 사람에게 든든한 뒷배였고 삶의 기준점 같은 사람이었다. 그런 김민기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친 사람이 있으니, 바로 무위당 장일순(1928~1994)이다.

‘뒷것 중의 뒷것’을 자처한 장일순의 삶과 사상을 조명한 ‘장일순 평전’이 최근 나왔다. 다큐멘터리 속 김민기 선생의 삶에 먹먹한 감동을 받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겠다. 사람을 소중하게 대하고 낮은 곳으로의 삶을 지향했던 김민기의 삶과 “사람이 곧 하늘”이고 “한순간이라도 하심(下心)을 놓치면 안 돼”라고 강조한 장일순의 삶은 겹쳐지는 대목이 많기 때문이다.

책은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편집국장을 역임했고 현재 ‘가톨릭일꾼’ 편집장인 한상봉이 집필했다. 출판사가 의뢰한 지 10년 만에 원고가 완성됐다. 저자는 서문에서 “장일순 선생님의 그릇이 너무 크고 가늠하기 어려워서 아주 오래 물러나 앉아 있었다”고 말한다. 무위당과 관련된 구술 자료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쌓여 저자는 기존 자료까지 집대성해 책을 완성했다.

오는 22일로 장일순 서거 30주기를 맞는다. 선생은 생전에 자신의 이름으로 책 한 권도 내지 않았고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하지 마라”는 유언까지 남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를 그리는 사람들은 늘고 있다. 어떤 사람을 만나든 그 사람의 상황에 맞는 도움을 주고 삶의 지혜를 담은 서화를 내밀었던 무위당은 많은 사람의 마음속에 여전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책은 무위당의 삶을 단순히 연대기순으로 나열하지 않는다. 무위당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낼 수 있는 핵심어를 중심으로 내용을 전개한다. 공경하는 마음, 혁신 정치, 교회로 우회하라, 사회 참여, 따뜻한 혁명, 생명운동과 생명사상 등으로 우리 시대의 참어른이었던 장일순을 정성스럽게 그려낸다.

1975년 12월, 장일순의 첫번째 서화전. 리영희 교수(오른쪽)는 장일순의 인간적 품격에 매료됐다고 말한다. 삼인 제공

장일순은 일제강점기인 1928년 원주에서 태어났다. 서울에서 배재중학교와 서울대를 다니던 학창 시절과 군 시절을 제외하고는 원주를 떠나본 적이 없다. 모두가 서울을 지향했지만, 그는 “저 엉터리 서울, 전체적 문제 덩어리 서울이 보인다”고 말했다. 수도권 집중화가 낳을 폐단을 그는 이미 그 시절부터 알고 있었던 선각자였던 것이다. 장일순은 포목상을 해서 집안을 일으켰던 할아버지 장경호에게 한학을 배웠고 큰 영향을 받았다. “학교를 세운다면 땅을 주고, 동네에 물이 마르면 우물을 고쳐주고, 보릿고개에 양식을 나누어주고, 가난하고 불쌍한 것을 못 보셨”던 할아버지를 똑 닮은 그였다. 할아버지 친구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박기정에게 글과 서예를 배워, 서예가로서의 기량도 뛰어났다.

판화가 이철수는 장일순을 “빛을 부드럽게 하여 속세의 티끌과 같이” 하는 사람으로 묘사했다. 이철수씨의 ‘화광동진’(1993) 작품. 삼인 제공

책을 보면 67년이라는 짧은 삶을 그는 일분일초도 허투루 살지 않았다. 사회개혁가로서의 면모는 십대 시절부터 발견된다. 1946년 해방 직후 미군정청은 경성제국대, 경성의전 등을 통합해 국립 서울대를 신설하고 총장에 미군 대령 출신을 임명하려 했다. 당시 교수, 교직원, 학생들은 ‘식민지 교육 반대’를 외쳤고, 장일순도 이 시위에 참여했다. 대학교 3학년 청년은 이 일로 제적을 당한 뒤 원주로 내려왔다. 그 시기 훗날 무위당의 사상적 토대를 이루는 동학과 해월 최시형에 관심을 갖게 됐다고 책은 전한다.

학생 신분으로 복적이 되어 장일순은 서울대 공대에서 미학과로 옮겼으나 6·25 전쟁이 터지면서 또 학업을 중단한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학교로 복귀하지 않는다. 20대였던 그는 “내가 졸업할 때까지 내는 등록금이면 60명이 넘는 가난한 아이들을 무상으로 교육할 수 있다”며 원주에서 교육사업에 뛰어든다. 대성 중고등학교를 설립해 아이들 교육에 힘썼다.

그는 한국전쟁을 거치며 전쟁의 참상을 뼈저리게 경험했다. 영어와 일본어에 능통했던 장일순은 반전반핵 운동에 앞장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과도 편지로 교감하면서 한반도 평화에 대한 고민을 심화시켰다. 해방 이후의 복잡한 정세 속에서 장일순은 현실 정치에도 참여했다. ‘중립화 통일론’ ‘평화통일론’을 외치며 원주에서 사회민중당 후보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5·16 군사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정권이 들어서면서 사상범으로 몰리며 3년간 옥고를 치른다. 군부 정권은 그를 ‘보안관찰’ 대상자로 분류하고 모든 사회활동을 차단했다.

장일순은 어느 곳에 있든 시대적 과제를 발견하고 그 문제해결에 뛰어든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사회적 명예나 권력을 탐하지 않았다. 감옥에서 나와 그는 아버지가 해오던 포도 농사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는데, 이 시기 그는 농사를 지으면서 나락 한 알에도 우주가 존재한다는 이치를 알아간다. 이는 훗날 도시와 농촌이 협력해 현대 산업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생명운동 ‘한살림’의 씨앗이 된다. 수해가 나면 재해복구사업에, 민주주의가 위협받으면 반독재운동에, 기계와 기술에 사로잡혀 지구의 생태적 질서가 훼손되자 생명운동에 뛰어들었던 그였다.

장일순이 붓으로 옮긴 ‘혁명은 보듬는 것’. 삼인 제공

책에는 “혁명은 따뜻하게 보듬는 것”이라고 말하던 장 선생의 인간적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여러 사람의 일화가 계속 펼쳐진다. 한 명 한 명이 구체적으로 들려주는 사연들에 독자는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큰 산’ 같았고 ‘넓은 바다’ 같았던 장일순의 삶과 사상에 빠져들게 될 것이다. 마지막 책장까지 덮고 나면, 장일순과 그를 따르던 ‘원주그룹’ 사람들의 헌신과 노력, 사상과 운동을 빼놓고는 한국 현대사의 큰 줄기를 설명할 수 없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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