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대사를 흠모한 여인이 ‘뜬 돌’이 되었다…화엄불교의 상징 부석사 [정용식의 내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2024. 5. 16. 18:3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㉗ 경북 영주 부석사
676년 의상대사 창건
한국 화엄불교의 본산
‘부석’에 얽힌 전설도 유명
.
정용식의 내마음대로 사찰여행
사찰은 불교의 공간이면서, 우리 역사와 예술의 유산입니다. 명산의 절경을 배경으로 자리 잡은 사찰들은 지역사회의 소중한 관광자원이기도 합니다. 치열한 일상에서 벗어나 잠시 휴식을 얻고자 할 때 우리는 산에 오르고 절을 찾습니다. 헤럴드경제는 빼어난 아름다움과 역사를 자랑하는 사찰 100곳을 소개하는 ‘내 마음대로 사찰여행 비경 100선’ 시리즈를 연재합니다.
녹음으로 둘러싸인 부석사의 전경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절집. 아름답다라는 형용사로나, 장쾌하다는 표현으로는 그 정연한 자태를 다 담지 못하는 부석사는 정녕 위대한 건축이요, 지루한 장마 끝에 활짝 갠 밝은 햇살 같을 뿐.”

문화재청장을 지냈던 유홍준 교수가 극찬했던 절. 그는 “‘사무치는’이라는 단어의 참맛을 느끼며 해마다 거르는 일 없이 가고 또 가는 곳”이라 했다. 유 교수의 명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의 사찰편 첫 장을 장식하고 50여쪽에 달하는 분량을 할애할 정도로 애정을 숨기지 않은 절, 바로 부석사다.

이런 명성 있는 사찰은 진작 왔어야 했는데 늦었다. 그것은 거리상 문제였다. 경상북도 영주시 부석면에 자리하고 있는 부석사는 국토의 태백산과 소백산 사이 봉황산 중턱에 자리 잡아 발길이 닿기 쉽지 않은 곳에 있다. 한국 전통 목조건축 중 가장 오래되고 으뜸으로 아름답다는 무량수전이 있고 창건에 얽힌 의상과 선묘(善妙) 아가씨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도 있는 태백산 자락 부석사를 이제야 방문했다.

부석사에서 바라본 풍광

안양루에서 바라본 경치에 취해 방랑 시인 김삿갓(김병연)이 ‘부석사’라는 시문을 남겼다.

‘ 평생에 여가 없어 이름난 곳 못 왔더니. 백발이 되어 오늘에야 안양루에 올랐구나.

그림 같은 강산은 동남으로 벌려 있고. 천지는 물풀(浮萍) 같아 밤낮으로 떠 있구나.

지나간 모든 일이 말을 타고 달려온 듯. 우주 간에 내 한 몸이 오리마냥 헤엄치네.

인간백세에 몇 번이나 이런 경치 구경할까. 세월은 무정하다 나는 벌써 늙어 있네.’

한국 화엄종의 근본
부석사 조사전 내에 있는 의상대사 조각상

부석사는 676년(신라 문무왕 16년), 의상(義湘)대사가 왕명을 받들어 세운 뒤 화엄사상을 펼치던 곳이다. 부석사의 명물인 부석(浮石, 일명 뜬바위)에서 절 이름을 따왔다. 이 때문에 의상대사는 ‘부석존자’라고 불리고 그가 설파한 화엄종은 ‘부석종’이라고도 불린다.

의상은 제자가 3000명이나 있었다고 하는데 몇몇 제자들과 스승인 의상이 창건한 화엄 10찰(十刹)에서 화엄사상을 전파했다. 태백산 부석사, 가야산 해인사, 금정산 범어사, 지리산 화엄산, 계룡산 갑사, 모악산 국신사(귀신사) 등이 현존하는 화엄 10찰이다. 모두 조계종단에 소속된 큰 절이다. 부석사는 한국 화엄종(華嚴宗)의 발원지로 여겨지고 의상 이후에도 혜철국사, 무염국사, 징효대사, 원융국사, 원응국사 등이 법통을 이었다.

‘화엄경’을 근본 경전으로 하는 화엄종은 중국 당나라 때에 성립된 불교의 한 종파로 천태종(天台宗)과 함께 중국 불교의 쌍벽을 이뤘다. 의상에게 화엄교학을 전수한 중국의 지엄스님은 화엄종의 제2대 교주다.

한국의 화엄사상은 신라시대 원효(元曉), 의상, 윤필(潤筆) 등 화엄삼사(華嚴三師)로부터 발전했다. 원효가 엮은 불서인 ‘화엄경소’는 중국에까지 영향을 미쳤고 의상대사는 해동화엄종을 창립했다.

화엄종은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주존불로 모신다. 비로자나불은 석가모니 부처의 가르침, 진리를 상징한다.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법당을 통상 대적광전, 비로전 등으로 부른다. 부석사는 이런 화엄종의 근본도량이었음에도 대적광전이 아닌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인 무량수전을 본당으로 두었다. 아미타불을 모시는 법당은 극락전, 미타전이라고도 하는데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대웅전, 비로자나불을 모시는 대적광전과 함께 사찰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법당이다.

아미타불은 열반에 들지 않고 중생들에게 설법을 펼치는 부처로, 모두가 깨달음을 얻고 윤회를 벗어날 때까지 극락세계에 머문다. 극락의 다른 말이 안양(安養)이다. 그래서 극락전을 본당으로 삼는 절에는 안양루나 안양교, 안양문 등이 더불어 지어졌다. 부석사도 무량수전(극락전) 들어가는 입구에 안양루(안양문)가 있다.

전통건축의 美, 부석사 무량수전
부석사의 중심 건물인 무량수전. 한국의 목조건축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 가운데 하나다.

영주 부석사는 조계종 16교구 고운사의 말사다. 무량수전 외에도 부석사에는 귀중한 문화재들이 유독 많은 덕분에 ‘한국의 산지승원’이라는 명칭으로 6개 사찰(통도사·봉정사·법주사·마곡사·선암사·대흥사)과 함께 유네스코(UNESCO) 세계유산에 등재됐다. 부석사는 창건 후 신라 말에 소실되었다가 무량수전은 1016년에 원융국사(圓融國師)에 의해 중창되었고 1358년(고려 공민왕 7년) 왜구의 침략으로 다시 불에 타 피해를 입었다. 원응국사(圓應國師)가 1376년(우왕 2년)에 무량수전을, 1377년 국보인 조사당(祖師堂)을 재건했다. 그 후 수차례의 개보수를 거쳐 1916년에는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했다. 지장전 뒤쪽에는 부석사를 중창하고 입적할 때까지 절에 머물렀던 원융국사의 일대기를 총 2263자로 새긴 비석이 있다.

‘태백산 부석사’라고 새겨진 일주문을 지나면 꽤 긴 거리의 은행나무 숲길이 펼쳐지고 그 좌측 너머로 사과밭이 펼쳐진다. 이 구간을 걷다보니 신록의 봄날임에도 사과 향 맡으며 늦가을 샛노란 단풍잎까지 밟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천왕문을 지나면 절 앞마당이 펼쳐지고 돌계단을 오르면 범종루가 사찰 진입로 중심에 서 있다. 아래층은 출입을 겸하는 누각식이며 2층 뒤쪽 가운데 한칸을 뚫어 안양문으로 향하는 계단을 두었다.

부석사 일주문
범종루 2층. 법고와 목어 운판 등이 걸려 있다.

종각에 종은 없지만 오래된 법고와 목어 운판 등이 2층 누각 위에 걸려 있다. 이곳 지붕은 주목할 만하다. 범종루는 2층 정면 3칸, 측면 4칸의 세로형으로 배치됐는데 지붕의 앞부분은 팔자(八) 모양의 팔작지붕이고 뒷부분은 사람 인(人)자 모양의 맞배지붕으로 지어졌다. 앞마당이 야단법석하는 넓은 마당과 연계해서 설계한 듯하고 소백산맥을 향해 비상하는 형상으로 표현한 듯도 했다. 부석사는 경사지를 따라 여러 단의 돌축대(9단)와 돌계단(108계단)을 쌓고 그 공간에 건물을 세운 형태다. 누각 안양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 구조로 팔작지붕 건물이다. 누각 아래쪽엔 ‘안양문’, 윗층 마당 쪽엔 ‘안양루’라고 씌어 있다. 안양루 누각 밑을 지나 계단을 오르면 아담한 석등과 부석사의 자랑 무량수전이 모습을 드러낸다. 무량수전을 뒤로 하고 앞마당에서 바라보는 소백산맥의 산세는 장관이다. 김삿갓이 시상(詩想)에 잠겼을만한 더할 나위없는 장면이다.

안양루와 석등. 멀리 소백산맥이 눈에 들어온다.
멀리서 바라본 안양루와 그 뒤에 있는 무량수전

무량수전은 앞면 5칸, 옆면 3칸의 팔작지붕 형태다. 중간이 두껍고 위아래로 가면서 점차 가늘어지는 배흘림기둥은 익히 알려진 요소다. 비례미가 뛰어나고 안정감을 주면서 간결하고 장엄한 느낌이다. 오랜 역사를 담담하게 지켜온 듯 묵직하다. 정면 현판은 고려 공민왕이 썼다는 기록이 있다. 귀동냥한 문화해설사의 이야기를 따라 멀리 아래에서 바라보니 200년 시차를 두고 지어진 무량수전과 안양루의 처마가 중첩되어 있고, 2층 공포(栱包)와 공포 사이 공포불(栱包佛)이라 불리는 5개의 금색불상이 가부좌를 틀고 있는 모습이 신기하다.

무량수전은 안동 봉정사 극락전과 함께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이라 한다. 1962년 국보로 지정됐다. 무량수는 ‘태어남과 죽음이 없는 영원한 생명’을 뜻해서 내부에 무량수불(無量壽佛: 무한한 수명을 지닌 부처)인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다. 흙으로 빚은 소조(塑造)불상 가운데 가장 크고 오래되었다는 이 아미타불은 법당 중앙이 아닌 서방 극락세계를 표현해서 서쪽 한편에 모셔져 있고 시선은 동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일까, 무량수전 앞마당에는 화려하면서도 단아한 멋을 지닌 석등만 자리하고 있고 3층 석탑은 앞마당이 아닌 불상이 바라보고 있는 무량수전 동쪽 언덕 위에 세워져 있다.

무량수전 내부 소조여래좌상. 동쪽을 향해서 앉아 있는 게 특징이다.
의상대사를 기리는 건물인 조사당. 의상의 지팡이가 자랐다는 '선비화'가 보호 철망 안에 보존돼 있다.

의상을 기리는 조사당(祖師堂)은 무량수전에서 북쪽으로 싱그러운 오솔길 따라 올라간 끝자락에 있다. 조사당 처마 밑 선비화(골담초)는 의상대사의 지팡이가 생명력을 갖고 잎이 피어 1300년 이상 처마 밑에서 자라난 것으로 전해진다. 촘촘한 철조망 안에 보호 중이다.

한국 전통 건축양식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다는 부석사는 한국의 사찰 가운데 가장 많은 국보(5점)와 보물(6점)을 보유하고 있다. 신라시대 유물로는 무량수전 앞 석등(국보), 폐사지에서 옮겨왔다는 자인당의 석조여래좌상(보물), 3층석탑(보물), 당간지주(보물), 대석단(大石壇) 등이 있고, 고려시대 유물로는 무량수전(국보), 조사당(국보), 무량수전 내 소조여래좌상(국보), 조사당 벽화(국보) 등이 있다. 지방문화재로 등록된 것들까지 합치면 절 곳곳이 박물관이다.

의상과 선묘의 사랑 이야기
부석사 뒤뜰에 있는 큰바위 부석

부석사의 명물인 부석(浮石) 이야기를 빼놓을 수 없다. 여기엔 의상대사의 로맨스와 얽힌 전설이 깃들어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의상 대사가 화엄학을 공부하기 위해 당나라에서 머물렀던 집에 ‘선묘’라는 주인의 딸이 있었다. 의상을 흠모했으나 이뤄질 수 없음을 알고 의상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다는 소원을 빌었다. 의상이 신라로 귀국한다는 소식을 뒤늦게 들은 선묘는 부두로 달려갔으나 그가 탄 배는 이미 사라져 선묘는 내 몸이 용이 되어 의상이 무사히 귀국케 하겠다고 바다에 몸을 던졌다. 그 후 의상이 왕명으로 화엄사상을 펴기 위해 봉황산 기슭에 절을 지으려고 할 때, 이곳에 있던 많은 이교도들이 방해했다. 이때 선묘가 나타나 큰 바위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 기적을 보였고 이교도들은 흩어졌다. 의상이 무사히 절을 세운 뒤에도 돌이 떠 있다고 하여 ‘뜬 바위’라고 불렸다. 이중환이 쓴 ‘택리지’에는 “위아래 바위 사이에 약간의 틈이 있어 줄을 넣어 당기면 걸림 없이 드나들어 떠있는 돌임을 알 수 있다”고 적었다. 무량수전 동쪽 뒤편에는 선묘 낭자를 기리는 건물인 선묘각(善妙閣)이 있다.

부석사 가는 길

부석사는 영주에서도 끝자락에 있어 동쪽으론 경북 봉화, 서쪽으론 충북 단양, 북쪽으론 강원 영월을 접하고 있다. 영주역에서 24km쯤 거리로, 자동차로 30분은 족히 걸린다. 가는 길 양옆으론 사과밭이 지천인 걸 보니 영주사과도 꽤나 유명한가 보다. 부석사를 둘러보고 나면 그곳에서 20분 거리에 있는 소수서원과 선비촌(유네스코 문화유산)을 들러도 좋겠다. 한때 백운동 서원으로 이름 붙여졌던 소수서원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내린 사액서원이자 민족교육의 산실로 퇴계선생의 제자를 포함해 4000여명의 유생을 배출한 곳이다. 옛 영주 선비들의 생활공간을 그대로 복원한 선비촌에서는 매년 5월 초 한국선비문화축제도 열린다. 인삼, 인견으로 유명한 풍기(읍)도 영주시에 있음을 이번 여정에서 알게 되었다.

글·사진 = 정용식 ㈜헤럴드 상무

정리 = 박준규 기자

nyang@heraldcorp.com

Copyright © 헤럴드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