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이야기] 조선 제일 미식가의 찬사 ‘이 음식’…“부드럽고 매끄러운 맛 최고”

관리자 2024. 5. 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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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이야기] 두부(豆腐)
허균 ‘도문대작’서 장의문 밖 두부 언급
제조 기술 사찰 전해져…‘조포사’ 여럿
일제강점기땐 일본식과 조선식 합쳐져

생명의 원천인 ‘먹거리’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습니다. 그저 한끼가 아니라, 한끼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이유입니다. ‘맛있는 이야기’는 먹거리의 중요성을 되새기고 즐거움을 위해 마련한 코너입니다. 특히 이 코너엔 인문학·영양·문화·여행 등 각 분야의 최고 전문가들이 참여해 내공(內功)을 전하게 됩니다. 독자 여러분의 관심을 기대합니다.

“장의문(藏義門) 밖 사람들이 잘 만든다. 부드럽고 매끄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이 글은 역모 혐의를 받아 1618년 음력 8월24일 서울의 서소문 밖 저잣거리에서 능지처참당한 허균(許筠, 1569∼1618)이 썼다. 필자는 허균을 조선시대 미식가 가운데 으뜸에 드는 인물로 꼽는다. 바로 그가 쓴 ‘도문대작(屠門大嚼)’이란 글 때문이다.

필자는 ‘도문대작’에 나오는 150여종의 식재료와 음식의 지명을 허균의 일대기와 대조한 적이 있다. 그 결과 ‘도문대작’에 나오는 모든 먹거리를 허균이 모두 직접 맛보았음을 확인했다.

허균은 ‘도문대작’의 서문을 1611년 음력 4월21일 유배지인 전라도 함열현(咸悅縣·지금의 익산시 함라면)의 초가에서 썼다. 어릴 적부터 입맛이 남달랐던 허균은 막상 유배지에 와서 생활하는 가운데 “하루에 간신히 두끼를 먹다보니 종일 배가 고팠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결국 허균은 “여러 음식을 종류대로 나열해 기록하고 때때로 보면서 고기 한점을 눈앞에 둔 셈” 치기 위해 글을 썼다. 그리고 글의 이름을 ‘푸줏간 앞에서 크게 입맛을 다시다’라는 뜻으로 ‘도문대작’이라고 붙였다.

앞의 글에서 허균이 적어 놓은 장의문은 지금의 ‘창의문(彰義門)’으로 여겨진다. 창의문은 한양도성 사방에 있던 작은 문 가운데 서북쪽에 세워진 문으로 지금도 그 자리에 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이 문의 북쪽에는 ‘장의사’라는 절이 있었다. 연산군은 이 절을 허물고 ‘탕춘대(蕩春臺)’라는 정자를 지어 질퍽하게 놀았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이 문을 장의문이라고 불렀던 모양이다. 지금의 서울 세검정이 바로 장의문 밖이다.

두부의 주재료는 노란색의 큰 콩, 곧 대두(大豆) 혹은 황두(黃豆)라고 부르는 콩이다. 이 콩을 맷돌에 갈아 솥에 넣고 약한 불로 끓인다. 이것이 콩비지다. 이 콩비지를 삼베나 무명으로 만든 주머니에 붓는다. 식기 전에 주머니의 입을 양쪽으로 묶고, 그 사이에 나무 막대를 꽂아 돌리면서 콩물을 빼낸다. 이 콩물에 ‘간수(습기가 찬 소금에서 저절로 녹아 흐르는 짜고 쓴 물)’를 첨가한다. 간수의 주성분은 염화마그네슘이다. 콩물의 식물성 단백질이 염화마그네슘을 만나면 바로 응고된다. 이것이 바로 두부다.

허균이 말한 “부드럽고 매끄러운 두부”가 되려면 콩을 맷돌에 곱게 가는 일은 물론이고, 간수를 잘 섞어 굳히는 실력을 갖춰야 한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간수가 들어가서 응고하는 거품을 보고 두부를 ‘포(泡)’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불교 사찰 중에는 ‘조포사(造泡寺)’라고 불린 곳이 한양도성 근처에 여럿 있었다. 고려 후기에 중국에서 들여온 두부 만드는 기술이 사찰에 전해졌고, 고기 대신에 두부를 제사의 제물로 올린 사찰의 스님들이 제조 전문가였다.

1876년 2월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조선에는 일본인이 몰려들었다. 일본인도 두부를 즐겨 먹었으므로, 그들이 사는 곳에는 소규모의 일본식 두부 공장이 자리 잡았다. 그들은 일본에서 하듯이 동이 트는 아침에 갓 만든 두부를 수레에 싣고 놋쇠로 만든 종을 흔들며 골목을 누볐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식과 조선식 두부의 제조 기술이 근대 도시에서 결합했다.

1970년대 초반부터 ‘경지정리’ 사업이 농촌 곳곳에서 행해지면서 논두렁에 자라던 콩이 거의 사라져갔다. 이제 허균이 찬사를 보냈던 부드럽고 매끄러운 두부는 지천으로 깔렸다. 하지만 두부의 주재료인 대두는 다른 나라 것이 더 많다.

주영하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속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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