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토링] 그들만의 진영 그들만의 생각

이남석 발행인 2024. 5. 16.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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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찰·열정·소통의 리더 이순신 67
칠천량 해전 패배 후 사라진 원균
불확실한 기록에 엇갈린 주장들
괴멸 수준으로 패배한 조선 수군
순신 통제사로 천거한 병조판서
순신의 통제사 임명 망설인 선조

1597년 칠천량 해전을 패배로 이끈 원균. 굴욕적인 패배 후 원균의 흔적도 사라졌다. 누군가는 죽었다고 하고, 누군가는 사라졌다고 한다. 원균의 죽음이 그만큼 불확실하다는 건데, 여기엔 정파에 따라 다른 의견을 내는 당시 정세도 영향을 미쳤을 거다. 하물며 이순신까지 반역자로 몰았으니 말 다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각 진영으로 쪼개진 사람들은 정확한 말들을 내뱉고 있는가.

진영 논리가 깊어질수록 타협은 어려워진다.[사진=뉴시스] 

왜군 병사들이 주춤한 틈을 타 활을 쏘던 아군 병사는 잠깐 뒤를 돌아다봤다.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다만, 통제사의 갑옷과 투구는 물론 군복, 병부兵符(군대를 동원할 때 쓰이던 나무패), 인신印信(관리 신분을 입증하는 인감)이 널브러져 있었다. 노병은 갑옷과 투구는 내버려두고 나머지만 챙겨 고성으로 도망쳐 나왔다. 하지만 원균은 멀리 못 가고 적에게 발견되고 말았다.

이때 원균이 살해당했는지, 도망쳐 살아남았는지는 불분명하다. 이 부분을 둘러싸곤 많은 추측이 있지만, 밝혀진 건 없다. 그저 불분명하다는 게 정설이다. 류성룡의 「징비록」에 실린 기록이 영향을 줬을 것으로 여겨진다. "원균은 배를 버리고 언덕으로 기어올라 달아나려고 했다. 하지만 몸이 비둔해 소나무 밑에 주저앉고 말았다. 홀로 도망치던 원균이 왜적에게 죽었다고도 하고 도망쳐 살아났다고도 하니, 정확한 사실은 알 수가 없다."

이렇게 불확실한 기록의 원인은 당파싸움에서 기인한 어지러운 정치상황이었을지 모른다. 당시 조선 실세들의 위신을 세우기 위해 모든 걸 제 맘대로 해석했다. 그러니 이순신도 '반역죄'로 몰아붙였던 거다.

"몸이 비둔한 원균이 소나무 밑에 주저앉고 말았다"는 「징비록」의 기록은 군 수뇌부로부터 보고받은 내용을 토대로 한 것이다. 그러면 누군가는 원균이 소나무 밑에 있었던 상황을 눈으로 목격한 후 류성룡에게 알려줬다는 얘기가 된다.

일제 강점 시절에 회당 김기현 선생이 펴낸 「이순신공세가」는 원균의 전사를 단정지었다. 그 기록에 나오는 원균의 전사 과정은 다음과 같다. "원균은 적의 창칼에 칼을 휘두르며 대항했다. 원균의 용력이 대단한지라 왜군 몇명이 그를 생포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적의 장수 관야정영과 가등희팔의 무리가 뒤쫓아오자 상황이 바뀌었다. 관야정영의 칼에 원균의 머리가 떨어지고, 가등희팔의 창에 가슴이 뚫어져 전사했다. 그러자 적 병사들이 서로 달려들어 칼로 원균의 사지를 잘라내고, 이를 군문軍門에 바쳤다. 원균의 수급은 칠갑漆匣에 넣어 풍신수길의 행영으로 가져가 깃대에 높이 달았다."

원균이 사망하자 이순신이 또다시 대안으로 떠올랐다.[사진=뉴시스]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은 괴멸壞滅 수준으로 대패했다. 출전한 전투선 170여척 가운데 160여척이 불에 타서 침몰하거나 파괴됐고, 일부는 적의 수중에 들어갔다. 거북선도 모두 파괴됐다. 병력 피해규모는 전사자와 행방불명자를 포함, 1만여명에 이른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칠천량 전투에서 원균의 함대를 전멸시킨 왜군 장수들은 등당고호, 협판안치, 가등가명, 도진충항, 구귀가륭, 부전수가, 내도통총, 관야정영, 종의지 등으로 모두 한두번씩은 이순신에게 치욕을 당했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한산도를 힘도 안 들이고 접수했다. 대장 부전수가를 비롯한 제장들은 치욕감을 되갚았다는 만족감에 들떠 제승당에 모여 만세를 불렀다. 임진왜란 때 왜군은 남해의 제해권을 손에 넣어 본 적이 없었다. 이순신 때문이었다. 그런데 삼도수군이 괴멸했으니 거칠 것이 없었다.

부전수가는 고성·거제·사천·곤양·하동 등지를 차례로 점령했다. 소서행장과 종의지는 사천·남해로, 가등청정과 과도직무는 밀양·초계로 이동했다. 소조천수추의 대군은 김해와 창원으로 진격했다. 왜적은 또 최우선 목표인 전라도 땅 정복을 위해 남원으로도 치고 올라갔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게 있었다. 왜군은 전라도 바다를 거침없이 질주하지 못했다. 수로를 잘 모르는 데다 혹시 모를 조선 수군의 기습 공격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전라도 해역이 뚫리면 왜적은 파죽지세로 서해를 거쳐 한양, 황해도, 평안도까지 점령할 수 있었다. 왜군으로선 명나라 해안도 사정권에 놓을 수 있었다.

1597년 7월 18일 새벽. 도원수부의 군사 두명이 달려와 급하게 이순신의 방문을 두드렸다. "16일 새벽에 수군이 습격을 받아 통제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그리고 여러 장수와 많은 군사들이 해를 입었습니다"며 칠천량 해전의 패망 소식을 전했다.

이순신이 통곡을 하며 도원수부에 들어가니 권율이 다가와 "일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고 말했다. 이순신이 이날 일기에 조선 수군 사령관의 이름을 동일선상에 올리고, 권율의 말을 덧붙인 것은 원균의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날 오전 10시까지 전황 이야기가 오고갔지만, 권율은 뾰족한 대책을 내놓지 못했다. 그러자 이순신이 자청했다. "소인이 직접 연해안 지방으로 가서, 보고 들은 뒤에 방책을 정하겠습니다." 그러자 권율이 크게 기뻐하며 승낙했다.

이순신은 즉시 송대립, 유황, 윤선각, 방응원, 현응진, 임영립, 이원룡, 이희남, 홍우공 등과 함께 길을 떠나 삼가현에 이르렀다. 이때 중추부 지사 한효순의 아들 한치겸이 합류했다. 한효순은 남삼도 체찰부사 시절부터 판옥선의 추가 건조, 한산도내 무과 실시 등 이순신이 수군전력을 강화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한 인물이다.

이순신 일행이 진주를 거쳐 7월 21일 노량에 도착하자 거제현령 안위, 영등포만호 조계종 등 10여명이 마중 나와 있었다. 백성들은 물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대성통곡하며 전사한 장졸들의 명복을 빌었다. 이어 안위의 배에 올라 적의 형세와 패전 원인을 분석했다. 그 자리에는 경상우수사 배설도 있었는데 어느새 도망가서 보이지 않았다. 이날 이순신은 바다 위에서 새벽 3시가 지나도록 눈을 붙이지 못해 결국 눈병을 얻었다.

칠천도에서 대패했다는 급보는 조정으로도 전달됐다. 조정은 크게 놀랐다. 한성의 백성들에게도 소식이 알려져 큰 소동이 일어났다. '조만간 왜놈들이 다시 한양으로 쳐들어올 거다'라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공연히 이순신을 잡아들이더니 이런 일이 생겼다"며 원망 섞인 목소리도 터져 나왔다. 비변사의 대신들은 이같은 백성들의 목소리를 꾹 참아 들으며 입궐해 한자리에 모였다.

이 자리에서 선조는 이렇게 말했다. "한산도를 지키면서 호랑이가 버티는 듯 군세를 보였어야 했는데… 이 일이 어찌 사람의 지혜만 잘못이겠는가. 실로 하늘이 한 일이니 어찌하겠는가." 은근히 원균을 두둔하는 듯, 실로 복장이 터질 만한 뚱딴지같은 소리였다.

이때 경림군 김명원과 병조판서 이항복이 잇따라 나서 임금에게 아뢰었다. "이번 실패는 원균이 조정을 기망했기 때문이오니, 이순신에게 다시 통제사를 맡겨야 할 것으로 사료되옵니다.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그러자 선조는 "이순신이 비록 명장이라고 하지만 병선 한척도 없는 지금 상황에서 무슨 도리가 있겠소"라고 탄식했다. 다음날 7월 22일에 통제사 재임명 교·유서와 유지를 내려보내기로 결정했다. <다음호에 계속>

이남석 더스쿠프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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