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경란의얇은소설] 제 말 좀 들어주세요

2024. 5. 16. 2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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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게 거북한 말 어렵지만
그렇게라도 대화 시도하고파
마음의 문을 닫고 살던 딸은
“아빠는 딸을 사랑해?” 묻고파

샤만타 슈웨블린 ‘입속의 새’(‘입속의 새’에 수록, 임지영 옮김, 창비)

사 년째 떨어져 사는 아내가 어느 날 그를 찾아와 말했다. 듣고 싶지 않겠지만 좀 거북한 이야기를 해야겠다고. 가족이나 누군가가 이런 말을 꺼내면 긴장되고 불안해지는데 그건 소설의 인물이 그래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다음 말도 알 것 같다.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그는 딸에 관한 이야기라고 짐작한다. 그동안 제대로 돌보지 못했으니까. 아내는 딸이 집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집에 있는 딸에게 무슨 일인가 벌어진 모양이다. 좀 거북한 일이. 그렇다. 집에는 가족이 있고 가족에게는 터놓고 말해야 할 무언가가 있다.
조경란 소설가
학기가 끝났는데도 딸은 교복을 입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창문 너머 정원의 한 지점을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다행히 딸은 건강하고 생기 있어 보인다. 거실 창가에는 새장이 천장에 매달려 있다. 아내가 그를 부엌으로 불러 나직한 소리로 말한다. 당신 딸이 새를 먹는다고. 그가 믿지 못하자 아내는 구두 상자를 사라에게 내밀었고 사라는 상자에서 참새 한 마리를 꺼내 두 사람에게 등을 돌린 채 뭔가를 했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딸이 다시 그들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 그는 아내의 말을 믿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딸을 돌보느라 아내는 지쳤다. 그가 사라를 데려와야 했다. 새를 주지 않으면 딸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딸을 집 안에 꽁꽁 가둬버리고 싶었고 정신병원에 입원시킬까 고민도 했다. 집으로 새가 든 상자를 갖고 오던 아내가 독감에 걸려 오지 못하게 됐다. 새를 사러 가든가 딸을 계속 굶기든가. 아버지로서 이제 그는 선택하고 결정해야 했다. 딸은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묻는다. “아빠는 나를 사랑해?”

결말을 제외하면 이 단편의 줄거리는 거의 여기까지다. 새를 먹는 딸을 가진 부부의 이야기. 인물도 딸과 부부, 세 사람뿐. 아르헨티나 작가 샤만타 슈웨블린의 충실한 독자로서 그녀의 소설이 “기이하고 낯선 세계”를 보여준다는 걸 알고 있어도 새 작품을 대할 때면 마음의 준비를 하곤 한다. 이번에는 또 어떤 비일상적인 것들로 현실의 다른 면을 일상적으로 보여줄까? 하는 놀람과 기대와 궁금증 때문에.

“넌 새를 먹는구나, 사라.” 그가 묻자 딸은 이렇게 말한다. “아빠도 마찬가지잖아.” 나는 이 대화들에 표시해두곤 몇 번이고 읽었다. 그러곤 ‘새’를 다른 단어로 치환해 보았다. 넌 달팽이를 먹는구나, 넌 오이를 먹지 않는구나, 넌 게임만 하는구나, 넌 술만 마시는구나…. 세 사람 중 누구의 관점에서 다시 읽을까 하는 생각도. 그에게 감정이입하면 딸에게 관심 없었던 아버지의 죄책감이 느껴지고 실비아 입장에서 보면 혼자서 사춘기 딸을 양육하느라 힘들어하는 엄마의 감정이, 사라 입장으로 따라 읽으면 사춘기를 겪는 청소년기의 불안을 엿볼 수도 있다.

‘새’란 무엇일까? 새를 먹는 행위는? 문학 비평 용어로 ‘알레고리’는 “적어도 두 가지 서로 다른 의미”를 가진 이야기나 이미지를 뜻한다. 표면적으로는 새를 먹는 딸을 둔 부모의 이야기처럼 읽히지만 수면 아래엔 누군가의 정신적, 도덕적, 혹은 사회적인 이중의 의미를 포함한. 그래서 ‘입속의 새’는 읽을 때마다 독자의 상황과 감정 상태에 따라서 새가 무엇인지, 세 인물 중 누구에게 공감하면서 읽게 되는지 매번 달라지는 것이 아닐까. 한 작품을 다르게 보고 다르게 말하게 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도록 쓰는 힘이 이 작가의 개성으로 느껴진다.

처음 이 단편을 읽었을 때 나는 어떤 미안함 때문인지 부모 생각이 났다. 이십 대에 수년 동안 방문을 닫고 책만 읽었던 내 모습을 돌아보면서. 그때 그런 맏딸을 보고 부모는 얼마나 당황하고 낙심했을까. 그런데 오늘 다시 이 단편을 읽으니 집을 제대로 꾸려나가고 싶은 가장의 위치에서 나는 아버지를 떠올렸다. 가족에게 거북한 이야기를 꺼내고 싶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 잘 들으세요, 라고 대화를 시도하고 싶다. 그 전에 먼저 소설에서처럼 이렇게 물어봐야 하는 게 좋을지 모른다. 아직 자식들을, 가족을 사랑하는지부터.

조경란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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