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대 청년이던 기세를 차마 꺾을 수 없어 [책&생각]

한겨레 2024. 5. 17.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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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책고병권 작가
후기구조주의 경유 빨려든 니체
즐겁고 유쾌한 혁명 꿈꾼 첫 책
개정은 엄두 못내고 ‘절판’ 결정
장애인야학 삶이 새 해석 낳을까
고병권 노들장애학궁리소 연구원. 본인 제공

나의 첫 책은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소명출판, 2001)이다. 책장 구석에 꽂혀 있던 이 책을 꺼내본 게 거의 십 년 만인 것 같다. 세월에 무게라도 있는 듯 시간이 쌓일수록 표지를 들춰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부끄러움이 컸다. 니체의 몇몇 문장들에 대한 투박한 해석도 거슬렸지만 내 손가락을 오그라들게 한 것은 문체였다. 당시 나는 도취해 있었다. 전날 밤 미친 듯 춤을 추고는 다음 날 아침 부끄러워 고개를 못 드는 사람처럼 감히 표지를 넘겨볼 생각을 못했다. 십년 전쯤 출판사에서 개정판을 내자고 했을 때 나는 오히려 절판시켜달라고 했다.

내가 니체를 좋아하게 된 데에는 개인적 취향만큼이나 시대적 배경이 있었다. 니체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원에 진학했을 때였다. 지금은 믿기지 않지만 인문학이나 사회과학 대학원 인기가 높았다. 취업이 잘 돼서가 아니라 그냥 공부하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럴 만한 시대였다. 대외적으로는 사회주의 국가들, 특히 미국과 패권을 다투던 소련이 붕괴했고, 대내적으로는 문민정부 이후 소위 사회변혁 운동들이 사그라들었다. 새로운 사회 이론들이 쏟아져 들어오던 때이기도 했다. 세상이 어디로 가는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한마디로 공부가 필요하던 때였고 공부를 원하던 때였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비슷한 고민을 갖고서 공부를 함께 했다.

나는 탈근대론 내지 후기구조주의라고 불리던 이론들을 경유해서 마르크스를 다시 읽어보자는 사람들과 함께 공부했다. 대학원 동기들과는 마르크스 원전을 읽었고 서울사회과학연구소에서는 구조주의와 후기구조주의 이론가들의 저작을 읽었다. 마르크스 원전 읽기에 조금 지쳤을 때 누군가 니체를 읽어보자고 했다. 당시 니체는 우리가 즐겨 읽던 푸코, 들뢰즈, 데리다 등의 글에서 자주 출몰하는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그를 읽는 게 쉽지 않았다. 글도 어려웠지만 강자를 칭송하는 표현이나 잘난 척하는 문체가 자꾸 걸렸다. 하지만 역시 때가 좋았다. 당시는 기존의 사유를 뿌리부터 재검토해야 한다고 생각하던 때였고, 니체와 관련해서 새로운 해석의 시대를 열었던 학자들의 글이 소개되고 있었다. 마음이 열린 상태에서 머리가 달아올랐으니 번개를 맞기에 딱 좋았다.

니체를 읽고서 패배의 짜릿함을 느꼈다. 대학시절 선배들의 꼬랑지를 붙잡으며 배우고 익혔던 이념, 관점, 관행, 습속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부서지고 뒤집히는데도 기분이 좋았다. 사회학을 전공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니체만 읽었던 것 같다. 쓸 수 있는 글도 니체밖에 없었기에 석사논문도 니체로 썼다. 이후 몇 년간을 니체 전도사처럼 살았다.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은 2001년 초 ‘연구공간 수유너머’에서 행한 강연 원고를 묶어낸 것이다. 이 책은 일원성에 맞서 다양성을, 동일성에 맞서 차이를, 존재에 맞서 생성을, 정체성에 맞서 변이를, 합리성과 도덕에 맞서 욕망과 광기를, 역사에 맞서 계보를, 엄숙주의에 맞서 놀이와 춤, 웃음을 찬미하는 책이다. 무엇보다 90년대 전반의 무겁고 심각했던 공기를 밀어내고 즐겁고 유쾌한 혁명을 꿈꾸었던 책이다.

십년 전쯤 개정판 출간 제안을 받았을 때 책을 다시 읽어보았다. 니체에 관한 해석 중 일부는 바로잡고 싶었고 일부는 다듬고 싶었다. 그러나 개정 작업을 포기했다. 시대를 배경으로 한 청년의 기세를 꺾는 게 쉽지 않았다. 니체의 말이 아니라면 내 말로라도 선포하겠다는 열정과 고집이 대단했다. 그때의 체험이 만들어낸 니체를 지금의 내가 함부로 대할 수도 없었다. 결국 절판이라는 어정쩡한 결정을 내렸다.

그렇다고 니체에 대한 읽기와 쓰기를 그만둔 것은 아니다. 나는 내가 있는 곳을 알고 싶을 때마다 니체에 대해 읽고 썼다. 니체 해석이 얼마나 달라졌는가로 내가 얼마나 달라졌는지를 가늠해보곤 했다. 첫 책을 쓸 때의 도취는 더 이상 없었지만 장애인야학에서 보낸 단련의 시간 덕분에 나는 지독한 악당을 닮은 위버멘쉬에 대해, 혹독한 삶을 긍정하는 운명애와 영원회귀에 대해 다시 배울 수 있었다. 또 발달장애인들의 거침없는 노래와 춤에서 과거와는 다른 유쾌함도 보았다. 언젠가 이런 투쟁이, 이런 노래와 춤이 내 것이 된다면 그때는 첫 책의 개정판을 펴낼 수도 있지 않을까 싶다.

작가

그리고 다음 책들

언더그라운드 니체

니체의 ‘서광’을 해설한 책. 내가 속했던 공동체가 해체되고 여기저기 떠돌다가 다시 공부 마음을 잡으며 ‘서광’을 읽었다. ‘근거들의 근거없음’이라는 말에 꽂혔다. 바닥을 뚫고 들어가 ‘근거들의 근거없음’을 드러내는 광부의 모습에서 나는 사유와 민주주의의 이미지를 찾았다. 아울러 이런 일을 할 때는 ‘천천히, 신중하게, 부드럽게, 하지만 가차없이’ 해야 한다는 지침도 얻었다.

천년의상상(2014)

다이너마이트 니체

니체의 ‘선악의 저편’을 해설한 책. ‘언더그라운드 니체’가 바닥을 뚫고 내려가는 사유의 광부에 관한 책이라면 ‘다이너마이트 니체’는 산정 높은 곳에 오르는 사유의 등반가를 다룬 책이다. 강자의 단련과 육성에 관한 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우리 정신이 어디까지 자신의 진리를 견디어낼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이런 일을 할 때는 ‘더 강력하게, 더 악독하게, 더 깊이 있게, 하지만 더 아름답게’ 해야 한다는 지침도 명심해야 한다.

천년의상상(2016)

고병권의 자본강의

마르크스의 ‘자본’을 해설한 책. 2018~2021년 출간된 ‘북클럽자본’ 시리즈(전12권)를 한 권으로 묶었다. ‘자본’을 대신 읽어주는 책이 아니라 ‘자본’을 함께 읽는 책을 쓰고자 했다. 또 ‘자본’을 요약하기보다 각각의 문장 안에 접혀 있는 여러 문장들을 펼쳐 보이려는 마음으로 썼다. 다른 일상을 중단하고 집필하는 데만 꼬박 3년이 걸렸다. 비록 소수일지라도 몇몇이 모여 ‘자본’과 함께 이 책을 읽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나를 쓰다듬어준다.

천년의상상(2021)

사람을 목격한 사람

2018년부터 2023년까지 신문과 잡지에 썼던 글 그리고 이런저런 현장에서 행했던 발언들을 묶어낸 산문집. 사람임에도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던 사람(첫 번째 사람)과 그에게서 사람을 본 사람(두 번째 사람)의 이야기를 담았다. 특히 두 번째 사람의 소중함을 드러내고 싶었다. 우리는 ‘함께’를 지향한다고 하지만 그 이전에 ‘함께’ 덕분에 살고 있다는 사실, 따라서 우리에게는 ‘함께’를 가꾸어야 할 책무가 있다는 사실도 말하고 싶었다.

사계절(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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