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해자의 작은 이야기]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

기자 2024. 5. 16. 2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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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고요하게 몸을 부풀리는 중
일 초 일 초 아주 조금씩 늘어나는 중
내일 보면 모르겠지 일년 후에도 모를 거야
멀리서 돌아보면 나는 커져 있을 예정
스멀스멀 징그럽게
한이나 화 나뭇가지 이것저것 모아서
너를 지우기 위해 말이지
약한 자라 참고 있는 거 아니냐 하면
맞아 난 강해져도 티내지 않는
식물성 힘을 갖게 될 거야

크게 자라
신령하게 될 거야
모두 고개를 숙이고 기도하게 될 거야
기도하는 손들 점점 늘어
술과 떡을 바치게 될 거야
어느 날 벼락을 맞을지도 모르는 일 그러나
알 바 있니 늘어나는 중인데 부푸는 중인데
세상의 이치를 거슬러 시간을 뛰어넘어
고요하게 날뛰는 중인데
물을 머금고 공기와 스킨십하며

- 시 ‘자연-복수’, 권민경 시집 <온갖 열망이 온갖 실수가>

비 갠 봄날 아침은 눈부시다. 온갖 열망이 터져나오는 듯 싱싱하다. 물방울 맺힌 풀 하나도 풀에 얹힌 물방울도 저마다 빛나며 서로를 비춘다. 새소리도 드높다. 비바람을 견딘 호박 모종과 어린 상추도 꿋꿋하고 저절로 땅에서 솟구친 개양귀비도 붉은 꽃을 피운다. “고요하게 몸을 부풀리”고 “아주 조금씩 늘어”난다.

자라는 대로 놔뒀더니 옆집 지붕 언저리를 스킨십하는 서부해당화 붉은 나뭇잎도 드높게 흔들리며 신령함을 완성해 간다. 허리와 팔이 꺾일 듯하던 어제의 바람을 견디고 열망을 이어간다. “일 초 일 초” 변신하며 자기를 피워가는 중이다. “물을 머금고 공기와 스킨십하며”. 비 맞고 해를 받으며 끝없이 변신하는 건 인간도 예외가 아니다. 자연의 일원이기에.

요새 가까운 도서관에서 한글 배운 지 1년 반 된 70, 80대 어르신들과 시를 쓰는데 그분들도 날마다 자라는 것 같다. “한글 다 배우면 시 많이 쓸겨, 돌아가신 오빠한티도 못한 말 편지로 다 쓸겨.” 자벌레 기어가듯 느리게, 한 자 한 자 연필 꾹꾹 눌러 모국어를 쓰며 열망을 피워나간다. 온갖 실수와 자학과 자책에도 꿈을 숨길 수 없는 사춘기 학생들처럼.

“어제 하루 종일 비 맞고 고추를 심었어유. 아들하고 둘이 심었는디, 내가 그만하자고 하니께 삽을 집어내뿌고 도망갔어유.” 흙에 꽂힌 삽과 내던져진 삽을 그리고 나서, 모자 쓴 아들 옆에 분홍색 옷을 입은 당신도 그린다. 웃음들이 터져나온다. 기교를 안 부려서 더욱 귀엽다. 허리가 꼬부라져 키가 작아진 할머니들도 자라고 그걸 보는 내 몸에서도 이파리가 새록새록 돋는다.

아파서 못 온다더니 다리 절며 오신 할머니가 한글 도전기를 몇 자로 요약하는데 글자가 그림이다. 비료포대 보다가도 ‘ㅂ’과 ‘ㄹ’이 들어온다는 분의 글은 상형문자다. “머가 들어가야 말이지. 머릿속에 안 들어가. 쩌그서 조금 하고 여그서 조금 하고. 하다 말다. 멀고 일도 많고. 하다 말다.” 몸으로 싹틔운 글을 다른 할머니가 이어받는다. “내 이름도 모 쓰고 우리 딸이 아버지 도라가시므 어떠할겨. 공공근로 다니던 거도 고마두고 일도 때려치고. 밥도 굼고 와요.” 철자와 맞춤법은 상관 않는다. “온갖 열망과 온갖 실수”가 허락되는 교실이기에.

입술이 보랏빛이 될 때까지 붓대 끝에 매달린 붓꽃에서 혀들이 터져나오는 5월이다. 내일이 5·18이다. “한이나 화 나뭇가지 이것저것 모아서” “늘어나고” “부푸는” 나무처럼 민주주의는 자란다. 세상이 개판이어도 부자와 권력자와 엘리트들이 상식과 공정과 법도를 어겨도 5·18의 주먹밥은 커지고 나눠 마시던 물병은 차오른다. “일 초 일 초” 자란다. 함께 피 흘리며 보살피고 어깨를 겯던 연대의 정신과, 살 만한 세상을 꿈꾸는 열망은. 누구에게도 해 끼치지 않으며, “강해져도 티내지 않는/ 식물성 힘”으로 신령하게 솟구친다.

김해자 시인

김해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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