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귀한 ‘체질’의 남자 작가가 나타났다 [책&생각]

임인택 기자 2024. 5. 17.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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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등단 김기태 첫 소설집
개성·강박·노동·아이돌 소재 다양
파격·구체성·유머로 무장한 9편
‘여성 대세’ 문단의 ‘신스틸러’
“문학은 무책임이 허락되는 광장”
2022년 등단 뒤 첫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펴낸 작가 김기태. 직장생활을 병행하며 등단하고 창작해왔다. 지난 15일 오전 한겨레신문사에서 진행된 인터뷰에서 김 작가는 “소설은 그 어떤 것에도 열린 광장이고 그래서 필요한 영역”이라고 말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
김기태 지음 l 문학동네 l 1만6800원

이 작가는 성별로 먼저 소개될 수밖에 없다. 여성 대세의 신진 작가 대오에서 그는 드문 ‘남성’이다. 등단 10년차 이하를 대상 삼는 젊은작가상이 있다. 2023년 수상자 7명 전원이 여성이었다. 2024년 청일점이 끼었다. 매해 가장 탁월한 단편을 꼽겠다는 이상문학상의 근래 흐름도 다르지 않다. 2024년 대상도 우수작도 모두 여성인 가운데 청일점이 박혔다. 문학교수들이 뽑는 ‘올해의 문제소설’은 또 어떤가. 서른일곱 비교적 늦깎이로 2022년 신춘문예 등단한 김기태 작가가 한 일이다.

그에게 남성 작가들 소설이 주목받지 못하는 세태에 관해 물었다. 15일 작가는 한겨레에 말했다. “창작자로, 독자로도 남성의 유입 자체가 별로 없다는 느낌은 들어요. 그러니 호명되는 작가는 더 적을 수밖에 없겠고요…. 전 그저 제가 쓸 수 있는 소설을 쓸 따름입니다. 독자를 의식하지만 독자를 위해서 쓰진 않습니다.” 지난 2년여, 제 각오대로 “고유한 궤적”을 남긴 단편들로 엮은 첫 소설집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을 펴낸 뒤다.

9개 단편으로 구성된 소설집은, 세번째 배치된 ‘전조등’으로부터 읽기가 시작되길 제안해본다. 나머지 소설들의 상류이기 때문이다. 하류에 가령 ‘팍스 아토미카’나 ‘로나, 우리의 별’, 그사이 어디께 ‘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나 ‘보편 교양’ 등이 있다. 김기태의 소설은 작품 내부의 극적 변화나 갈등보다 작품과 작품 사이 진폭과 긴장이 크다. 이러한 사태의 모든 징후를 ‘전조등’이 담고 있다. 여운이 각 단편 바깥에도 있으니, 좋은 소설집의 덕목일 것이다.

성격도, 생김새도 평이한 한 남자. 역행이란 걸 모른다. 사남매 중 막내로 태어나 부모의 가르침대로 주의할 일들을 지키며 자랐다. 목록을 지녔다. 횡단보도로만 건널 것, 수도꼭지는 끝까지 잠글 것, 신발 가지런히 둘 것…. “이루기보다는 당하지 않기 위한 지혜”였고, 학교에서 또한 따른 결과 중상위권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대학 연극부 활동이 의외라면 의외였겠으나 신입 땐 주인공의 대학생 후배, 나중엔 주인공의 대학생 선배 역할이나 했을 뿐이다. 뜻밖으로 “뭔가 다른 게 되어볼 수 있”지 않냐며 시작했으나, 뜻밖으로 무대에서도 그는 “다른 게” 되어보지 않았다. 학점과 자격증, 동아리 경력, 무색무취의 용모까지 더해져 그는 안정된 기업에 입사한다. ‘전조등’은 그의 성실한 직장생활, 성실한 연애생활, 다만 “자기다운 게 뭔지 생각하다 자기답게 사는 게 지겨워”지고 마는 그의 ‘비범’하지 않은 삶을 무던히도 비춰간다. 몇 차례 연애 뒤 서른넷에 만난 이에게 프러포즈해 결혼하고, 한 차례 유산했던 아내와 마침내 아이의 탄생, 더 큰 집으로의 이주를 실현하는 서른아홉이 되기까지.

일단 독자는 물을 만하다. 기사도 되기 어려운 이 삶이 소설이 될 법한가. 서사의 원동력은 ‘변신’ 아닌가. 그 의심에 맞선 존재감이 바로 김기태의 소설이다.

당장 ‘전조등’엔 갈등이 없고 위기가 없다. 실제 없어서가 아닐 것이다. 미연에 갈등을 회피하고 짐짓 배격하는 태도 덕분이다. 소년 시절의 ‘주의 목록’이 그랬다. 목록은 ‘범속성’을 지키려는 부적이자 주술이다. 나다운 게 뭔데? 사랑이 뭔데? 인생이란 게 뭔데? 때때로의 자기의심조차 ‘밈’(유행·모방의 요소)과 다르지 않으니, 소설은 범속의 욕망에 대한 지긋한 호의처럼도 보인다.

주체성이 규범이고 개성이 가치이자 상품으로 과잉하는 시대, 이런 입장(“이토록 좋은 일이 이토록 평범한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문학적 환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안온하게 보이는 삶의 안온하지 않을 어떤 낌새를 독자들이 간과할 수 없다는 데 이 소설의 반전, 아니 진실이 있다. 그건 사건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야간운전 중 전조등 하나가 부서질 뿐, 이사 첫날밤 조명 꺼진 거실 아이 안은 아내가 멈칫할 뿐으로, 돌연 서늘해지는 공기로서 감지되는 무엇이다.

조짐이 현실이 된 절반의 가능성이 바로 ‘팍스 아토미카’이다. ‘전조등’의 불운한 내일인 격이다. 주인공은 제 세계의 어떤 안전도 확신하지 못해 ‘목록’이란 것에 병적으로 매달린다. “수도꼭지는 끝까지 잠글 것”이라는 범속한 주문(‘전조등’)이 “수도가 꽉 잠기지 않았을까봐 손가락에 멍이 들 때까지 꼭지를 돌리”는 추문으로 변질되어 있다. 나를 둘러싼 세계의 실체, 아니 드라이어, 가스밸브조차 자신을 평범하게 두지 않는다. ‘나’는 “알람을 맞추었다” 표명함으로써 알람 조작을 무한 반복하는 행동을 추스르듯, 강박적 불안과 자기의심을 제어할 단 하나의 “결정적 주문”을 모색하기에 이른다. 과연 안위의 확증은 가능할까. 세계는 위기 정보로 가득하고, 나는 당장 어두운 밤 문 앞에 서서 잠 못 들고 있다.

두 작품, 두 주인공은 평이한 안온과 기이한 불온이라는 극단에 서 있다. 하지만 두 상태는 “예고될 수 없으며 호명될 뿐”이고, 선택된다는 세계관에서 서로 다르지 않은 인물이다. 모순과 불확정의 상태가 바로 세계이고, 그때 무엇을 호명할지 질문받는 우리를 은유하는 셈이다. 모든 게 순탄했으므로 행복한가, 평이했으니 실패한 삶인가, ‘나다움’의 삶은 성공인가, 평범한 삶이 진정 평범했던가, 비범한 삶은 과연 비범했던가….

작가는 “최악을 먼저 상정하는 버릇”으로 낙관주의를 유지한다고 한다. 곤궁한 청년 세대의 연애담(‘두 사람의 인터내셔널’)이 어떻게 착륙하는지, 개념 아이돌과 팬들의 연대투쟁(‘로라, 우리의 별’)이 어디까지 비상하는지를 보면 알 만하다. 이와 어울리듯 묘사 대신 요점 중심으로 작가의 서술도 질주해간다. “의도라기보단 체질이에요. 묘사는 좀 귀찮아서 그런 거예요.” 그런데도 지치지 않고 문장을 붙잡게 된다. 도처에 농담과 언어유희가 박힌 탓이다. “그건 진짜 체질인 것 같아요. 웃기려고 쓴 게 아닌데.” 작가는 웃었다.

지난 10년여 전혀 다른 직업인으로 살아온 작가 김기태는 2018년 혼자 쓴 첫 습작을 하드 디스크에 묻어두고, 이후 한겨레문화센터에서 “고인 물” 되도록 작품을 썼다고 했다. 평자들은 김기태의 여러 단편을 두고 “파격적”이란 수사를 되풀이하는데, 글쎄 파격은 ‘체질’일지도 모른다. 아이돌, 케이팝, 청년노동, 입시교육, 창당 정치 따위 가장 당대적 사안을 매우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고 있으니, 희귀한 남자 작가의 첫 소설집이 점유한 희귀한 매력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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