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와 지독한 사랑…남들이 미쳤다고 하는데 인정합니다”

김세훈 기자 2024. 5. 16.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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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프로축구 ‘여성 서포터스’ 4인의 못 말리는 열정
프로축구 여성팬 김수경, 윤서빈, 진민영, 신예지씨(왼쪽부터)가 지난 13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 인근에서 각자 응원하는 팀의 유니폼을 입고 인터뷰를 하고 있다. 권도현 기자 lightroad@kyunghyang.com
손흥민 등 스타들 보면서 입덕
축구 예능 ‘골때녀’ 영향도 커
이벤트 즐기고 스트레스 ‘훌훌’
이젠 경기장이 우리의 놀이터
경기 결과로 일주일 기분 결정
원정 경기는 더 결연하고 비장
왜 좋아하냐고? 애인 같으니까

“축구와 지독하게 어렵고 복잡한 사랑에 빠졌다. 사람들이 미쳤냐고 하는 말, 인정한다.”

국내 프로축구 열혈 여성 서포터들이 자신을 표현한 말이다. 축구에 대한 이들의 말에는 열정과 솔직함, 애정이 듬뿍 담겼다. 수시로 변하는 표정과 어투에서는 머리와 가슴에 연이어 교차하는 숱한 추억과 미묘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즘 축구장에는 젊은 팬들이 넘친다. 특히 여성팬들이 크게 늘었다. 프로구단 4곳 여성 서포터인 인천 김수경씨, 서울 윤서빈씨, 울산 진민영씨, 전북 신예지씨를 지난 13일 경향신문에서 만났다.

- 서포터가 된 계기는.

김수경: 국가대표팀에만 관심을 갖다가 2013년 고등학생 때 인천 경기를 보고 서포터가 되겠다고 결심했다. 여성들은 일반적으로 손흥민 등 국가대표 스타들을 보러 축구장에 오기 시작한다. ‘골때녀’(축구 예능 ‘골 때리는 그녀들’) 영향도 크다.

윤서빈: 2018년 아시안게임을 재밌게 본 뒤 2019년 K리그를 처음 접했다. 강렬하고 열정적인 서포터 문화가 매력적이었다. 젊은이들은 축구장을 놀이 공간, 데이트 공간으로 여긴다.

진민영: 도쿄 올림픽 때 이동경이 멋져 친구 따라 울산 경기를 봤다. 이후 설영우, 엄원상도 좋아하게 됐다. 응원도 재미있고 선수들도 팬들에게 잘 대해줬다. 처음에는 선수가 좋아서 서포터가 됐지만 나중에는 팀에 빠지게 됐다.

신예지: 2006년부터 서포터로 활동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 축구를 보고 매력에 빠졌다. 청소년 시절 강렬한 단체 관람 경험이 중요하다. 처음에는 선수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당시 남성 서포터는 “스타 선수 없으면 떠날 거지”라면서 여성을 덜 반기는 분위기였다. 조규성은 갔지만 다수 여성 서포터는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축구 자체에 큰 매력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축구는 이제 마음의 고향이 됐다.

- 축구장은 각자에게 어떤 공간인가.

신예지: 놀이터다. 미끄럼틀도 타고 맛난 것을 먹고 놀다가 이벤트도 참여하고, 데이트도 하고 응원도 하고. 축구장이 놀이터라는 말이 와닿는다.

윤서빈: 바람과 잔디 냄새가 너무 좋다. 응원하면서 스트레스도 날리고 음식, 이벤트도 즐긴다. 힐링 공간이다.

김수경: 응원하며 경기를 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는 게 재밌다. 주위에서 국회의원 할 거냐는 말까지 듣는다. 경기 결과 따라서 일주일 기분이 결정된다. 축구는 삶의 일부며 안식처다.

- 원정 동반 응원을 가는 팬들이 많다.

신예지: 나는 대구 출신인데 대구에서 열린 전북 경기를 보고 반했다. 그때도 원정을 많이 다녔고 지금도 그렇다. 원정 응원을 간 김에 지역 관광도 한다. 제주, 포항 등에선 1박을 한다. 홈경기는 상대를 기다리지만, 원정은 싸우러 들어간다는 느낌이다. 더욱 결연하고 비장할 수밖에 없다.

윤서빈: 새로운 구장을 보는 게 재미나다. 여행을 안 해도 경기장에서 누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원정 가서는 한곳에 모두 모여 응원한다. 홈에서보다 더욱 강한 응집력과 결속력을 느낀다.

김수경: 원정 응원 소리가 선수들에게 큰 힘이 된다. 이기면 당일치기로 다녀와도 피곤하지 않다. 홈경기면 그냥 축구를 보러 가지만 원정은 맛집도 가고 남편과 데이트도 하는 등 뭔가 색다른 걸 할 수 있다.

- 여성 서포터는 구단에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는 편이다.

신예지: 남자는 이기거나 지면 그걸로 끝이다. 여자는 구단을 함께 키워나가자는 마음을 가진다. 내게 좋은 걸 해달라는 게 아니라 함께 해결해 함께 잘되는 걸 보고 싶을 뿐이다.

- 과거 팬은 소비자였지만 지금은 콘텐츠 생산자이기도 하다.

신예지: 사진을 찍고 인스타그램에 공유한다. ‘나 이렇게 재미나게 지낸다, 궁금하면 너도 와보라’는 뜻이다.

진민영: 나 자신을 표현하고 추억, 기록을 간직하고 싶다. 요즘은 인스타그램으로 소통하는 축구팬이 많다.

윤서빈: 직관 브이로그를 찍고 유튜브도 운영한다. 재밌게 응원하는 걸 경기에 오지 않은 분들에게 보여주고 싶다.

- 젊은 팬이 언젠가 확 빠져나갈 수도 있지 않나. 여성팬을 잡기 위한 전략이 필요할까.

진민영: 선수와 함께하는 스킨십 행사 등 선수들과 추억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선수들과 추억이 쌓이면 축구장을 떠날 수 없다. 구단은 축구를 잘하는 방법, 그걸 고민해달라.

김수경: 성적을 내기 위해, 계속 성장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투자하면 된다. 고정팬은 이기든 지든 경기장에 간다. 반면, 새로운 팬은 재미없으면 안 간다.

신예지: 굳이 여자팬을 겨냥한다고? 그러면 여자도 왜 별종처럼 대하느냐고 기분이 상하고, 남자도 왜 여자들에게만 잘해주느냐고 반감을 가진다. 모든 축구팬을 잡기 위한 전략을 고민하면 답을 찾기 쉽다.

윤서빈: 욕설, 인신비방 등을 불편하게 여기는 가족팬이 많다. 축구장은 깨끗하고 건전한 곳이 돼야 한다.

- 자신이 ‘찐팬’이라고 생각하나.

김수경: 나는 결혼식을 마친 당일 오후 강원 원정을 다녀왔다. 오후 반차를 내고 지방 원정을 간다. 오후 제주로 갔다가 다음날 새벽 비행기로 출근한 적도 있다. 당일치기 응원은 다반사다. 이기면 좋지만 지면 쓴소리도 한다. 인천이 과거에는 강등권에 맴돌다가 지금은 상위 스플릿에도, 아시아챔피언스리그에도 나간다. 동반 성장하는 느낌이다.

신예지: 전국 어디든 우리 팀과 함께 여행 갈 준비가 돼 있다. 비단 우리 팀 경기가 아니라도 빅매치를 보러 간다. 주위에는 동남아시아 원정을 오전 떠났다가 밤에 경기를 보고 다음날 새벽에 귀국하는 서포터도 있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까지 하느냐고 하지만 다수 서포터에게는 일상이 됐다.

진민영: 난 지금 서울에서 대학에 다닌다. 울산 홈경기를 가면 20만원 정도 쓴다. 울산은 자식 같은 팀이다. 부모는 조건 없는 사랑을 주지 않나. 울산이 건강하고 행복하고 잘하기를 바란다. 부모도 자식이 못하면 야단치지 않나. 나도 그렇다. 그러나 만일 다른 사람이 울산을 욕한다면 내가 대신 싸울 것이다.

윤서빈: 서울 구단은 나 자신과 같다. 선수는 떠날 수 있지만 나는 인생 끝까지 남을 것이다.

신예지: 심장이 뛰는 한 그냥 전북이 좋다. 2006년 우리가 리그에서 11위를 하고도 아시아를 먹었다. 때로는 ‘축구 소믈리에’가 되고 싶을 때도 있다. 그런데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안 된다. 심장이 시키는 대로 할 뿐이다.

김수경: 인천이라는 자존심이 나를 지탱하는 힘이다.

진민영: 축구를 왜 좋아하느냐고 묻는다면 이유가 없다는 답변만 할 수 있다. 울산은 애인과 같다. 실제 애인은 헤어질 수 있지만 울산은 내가 버리지 않는 한 헤어질 일은 없다. 버려질 걱정 없는 짝사랑이랄까.

- 축구를 직접 하나.

김수경: 직접 하면서 축구가 참 어려운 종목이구나, 체감한다. 구단 엠블럼이 찍힌 유니폼을 입고 뛰면서 인천 선수가 된 기분도 느낀다.

신예지: 회사 풋살 동호인이다. 직접 해보니 선수들이 축구를 어려워하는 이유를 알겠다. 그래도 선수는 직업이 축구이니 무조건 잘해야 한다. 여자팬을 확보하고 싶다면 여러 프로그램을 하는 것보다는 여자 풋살 대회를 열어라.

진민영: ‘골때녀’를 보고 풋살을 시작한 여자팬이 많다. 여자 대회를 많이 여는 것은 여자팬을 늘릴 수 있는 방법이다.

김세훈 기자 shki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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