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택의 그림 에세이 붓으로 그리는 이상향] 72. 남아도는 햇살에 흐드러진 꽃잔치 ‘아연봄색’

이광택 2024. 5. 17. 0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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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철쭉 꽃이
잔치를 벌였다.
꽃과 더불어 산의 구릉지
그득 환한 조명등처럼
봄의 볕뉘까지
풍성해서 일까?
바라보이는 눈앞 정경의
숨결이 은근해
편안하고 아름답다.
빛이란 참 불가사의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과 공간이
그 빛 때문에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게 아닌가!
▲ 이광택 작 ‘마음속 공부방’(2023)

아연 봄이다. 얼음같이 찬 바람이 허공에서 베 폭 찢는 소리로 울던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햇살은 남아돌아 봄기운이 무르익었다. 아니, 봄이 흐드러졌다고 해야 맞는 표현 같다. 예년보다 보름이나 일찍 고추나무, 고광나무, 아카시아꽃이 만발했거니와 밤에는 목이 갈라져 쉰 소리로 피를 토하듯 소쩍새가 운 지도 오래다. 게다가 유난히 봄의 더위가 약이 차올라서일까? 노년도 치한처럼 후다닥 오는 게 아닐까 싶어 지나가는 봄이 유난히 애달프고 섭섭하다. 갑자기 우리 조상들이 사계절 중에서 왜 유독 봄에만 ‘새’라는 접두어를 붙였을까 궁금했는데 역시 약동의 계절이 되니까 약간은 알 듯도 싶다. 새여름, 새가을, 새겨울이란 말은 없지 않은가? 짐작하건대 그것은 만물이 소생하는 일 년의 첫 계절을 맞이해 사람 역시도 해묵어 낡은 마음일랑 훌훌 내던지고 새롭게 가꾸어 가라는 뜻을 담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해석하니까 ‘새봄’이라는 말을 입안에서 굴리면 지금 마당에 앙증스러운 자태로 피어 있는 은방울꽃의 이름만큼 고운 향기가 느껴지고 원추리처럼 쑥쑥 올라오는 생의 기운이 느껴진다.

오늘 소개하는 그림도 계절로 말하면 딱 요맘때이다. 산철쭉 꽃이 잔치를 벌였다. 꽃과 더불어 산의 구릉지 그득 환한 조명등처럼 봄의 볕뉘까지 풍성해서일까? 바라보이는 눈앞 정경의 숨결이 은근해 편안하고 아름답다. 빛이란 참 불가사의한 존재라는 생각이 든다. 시간과 공간이 그 빛 때문에 비로소 존재하게 되는 게 아닌가! 그래서 아인슈타인 같은 이도 “빛은 신의 그림자”라고 했나 보다. 그 빛의 미묘한 떨림에 젖어 나긋나긋 부는 봄바람을 타고 마음은 한없이 먼 곳으로 간다.

새삼 본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무엇을 ‘본다’는 것을 ‘살아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였다는데, 현대인에게도 본다는 행위는 사실 숨 쉬는 것만큼 중요한 게 아닐까 싶다. 키스도 보는 시선의 끝, 마음의 끝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눈으로, 마음으로 이미지를 보는 것! 그것은 우리 생의 마른 나뭇가지에 물을 길어 올려 보랏빛 생기로 돌게 하는 일이요 새잎을 틔우는 일이다. 나만 해도 어떠한 것을 봄으로써 하나의 생각이 다른 생각으로 이어지고 한 작품이 또 다른 작품으로 연결되지 않는가. 진지하게 사물을 들여다볼 때 그 사물에는 거대한 세상이 비추어진다.

며칠 전 모교(춘천고)가 개교 100주년을 맞았다. 당연히 일백 성상(星霜)을 기리고 새로운 100년의 항로를 한마음 한뜻으로 여는 기념행사가 다양하게 진행되었다. 당연히 동문의 미술 전시회도 개최되었는데, 온 힘과 온 정성이 담긴 작품들에서는 유현(幽玄)한 빛이 발산되고 있었다. 나의 출품작이 바로 이 작품이었다. 못질이 되어 있는 듯 부신 햇살 속의 정경에 넋이 나간 그림 속 나의 모습에 실소하게 된다.

학창시절 모교 도서관의 입구 위에 걸려 있던 글귀가 “걷는 자만이 갈 수 있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나 이제나 오후 3시 같이 존재감이 없는 위인으로 살고 있지만, 이 말은 항상 프란츠(알퐁스 도데의 ‘마지막 수업’ 주인공 소년)의 정신을 일깨운 아멜 선생님같이 내 가슴속에서 나침반의 방향타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고교에 입학한 지 어느덧 햇수로 47년! 사내로 태어나서 일세를 풍미한 것은 그만두더라도 공명을 떨친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바라지게 가세를 일으키지도 못했으니 한평생이 유야무야 허퉁스럽기 짝이 없는 얼간이 같은 삶이었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사람의 인생 아니던가. 나이 드는 것은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고 했듯이 올라갈수록 숨은 가쁘고 지치기는 해도 산 밑에서는 보이지 않던 세상을 보게 된다고 하지 않던가. 내게도 그러한 행운이 오면 좋겠다.

오늘 밤에는 마당에서 아내와 함께 미스킴라일락의 향기를 안주로 막걸리를 한잔 해야겠다. 서양화가

#산철쭉 #봄기운 #고추나무 #고광나무 #아카시아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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