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영의 문헌 속 ‘밥상’]고사리 꺾은 뜻은

기자 2024. 5. 16.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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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숫집 주인이 칡국수를 큰 대접으로 하나 내왔다. 또한 산골짜기에서 먹을 만한 맛이었다(店主餉以葛粉麵一大椀. 亦峽中佳味也).”

1822년 음력 3월16일부터 7월28일까지, 오늘날의 평안남도 지역에서 임무를 수행한 암행어사 박래겸(1780~1842)은 암행의 기록 <서수일기(西繡日記)>를 남겼다.

그 기록 3월25일(음력)자의 한 줄이 위와 같다. 조선 후기 평양과 같은 대도시로 가는 길목에는 국숫집이 있었다. 그때는 대개 칡 전분 또는 메밀가루를 반죽해 눌러 사리를 뽑았다. 초겨울에 갈무리한 메밀을 한 철 먹고, 메밀이 떨어지면 산야에 지천인 칡을 캐 전분을 받았다. 밀가루는 귀하디귀한 자원이었다. 보리도 다 먹고 벼 나오기는 먼 즈음, 한반도의 밀은 주린 배를 채워주는 고마운 작물이었다. 하지만 조선 팔도, 다수 백성의 국수까지 감당할 만큼 나지는 않았다.

뜻밖의 전분, 사리도 있다. 굶주림을 피해 북한을 떠난 이들은 ‘느릅쟁이’를 기억한다.

느릅쟁이란 느릅나무 전분이다. 북한 요리단체의 대표 격인 조선료리협회 웹페이지에 따르면 “느릅쟁이는 느릅나무뿌리를 캐여 껍질을 벗긴 다음 바싹 말리워 가루낸것”이다. 유례없는 소리가 아니다. 문헌 속의 ‘유근피(楡根皮)’, 곧 느릅나무 뿌리 전분, ‘유백피(楡白皮)’, 곧 느릅나무 껍질 전분이다. 둘 다 조선시대에 약용과 식용으로 널리 쓰였다.

다시 조선료리협회에 따르면 “느릅쟁이국수는 강냉이가루에 느릅쟁이를 섞어 국수사리를 만들고 동치미무우와 고기꾸미를 얹은 다음 국수양념장을 쳐서” 낸다. 그 맛은 “차분하면서도 질기고 구수”하다고 한다(이상 원문의 표기 그대로 인용한다). 이런 경험이 참고가 됐으리라. 수백년 전 아메리카 대륙에서 건너온 감자의 전분은 한반도에서 금세 사리의 원재료라는 역할을 찾았다. 고구마 전분도 그 뒤를 잇는다.

그러고 보니 역사학을 연 역사서 <사기(史記)>는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이야기를 기록했다.

참고로 중국의 문호 루쉰(魯迅)은 이들의 이야기가 담긴 <사기>의 ‘백이열전’을 중국 역사상 명문으로 치켜세운 바 있다. 백이와 숙제는 주나라 무왕의 상나라 정벌을 의롭지 않다고 여겼다. 그래서 주나라의 곡식을 거부하고 산에 숨어 살며 “고사리를 캐 먹다(采薇而食之)”가 죽었다. 나물만 먹었다고? 아닐 테다. 고사리 뿌리에도 전분이 가득했으니 또한 구황에 요긴했다.

나물로 먹는 고사리는 캐지(采) 않는다. 꺾는다. 캤다면 뿌리 찧어, 전분 받아, 국수를 누르거나 수제비를 뜯거나 옹심이를 빚어 먹었다는 말일 테다. 물론 ‘채(采)’에는 ‘채취’의 뜻이 있다. ‘미(薇)’는 고사리가 아니라 야생 콩을 가리킨다는 풀이가 있다. 한문 문법과 생물종 동정(同定·Biological Identification)을 여기서 이루 다 따질 수 있겠는가. 아득한 고대로부터 오늘날까지, 뱃속에 풀칠하기가 단 한순간도 만만찮았음을 떠올릴 뿐이다.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고영 음식문화연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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