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바토 데 사르노의 첫 구찌 크루즈 쇼...새로운 구찌를 향해 닻을 올리다.

최보윤 기자 2024. 5. 17. 00:09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구찌, 영국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사바토 데 사르노의 구찌 2025 크루즈 컬렉션 공개

‘처음’은 언제나 쉽지 않다. 행위자는 그 처음이라는 단어 뒤에 숨어 선처를 바랄 수도 있을 것이고, 지켜보는 이의 입장에선 상대가 처음이기 때문에 박수 보내기를 유예할 수도 있다. 지지하면서도 지적하고, 미소를 지으려다가 정색하곤 한다. 전적으로 믿고, 격려하고, 응원을 보내는 건 아마도 지구상엔 하나 밖에 없을 것 같다. 자녀의 모든 ‘처음’을 함께 하는 부모의 마음 말이다.

그런 점에서 구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사바토 데 사르노(Sabato De Sarno)는 ‘삐딱한’ 관중마저도 어느새 부모의 신성한 마음으로 관점을 전환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의 디자인은 아름답고 우아하고 품격있으며 생동감 있지만, 무엇보다 ‘그 다음’을 기대하게 하는 자질을 품고 있다. 그의 디자인 속엔 ‘희망’이란 메타포가 나비처럼 날아든다.

데 사르노 어깨 위에 오른 부담이 마음에 쓰여서가 아니다. 그의 사명감 만큼이나, 100년 이상 역사를 지닌 구찌가 다시 회복해주길 바라는 염원 같은 게 공동체 의식처럼 축적됐기 때문이다. 구찌가 탄생한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것도 아니면서, 구찌를 지켜내야 한다는 ‘패션적 애국심’ 같은 게 문장(紋章)처럼 새겨진 듯 하다. 구찌 깃발을 들고 당당하면서도 공손하게 행진하는 사바토 데 사르노의 모든 ‘처음’을 함께 하려는 지원군이 상당한 건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변화할 자세를 갖춘 데 사르노와 구찌의 방향성에 고개를 끄덕이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 13일(현지시각) 영국 런던 테이트 모던에서 열린 ‘구찌 2025 크루즈’ 쇼는 노출 콘크리트 미술관을 가득 덮은 초록 정원처럼 구찌의 재탄생을 축복하는 따사로운 향연이었다. 사바토 데 사르노 더 젊고, 더 고귀하며, 더 품위 있으며, 더 사랑스러운 구찌를 구현해냈다. 눈을 현란케 하는 패턴이나 과감한 관능미 같은 것으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전임자들에 비하면 다소 조용하고 고상하며 미니멀하다고 할수 있어 보인다. 하지만 간결해 보이는 구조 속에 숨은 디테일과 수공예 요소들은 구찌가 지녔던 디자인의 힘을 만끽하게 만든다.

구찌 크리에이티브 디렉서 사바토 데 사르노/구찌*Gaspar-Ruiz-Lindberg
부티크/구찌크루즈2025/최보윤/구찌제공
부티크/구찌크루즈2025/최보윤/구찌제공
부티크/구찌크루즈2025/최보윤/구찌제공

이번 크루즈쇼는 데 사르노가 부임한 뒤 처음으로 선보이는 크루즈 쇼. 크루즈 쇼가 모든 럭셔리 패션 브랜드가 정규 컬렉션 외에 선보이는 또다른 정체성으로 자리잡고 있는 시대에 데 사르노의 첫번째 크루즈 역시 디자이너가 여행과 삶을 어떤 식으로 접목시키는 지 그 철학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지난해 9월 밀라노 데뷔쇼를 치른 그에게 성마른 비평가들은 그의 출발에 화사한 꽃잎을 깔아줄 만큼 인내는 없어보였지만, 새로운 구찌에 대해 의심을 보내는 이 역시 찾기 어려워 보였다. 데뷔쇼에 이은 첫 크루즈 쇼는 ‘여행’이라는 뜻을 내포한 크루즈 쇼의 의미 답게 브랜드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행보를 예비할 수 있게 해줬다. 데 사르노는 그 점에서 매우 현명하게 청중을 설득시킨 것으로 보인다.

데 사르노가 택한 것은 놀랍게도 런던. 에너지 넘치는 창의성이 풍부한 곳이긴 하지만, ‘크루즈’라는 단어에서 주듯 보통의 휴양지와는 거리가 좀 있어보인다. 데 사르노가 탐구하고 여행한 건 구찌라는 브랜드의 탄생 여정이다.

런던은 구찌의 창업자 구찌오 구찌가 1899년 런던 사보이 호텔 포터로 일한 것과 연계된다. 구찌오 구찌는 당대 최고의 상류층이 보여드는 그곳에서 취향의 제국이 어떻게 형성되는 지 예리하게 관찰했다. 최상류층 여행자들의 취향을 자신만의 아카이브로 축적한 뒤 구찌오 구찌는 1921년 지금의 럭셔리 왕국으로 발전하는 토대를 연다.

부티크/구찌크루즈2025/최보윤/구찌제공
부티크/구찌크루즈2025/최보윤/구찌제공
부티크/구찌크루즈2025/최보윤/구찌제공
부티크/구찌크루즈2025/최보윤/구찌제공

크루즈는 ‘장소의 쇼’라는 별칭이 있을 정도로 장소가 디자인의 모든 것을 대신 말해주는 경우가 있다. 이 영리한 디자이너는 구찌의 화려함에 도취돼 잠시 잊고 있었던 창업자의 ‘출발’을 런던으로 상기시켰다. 최근에 유행하는 ‘시간 여행’ 드라마처럼 100년을 오가는 이 디자이너는 쇼노트를 통해 이렇게 말했다. “이 도시는 저에게 많은 것을 주었습니다, 저를 환영해 주었고, 제 말에 귀 기울였습니다. 런던은 구찌에게도 그런 도시로, 하우스의 창립자는 이곳에서 다양한 것들을 경험하며 영감 받았습니다. 이번 크루즈 쇼를 런던에서 개최하게 된 것은 서로 대비되는 것들을 하나로 모아, 이들이 대화하며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원동력인 구찌의 창의성, 그 본질을 탐닉하고자 하는 하우스의 열망에서 비롯됐습니다.”

그의 컬렉션은 태초를 지향하는 순수성이 배어있다. 단아하지만 에지있고, 화려하면서도 엄격한 이분법(Dichotomies)적 대조가 긴장을 잃지 않게 한다. 살얼음 위 가시밭길 같은 그 길위에서 데 사르노의 의상 위로 화사하게 야생 캐모마일 꽃 패턴은 매우 숙련되면서도 억지로 뽐내지 않는 세련된 절제미가 엿보게 한다. 그 꽃말이 ‘역경 속의 힘’인걸 감안하면 데 사르노가 작은 패턴 하나에도 어떠한 고민을 담아 선택했는지 느끼게 한다.

테크니컬 개버딘 소재로 제작된 다양한 실루엣의 숏 코트는 정밀하게 재단됐다. 야생 캐모마일 플로라 모티브를 담은 스타일로도 선보인다. 이를 통해 본래의 안정감 있는 보호 기능이나 시폰, 러플, 레이스 소재의 이브닝웨에서 경험하게 되는 고급스러움과는 또 다른 새로운 느낌을 선사한다. 플로라 모티브는 또한 3D 레이저-커팅으로 만든 오간자에 시퀸을 수작업해 만든 뒤 스커트나 슬립 드레스에 적용되기도 했다.

부티크/구찌크루즈2025/최보윤/구찌제공
부티크/구찌크루즈2025/최보윤/구찌제공
부티크/구찌크루즈2025/최보윤/구찌제공
부티크/구찌크루즈2025/최보윤/구찌제공
부티크/구찌크루즈2025/최보윤/구찌제공
부티크/구찌크루즈2025/최보윤/구찌제공

이는 소비자를 대하는 데 사르노의 겸손한 미학도 반영한다. 군림하는 듯했다가도 소비자 발 밑에 있는 것이 바로 럭셔리를 수식어로 달고 있는 패션이다. 럭셔리란 그만큼 형틀 같은 것이다. 도달하기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집행은 순간이다. 이전보다 더 창의적이야 하고, 더 진화해야 하며, 새로운 시대정신을 제안해야 한다. 관대함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 같은 이 냉정한 세계에서, ‘두 번’은 허용된 관용이 아닌 것 같은 공간에서, 누구도 편들어줄 것 같지 않은 외롭고 고독한 싸움을 벌어야 한다. 그는 우아하게 승리하고, 자중하며 혁신한다.

이번 컬렉션은 원형을 뒤틀고, 선입견에 도전하며, 다양한 관점을 선사한다. 워크웨어와 스트리트 스타일, 살롱 스타일이 융합된 의상들이 등장한다. 하우스의 상징 중 하나인 랍스터-클래스프(Lobster-clasp)를 우아한 진주 네크리스로 재해석한 주얼리는 기능성과 장식성을 모두 갖췄다. 진주 네크리스는 이 외에도 다양한 디자인으로 등장한다.

이번 컬렉션에서 또 다르게 눈길을 사로잡은 건 다채로운 플랫 슈즈. 세계적 패셔니스타 알렉사 청이 인터뷰 매거진을 통해 “당장이라도 갖고 싶다는” 발레 슈즈 모양의 플랫 슈즈는 많은 이들을 설레게 하기에 충분했다. 그동안 구찌가 거대한 플랫폼 위에 탑승하는 형태의 슈즈를 많이 선보였던 것과 비교하면 더욱 대조적이다. 하우스와 승마 세계의 관계에 경의를 표하는 이 홀스빗 모티브는 스웨드 소재의 슈즈 및 크리퍼를 통해 다시 한번 등장한다.

데 사르노의 재단에 대한 뛰어난 재능을 엿보게 하는 건 우아한 실루엣의 스웨이드 재킷이나 상의 뿐만 아니라 섬세한 비즈 프린지가 찰랑이는 타탄 체크 의상이다. 영국적인 상징을 접목시키면서도 데뷔 쇼에서 선보였던 화려한 비즈와도 연계돼 데 사르노의 장식적인 미학을 선보인다.

부티크/구찌크루즈2025/최보윤/구찌제공
부티크/구찌크루즈2025/최보윤/구찌제공
부티크/구찌크루즈2025/최보윤/구찌제공
부티크/구찌크루즈2025/최보윤/구찌제공
부티크/구찌크루즈2025/최보윤/구찌제공

깔끔하게 재단된 데님, 무릎 길이의 펜슬 스커트, 헐렁하고 감각적인 베이지색 아노락 등은 데뷔 컬렉션보다 더 가볍고 탐스러웠다. 레이스 브라렛 등 은은한 관능미 역시 빠지지 않았다. 라일락과 더스티 핑크, 그린 옐로우와 번트 오렌지, 블루, 버터 옐로우와 올리브, 라이트 그린, 더스티 핑크와 버건디 등 예상치 못한 컬러 조합은 컬렉션을 낭만적으로 물들였다.

1970년대 초 하우스 아카이브에서 영감 받은 구찌 블론디 핸드백은 레더 소재와 스웨이드의 조화 혹은 코튼 캔버스 소재의 다양한 색상 및 컬러로 선보여 발레리나 풍 플랫슈즈와 함께 브랜드의 ‘캐시 카우’ 역할을 단단히 할 상징처럼 보였다.

역시 특히나 눈에 띈 건 데뷔 컬렉션부터 선보인 붉은 와인빛 ‘로소 앙코라(Rosso Ancora)’ 제품들. 파스텔 향연 속 강건하게 드러나는 붉은 빛은 데 사르노의 원숙한 혈기를 떠올리게 한다. 데 사르노를 지지하는 목소리들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 중 미국 패션지 하퍼스 바자는 직설적이다. “이 사업(패션)은 욕망에 관한 사업이다. 드 사르노는 우리 모두가 되고 싶은 여성을 위한 옷장을 제공함으로써 자신의 입지를 다지고 있다. 멋지다는 꿈을 위해 아름답게 만들어지고 잘 실행된 옷과 액세서리 컬렉션을 디자인하는 것입니다. 과거 구찌 구찌가 했던 일이기도 하다.”

Copyright © 조선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