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자리는 기업이 만든다?
전통적인 의미에서 복지국가는 거대한 재분배 장치로 기능해 왔다. 재분배 장치로서 복지국가는 시장에서 이루어진 1차 분배를 다시 한 번 분배함으로써 1차 분배를 통해 달성하지 못했던 사회적 가치를 달성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여기에는 우리가 '재분배'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는 부자에서 빈자로의 수직적 재분배도 있지만, 국민연금과 같은 제도를 통해 개인의 경제활동시기와 은퇴시기의 소득을 시간적으로 재분배 하거나 건강보험과 같은 제도를 통해 건강한 사람과 건강하지 못한 사람의 위험을 수평적으로 재분배하는 것도 포함된다. 어쨌든 1차 분배의 결과를 다양한 방향으로 재분배하는 것이 복지국가의 핵심 역할이라는 점에는 아마도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불평등에 대한 재분배적 복지국가의 제한적 역할
복지국가가 1차 분배의 결과를 교정한다는 점은 복지국가를 통해 불평등이 완화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게 한다. 실제로도 1980년대 이후 많은 고소득 국가에서 불평등이 증가하는 과정에서 복지국가는 이를 일정하게 개선해왔다. 그러나 재분배를 통한 불평등 완화가 증가하는 1차 분배의 불평등을 상쇄할 정도의 효과를 가졌던 것은 아니다. 주요 복지국가에서 재분배 이후의 불평등 정도는 1차 분배의 불평등보다 낮아졌지만, 1차 분배의 불평등과 마찬가지로 증가해왔다.
복지국가를 통한 재분배가 1차 분배의 불평등을 온전히 해소하기 위해서는 1차 분배의 불평등 증가에 비례하여 재분배 효과의 강도가 점점 더 높아져야 한다. 그러나 앞서 설명한 것처럼 복지국가의 재분배에서 고소득자에게서 저소득자로의 재분배는 일부분에 불과하다. 오히려 많은 연구들은 수평적 재분배나 시간적 재분배가 복지국가의 좀 더 지배적인 기능이라고 설명한다. 일부 연구자들은 수직적 재분배 정도가 약하다는 것이 복지국가가 자본주의 사회와 공존할 수 있는 이유였다고 지적하기도 한다. 계급 간 재분배는 특히 부유한 계층의 반발을 살 가능성이 더 크기 때문이다.
어쩌면 복지국가에서 부자에서 빈자로의 재분배를 통해 불평등 완화가 제한적이라는 것이 그렇게까지 실망한 일은 아닌 지도 모른다. 수평적 재분배나 시간적 재분배를 통해 개인들의 삶의 위험에 대비하는 것도 중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공적 사회서비스를 통해 개인과 가구의 필요에 대응하고 삶의 질에 기여하는 것 역시 수직적 재분배 효과의 정도를 떠나 매우 중요하다. 복지국가가 재분배 장치라고 해서 재분배의 기능이 불평등 감소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복합전환 시대의 불평등
문제는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적 환경 속에서 불평등은 점점 더 심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흔히 현 시대를 복합전환의 시대라고 한다. 기술변화, 기후위기, 인구구조 변화, 지역소멸 등 기존 사회질서의 근본적인 전환을 요구하는 변화들이 우리 시대에 중첩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이와 같은 변화의 중첩은 우리가 살아하는 환경에 다양한 각도로 영향을 미칠 것인데, 불평등 증가의 압력은 명백하게도 그 영향의 한 부분이다.
지난 수십 년간의 기술변화의 결과 노동시장에서 반복적 작업의 비중이 높은 중간 수준 일자리 비중은 낮아지고, 고숙련 또는 저숙련 일자리 비중은 높아짐으로써 일자리 양극화가 진행되어 왔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지속적인 디지털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일을 상당부분 대체하여 일자리가 감소할 가능성에 대한 우려가 높다. 설사 장기적으로 일자리가 감소하지 않더라고 일자리의 구조가 바뀌는 전환기의 불안정성을 피하기 어렵다. 디지털 기술은 다른 방식으로도 불안정성을 확대한다. 디지털 알고리즘에 종속된 채로 일하고 있지만, 근로자로서의 권리를 인정받지 못해 노동법이나 사회보장법의 혜택에서 배제되어 있는 디지털 플랫폼 노동자가 대표적이다.
기후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우리는 화석연료 에너지를 감축하고 산업 전반을 친환경적 방향으로 전환해야 한다. 현재는 그 전환 자체가 잘 이루어지지 않아 큰 걱정이지만, 전환이 이루어지더라도 그 과정에서 나타나는 사회문제 역시 중요하다. 에너지와 산업의 전환은 일자리 구조를 변화시킨다. 이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학력이나 숙련이 낮은 이들은 일자리를 잃거나 이전보다 더 소득이 낮은 일자리를 수용해야 할 가능성이 크다. 저소득층의 에너지 비용 증가 문제나 주거 환경 개선 문제 역시 새로운 불평등 문제의 한 축이 될 가능성이 있다. 화석연료 등 고탄소 산업이 밀집했던 지역이 겪을 수 있는 전환 문제는 지역 간 불평등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1차 분배와 복지국가
이처럼 복합전환이 불러오는 불평등 위험 증가는 지금부터의 복지국가가 감당해야 할 과제다. 그러나 복지국가의 불평등 완화 능력이 제한적이다 보니 이 과제에 대응하여 복지국가를 개혁해야 한다는 논의가 뜨겁다. 우리사회에서도 보편적 기본소득의 도입, 전국민 고용보험 등 보편적 사회보험 체계 마련, 아동수당·청년수당·농민수당 등 사회수당의 확대, 시민최저소득·안심소득 등 최저소득보장제도의 강화 등이 복합전환 시대 불평등과 불안정 증가에 대응하고자 하는 방안들로 제시되었다.
그러나 이 제도들 역시 기본적으로 재분배 기능을 수행하는 소득이전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기존 복지국가 프로그램과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물론 이 제도들은 조세 비중이 높고, 노동시장 지위에 무관하게 현금이전을 제공하고자 한다는 점에서 기존의 사회보험 제도와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이와 같은 제도들을 통해 노동시장 불안정의 증가가 소득의 불안정으로 이어지는 경로를 어느 정도 차단할 수 있다면 우리 시대의 사회적 위험에 상당부분 대응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새로운 소득이전 프로그램이 과연 1차 분배의 불평등을 상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우려가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지난 수십 년간의 불평등 증가에 이어 복합전환이 불러오는 불평등까지 중첩되는 상황은 조세와 현금이전에 기초한 복지 프로그램의 부담을 지나치게 크게 할 수 있다. 오히려 1차 분배가 평등한 국가에서 재분배도 잘 이루어진다는 연구들은 증가하는 불평등을 재분배 정책으로 대응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점을 확인하게 한다.
1차 분배의 불평등 증가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복지국가가 1차 분배에 직접 개입함으로써 원천적으로 불평등을 방지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재분배 장치로 인식하고 있는 복지국가가 1차 분배에 개입한다는 것이 낯설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사실 복지국가의 역사에서 국가의 역할이 언제나 재분배에만 제한되었던 것은 아니다.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복지국가 모델로 손꼽히는 스웨덴의 렌-마이드너 모델(Rehn-Meydner model)에서 소득 평등을 유지했던 핵심적인 장치는 연대임금(solidarity wage)이었으며, 소득재분배 프로그램은 경제의 역동성을 유지하기 위한 적극적 노동시장 정책과 함께 이를 뒷받침했다. 물론 렌-마이드너 모델의 전성기였던 1950~60년대 스웨덴과 현재의 우리나라 상황은 크게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인 복지국가가 단지 재분배 장치로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복합전환 시대 복지국가가 1차 분배에 개입할 필요성은 단지 불평등 증가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기술변화가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함으로써 대규모의 기술혁신을 일으킬 위험을 우려하면서도 이를 '어쩔 수 없는 일' 정도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기술변화의 방향은 사회구성원들이 결정할 수 있는 것이다. 기술변화와 일자리 문제를 연구해온 경제학자들은 노동대체적 기술혁신은 생산성 측면에서 '그저 그런 혁신'에 불과하다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의 단기적 인센티브는 노동대체적 기술혁신을 촉진한다는 점에서 기술혁신의 방향에 대한 개입이 요구된다. 만약 복지국가가 1차 분배, 즉 생산영역에 개입할 수 있다면 기술변화가 생산성 측면에서 좀 더 혁신적이면서도 인간의 일을 보완하고 더 좋은 일자리로 만드는 방향을 지향하도록 유도할 수 있다.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에너지와 산업의 구조를 변화시키고, 신재생에너지나 환경친화적 분야에서 기술을 개발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과정 역시 국가의 1차 분배에 대한 개입을 필요로 한다.
복지국가 역할확장의 매개로서의 '좋은 일자리'
그렇다면 복지국가는 어떤 경로를 통해 1차 분배에 개입할 수 있을까? 역사적으로 복지국가가 경제적·사회적 위험으로부터 개인과 가정을 보호하는 역할을 수행해왔음을 고려한다면, '일자리'야말로 복지국가가 개입하기 가장 좋은 1차 분배 영역이다. 특히 언젠가부터 희소자원처럼 여겨지는 '좋은 일자리'는 시장에 맡겨두었을 때 사회가 필요로 하는 만큼 만들어지지 못한다. 경제학자 대니 로드릭(Dani Rodrik)은 이를 '좋은 일자리의 외부효과'로 설명한다. 좋은 일자리의 부족은 경제의 선진 부문에서 만들어진 성과를 경제 전반으로 확장하지 못하게 하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약화시키며, 사회적으로는 범죄·약물·질병·사망 등의 문제를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좋은 일자리의 이와 같은 외부효과는 국가가 어떤 식으로든 개입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일자리 창출은 지금도 국가의 중요한 정책목표다. 그러나 노인일자리 등 직접 일자리 창출 사업 일부를 제외하면 국가는 '일자리는 기업이 만든다.'는 인식 위에서 매우 제한적인 역할만을 수행해왔다. 복지국가의 맥락에서는 흔히 '사회투자정책'으로 불리는 접근으로 교육훈련을 통해 인적자본에 투자하고, 고용서비스를 통해 구인과 구직을 매칭하는 정책 정도가 강조되어 왔다. 이는 '일자리'를 만든다기보다는 '일할 사람'을 준비시키는 정책이라는 점에서 노동시장 공급측에 대한 개입이다. 그러나 일할 사람의 인적자본을 제고하고 고용가능성을 높이는 정책이 과연 어느 정도 성과를 내왔는지는 의문이다. 우리 시대 청년들에게 “단군 이래 가장 똑똑하지만 자신의 부모보다 잘 살지 못할 것”이라는 비관적 전망이 제시되고 있는 것을 보면, 노동시장에서 공급(노동인력에 대한 사회적 투자)이 그에 맞는 수요(좋은 일자리)를 창출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된다.
좋은 일자리를 만들기 위한 국가의 노력은 좀 더 직접적인 영역까지 확대될 필요가 있다. 양질의 공공서비스에 대한 시민들의 요구가 높아지고 있는 것에 대응하여 공공서비스 인력에 대한 정부의 직접채용을 확대하고 이 일자리들을 양질의 일자리로 만드는 것은 좋은 출발점이 될 수 있다. 꼭 정부가 직접 채용하지 않더라도 공적 재원을 바탕으로 운영되는 교육, 돌봄, 복지 등 사회서비스 영역의 일자리의 질에 대해서는 정부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교육이나 돌봄은 저출산 고령화 시대를 배경으로 양질의 서비스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고 있으며, 디지털 전환에도 불구하고 기계로 대체되기 어려운 영역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부문에서의 좋은 일자리 창출은 좋은 일자리의 긍정적 외부효과는 물론 교육과 돌봄의 긍정적 외부효과를 함께 창출할 수 있다.
노동자가 사업주와의 관계에서 협상력을 갖도록 지원하는 정책 역시 좋은 일자리를 뒷받침할 수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우리나라는 노조조직률과 단협적용률이 모두 낮으며, 그 원인 중 하나는 단체교섭이 기업 수준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 있다. 노동조합법의 관련 규정을 개정하고 단체협약 효력확장 제도 도입 등을 통해 산업수준의 단체교섭을 확대하고, 이를 통해 단협적용률을 높이도록 지원할 필요가 있다. 여기에 단체교섭을 통해 산업 혹은 지역 수준의 숙련형성 체제를 형성해간다면, 노동자의 협상력을 통해 확보한 “좋은 일자리”가 생산성 향상으로 이어지도록 유도할 수 있다. 물론 노사관계의 문제는 정부 정책만으로 실현할 수 없지만, 법·제도적 뒷받침과 사회적 대화 기구의 활용을 통해 방향을 제시하고 환경을 조성하는 것은 정부의 역할이다. 미국의 오바마, 바이든 대통령이 노조 가입 필요성을 역설하고, 일본의 기시다 총리가 춘투를 통한 임금인상을 역설한 것은 이들이 좌파여서가 아니라 그것이 경제적·사회적 발전을 위해 중요하기 때문이다.
R&D 투자나 기업에 대한 지원 과정에서 “좋은 일자리”의 창출을 조건으로 함으로써 정부와 기업이 협력하는 21세기형 산업정책을 펼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는 대안이다. 최근 많은 국가에서 산업정책을 통해 복합위기에 대응하는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른바 '산업정책의 부황'이다. 21세기의 산업정책은 발전국가의 그것과 달리 정부와 기업, 그리고 연구기관과 지역사회 등 다른 이해관계자들이 파트너십을 맺고 공동의 목표를 추구하는 체계를 필요로 한다. 이 때 “좋은 일자리”는 가장 적합한 공동의 목표다. 산업정책을 펼치는 목적은 단지 '기업의 경쟁력 향상'이 아니라 '공동의 번영'이기 때문이다. 정부가 R&D 투자 등 기업이 필요로 하는 지원을 제공하되 기업이 좋은 일자리를 창출하도록 요구하고, 지역과 연구기관 등의 협력을 통해 좋은 일자리가 높은 생산성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복합전환의 시대에 대응하는 산업정책의 방향이다.
'일자리가 곧 복지' 가 아닌 '일자리와 복지의 결합'
복지국가가 '좋은 일자리'의 창출을 목표로 해야 하고, 이를 위해 심지어 '산업정책'을 펼쳐야 한다는 이야기로부터 누군가는 '일자리가 곧 복지'라는 시각 아래 시민의 필요를 충족하고 사회적 위험에 대응하는 사회정책을 등한시했던 발전국가 시절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 복지국가가 1차 분배에 개입해야 한다는 것은 결코 그런 의미가 아니다. 전통적인 재분배 영역 뿐 아니라 1차 분배 영역에서부터 불평등을 예방하고자 하는 노력은 오히려 재분배적 복지정책에 가해지는 부담을 낮춤으로써 이 정책들이 시민의 필요와 위험에 더욱 포괄적이고 관대한 대응체계를 만들도록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교육이나 돌봄 영역에서 좋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일은 우리가 사회의 '비생산적인' 인구라고 폄하 당했던 시민들에게 양질의 사회서비스를 제동함으로써 이들의 권리를 보장할 수 있는 기반이다. 물론 좋은 일자리만으로 양질의 사회서비스가 보장되지는 않겠지만, 지금처럼 사회서비스 일자리의 질이 낮고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좋은 서비스가 제공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요컨대 복지국가가 '좋은 일자리'를 명시적인 정책목표로 삼고, 이를 위한 다양한 정책수단을 활용하는 것은 기존의 복지정책을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보완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복지국가의 정책영역이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확장되는 것을 의미한다. 복지국가의 1차 분배 영역의 정책들과 재분배 영역의 정책들이 유기적으로 연계되고 상호 보완적으로 작동할 때 비로소 우리는 증가하는 불평등을 해소하고, 복합전환 시대 시민들의 다양한 욕구와 위험에 대응할 수 있을 것이다.
[남재욱 한국교원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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