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형의 책·읽·기] 담벽 낮춰 ‘생명’ 품은 대화, ‘사람들’로 이어지다

김진형 2024. 5. 17.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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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 30주기 맞아 평전 출간
생명운동 ‘원주 그룹’ 스승 평가
지학순 주교·김지하 시인 인연
해월 최시형 동학사상 영향도
“종교는 존중하되 배척 말아야”
▲ 잡초가 우거진 원주 봉산동 자택에서의 무위당 장일순(오른쪽)과 아내 이인숙. 남편은 아내에게 늘 존댓말을 썼고, 아내는 남편을 찾는 손님상을 차려내는 것이 일상사였다고 한다. 아래 글씨는 1989년 장일순이 쓴 ‘밥’. 장일순은 “밥 한 그릇에 하늘과 땅과 사람이 있다”는 해월 최시형의 밥 사상을 새롭게 해석했다. 사진제공=도서출판 삼인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아무것도 하지 않음이 없다.”

‘생명운동’의 스승으로 알려진 무위당 장일순(1928∼1994)은 생전 책 한 권 내지 않았다. 독재 정권의 감시를 받았던 그가 주변 사람들을 보호하는 방편이었지만, 근본적으로 외로움을 동반하는 글쓰기 대신, 그를 찾아오는 이들과의 교감을 택한 것이다.

장일순은 항상 낮은 자세로 사람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구체적으로 응답했다. 늘 점퍼를 입고 다니던 장일순은 꾸밈없는 옷차림으로 사람들과 쉽게 어울릴 수 있었다.

무위당 서거 30주기를 맞아 ‘장일순 평전’이 나왔다. 온라인 매체 ‘가톨릭 일꾼’ 편집장으로 활동 중인 한상봉 작가가 펴낸 책의 부제는 ‘걸어 다니는 동학, 장일순의 삶과 사상’이다.

장일순은 일제강점기 원주에서 태어나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장경호 밑에서 한학을 익혔고, 우국지사 박기정에게서 서화를 배웠다. 1944년 경성공업전문학교(서울대 공대 전신)에 입학했으나 총장에 미군 대령 출신 해리 비드웰 앤스테드를 임명하는 방안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여해 제적됐다. 1947년 서울대에 복적됐으나 자퇴하고 다시 서울대 미학과에 입학했다.

한국전쟁으로 학업을 중단한 뒤에는 줄곧 원주에 살았다. 1954년 26세에 지인들과 함께 원주 대성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1958년과 1960년에는 국회의원 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했으며 5·16 직후 평소 주창하던 중립화 평화통일론이 빌미가 돼 서대문형무소와 춘천형무소에서 3년간 옥고를 치렀다.

1960∼70년대에는 지학순 천주교 원주교구장, 김지하 시인 등과 농촌·광산지역 농민과 노동자들을 위한 교육과 협동조합 운동을 펼쳤고,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반독재 투쟁을 지원하면서 사상적 지주 역할을 했다. 1980년대에는 원주보고서를 채택하고 ‘한살림 운동’을 열어 협동조합의 기반을 다졌다.

연대기적 기록만으로 무위당을 대변할 수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의 말과 행동이다. 2000점이 넘는 서화 작품을 남겼지만 단 한 번도 돈을 받고 팔지 않았다. ‘지렁이체’로 불리는 그의 글은 언뜻 못 쓴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장일순은 리어카에 써진 ‘군고구마’라는 글씨처럼 같이 일상 가까이에 있고, 생명의 의지가 담긴 글을 좋아했다.

“모든 종교는 담을 내려야 한다고 봅니다. 종교라는 걸 존중은 하되 생활과 만남에 있어서 나누어져서는 안 된다고 마음먹고 있습니다. 생명은 하나니까요. 종교에 생명이라는 내용이 없다면 그 종교는 거짓말이죠. 저는 불교에서 배운 것과 가톨릭에서 배운 것이 전혀 갈등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가톨릭 신자였던 장일순은 불교와 유학, 노장사상에도 조예가 깊었다. 특히 동학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의 사상과 세계관에 많은 영향을 받아 ‘걷는 동학’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에게 생명사상의 물꼬를 열어 준 것도 동학이었다. 유학을 배경으로 서학을 받아들였으며, 동학에서 생명운동의 비전을 발견했다.

원주역에서 딸의 혼수비용을 소매치기 당한 여성을 직접 도와준 일화는 유명하다. 원주역 앞 노점에서 소주를 시켜놓고 앉아 노점상들과 얘기를 나눴고, 결국 소매치기를 찾아 달래 돈을 받아냈다. 여기에 자기 돈까지 합쳐 주인에게 전했다. 그때 장일순은 소매치기에게 “미안하네. 내가 자네 영업을 방해했어. 이것은 내가 그 일에 대해 사과를 하는 밥과 술이라네. 한 잔 받으시고, 용서하시라”고 말을 전한다.

평전임에도 무위당을 둘러싼 주변인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생명’에 입각한 이웃과의 조화가 그가 지향했던 대안적 삶의 모습일 것이다.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 ‘무위당 사람들’의 이름도 그렇다.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하지 마라”라는 유언 때문에 모임을 만들 수 없었으나, 무위당의 정신을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선양회나 기념사업회라는 이름 대신 ‘무위당 사람들’이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무위당이 남긴 말도 같은 맥락이다. “아우들이 날 무등 태워가는 거지. 난 아무것도 아냐.” 김진형 formation@kado.net

 

#장일순 #무위당 #가톨릭 #서울대 #소매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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