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민’에서 출발한 활동, 학습 통해 ‘전문성’도 높여”

서울앤 2024. 5. 16. 1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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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사회 앞에 서다 ⑥ 군사·평화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 신재욱 상임활동가

[서울&]

신재욱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이하 열군) 상임활동가가 지난 14일 성북구 삼선동에 있는 단체 사무실 입구에서 단체의 활동을 나타내는 각종 포스터를 설명하고 있다.

강정마을 등 부당한 일 겪는 곳 방문 중

군사 문제 폐쇄성 공감하며 활동 시작

닫힌 군대, 지금도 양‘ 심 문제’ 느끼게 해

“‘문제 해결’하기 위한 공부 꾸준히 진행

‘평화의 조기 경보’ 울리는 역할 하고파”

“다크투어가 끝나고 소감을 나누는 자리였어요. 저도 상상을 못했는데 제가 갑자기 막 울음이 터진 거예요. 정말 엄청나게 서럽게 울었어요.”

지난 14일 성북구 삼선동에 있는 ‘열린군대를위한시민연대’(이하 열군) 사무실. 군관련 평화운동을 하는 이 단체의 신재욱(34) 상임활동가에게 “시민단체 활동을 하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현장”을 물었을 때, 그가 기억 속에서 끄집어낸 장면이다.

열군이 2022년 10월 충북 청주시 청원구 옥녀봉 골짜기에서 다크투어를 했을 때의 일이다. 한국전쟁 당시 700여 명의 보도연맹원이 집단 총살당한 장소다. 신 상임활동가는 한 해 전인 2021년, 같은 단체의 박석진(55) 상임활동가와 함께 전국 곳곳의 한국 정부에 의해 벌어진 민간인 학살 장소를 답사했다. 옥녀봉은 그중 한 곳이었다.

“아무도 찾지 않는 학살 현장을 단 두 명이 찾았을 때 너무 외롭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리고 ‘그 현장’은 정말 오랜 세월을 외로움 속에 있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런 상황에서 ‘다시 사람들이랑 같이 오겠다’고 마음으로 다짐했는데, 2022년 소감 발표 때 ‘약속한 대로 이제 시민들과 같이 왔다’는 문장을 쓰고 읽으면서 감정이 북받친 것 같아요.”

신 활동가는 당시 울음에 대해 “복합적인 원인이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 울음 속에는 어쩌면 우리나라 군대에 의해 ‘닫혀 있던 공간을 조금은 열었다’는 마음도 포함돼 있었을지 모른다.

군대에 의해 닫힌 것들을 여는 것이야말로 그가 활동하는 열군의 중요 미션이다. 지난 4월로 창립 10주년을 맞은 열군은 향후 10년의 비전으로 ‘역사에 열린, 시민에 열린, 평화에 열린 군대를 위한 활동’을 제시했다.

“청주를 비롯해 전국 곳곳에서 시민들과 함께 진행한 다크투어는 독재와 학살로 닫혀 있는 우리나라 역사를 성찰하기 위한 활동입니다.”

신 활동가는 또 2020~2023년 진행한 ‘허락되지 않은 기억’ 등 한국전쟁 70년 관련 각종 전시와 ‘용산 전쟁기념관 다시 보기’ 투어 활동 등도 ‘역사에 열린’ 활동의 실천사례로 꼽았다.

신 활동가는 이어 “시민들이 안보·국방 정책의 수립 등을 감시하는 것(시민에 열린)과 국가가 안보를 구실로 주민 생존권을 위협하지 않도록 하는 것(평화에 열린)을 주된 활동 과제로 삼고 있다”고 말했다.

신 활동가가 열군이 지난 1월에 펴낸 ‘2022 국방백서, 시민의 관점에서 다시보기-해설 및 분석’을 살펴보고 있다. 시민단체가 우리나라 국방백서를 분석한 유일한 책이다.

신재욱 활동가는 2018년 3월부터 열군에 ‘출근’하고 있다.

“애초 보수적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군대에서 제대한 뒤인 2012년 민중신학을 공부하는 스타디모임에 6개월가량 참여했어요. 그리고 세계관의 변화를 경험했어요.”

그는 이후 쌍용차 시위 현장, 제주 강정마을 등 “부당한 일을 겪고 있는 곳”을 찾았고, 그 과정에서 박석진 상임활동가를 만났다. 박 상임활동가는 1991년 4월 전투경찰 근무 당시 강경대 학생이 전경의 진압 과정에서 숨지자 양심선언을 했다. 그 뒤 수배와 복역 등의 고초를 겪었으나 2014년 10월 열군 창립을 주도했다.

신 활동가는 2017년 가을 박 상임활동가와 경북 성주군 소성리 마을에서 긴 시간 얘기를 나눈 뒤 상근 활동을 제안받았다고 한다. 조금 고민하다가 활동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신 활동가는 그 결정에 작용한 가장 큰 감정 중 하나로 ‘연민’을 꼽는다. “잘못된 일로 부당한 일을 겪는 사람들의 상황에 대해서 슬픔을 느끼고 안타까움을 느끼는 마음”이다.

하지만 신 활동가는 열군 활동을 이어가면서 “더욱 중요한 것은 ‘전문성’”이라고 생각하게 됐다.

신 활동가는 “활동하면서 어떤 제도나 정책 결정이 굉장히 세밀하게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구나 하는 것을 느끼게 됐다”며 “‘내가 직접 개입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면서 ‘전문성’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변화를 위한 전문성을 고민하다보니 때로는 ‘무력감’과 ‘냉소적인 마음’도 갖게 됐다고 한다. “특히 평화 영역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동아시아나 그보다 더 넓은 차원의 여러 힘이 작용하고 있어서 정말 해결책을 찾는 게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신 활동가는 이에 따라 “내가 이 일을 계속 할 수 있을까, 잘할 수 있을까”를 계속 고민했다고 한다.

고민 중에 활로로 택한 것은 대학원 진학이었다. 신 활동가는 2021년 하반기에 성공회대 일반대학원 국제문화연구학과에 진학했다. 열군은 단체 차원에서 입학금 일부를 지원해주는 등 아낌없는 응원을 보내주었다.

그리고 신 활동가는 올해 2월 ‘군 민주화 운동가들의 정체화 과정 연구: 1987-1993 군인·전경 양심선언을 중심으로’라는 주제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군 민주화운동 활동가 4명과 실제 양심선언자 9명을 인터뷰한 이 논문에서 신 활동가는 ‘왜 그들은 엄청난 고난이 예고된 상황에서도 양심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규명하고자 했다. 신 활동가가 내린 결론은 “살기 위해서”였다.

“인터뷰해보니 많은 군 양심선언자가 ‘자신의 양심에 비추어 견딜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고 생각합니다. ‘계속 이 같은 상황에 놓여 있으면 정말 죽을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독재 상황, 대학을 다니다가 온 이들의 경우 여전히 저항의 자리에 있는 친구들에 대한 미안함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양심의 문제’가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 활동가가 열군의 창립취지문 옆에 섰다. “군대를 인권과 평화의 군대로 바꾸는 것. 무모한 도전임에는 틀림없다. 하지만 아무도 엄두를 내지 않는 일을 하려는 무모한 사람들이 종종 길을 내왔지 않은가.”

신 상임활동가는 사실 그만한 강도는 아니지만 우리나라의 현재 ‘닫힌 군대’는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에게 불의에 대해 갖게 되는 ‘양심의 문제’를 제기한다고 본다.

“군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시각, 그러니까 특정 유형의 남성들을 자원으로 바라보고 그들을 동원하기 위해 규정을 바꾸고, 또 사회적으로도 국가보안법이라든가 빨갱이라는 식의 꼬리표 붙이기 등을 하는 구도는 아직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아요.”

신 활동가는 ‘채 상병의 죽음과 책임 은폐 문제’도 그 연장선에 있다고 본다. 문제가 있는 사안인데도 군과 대통령실이 진실확인을 거부하는 탓에 많은 국민이 ‘양심의 문제’를 느낀다는 것이다.

신 활동가는 그러나 미·일·중·러와 북한까지 포함한 국제 변수가 개입되면 많은 국민이 다시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지’라는 무력감에 빠진다고 본다. 그는 이런 현재 우리 상황을 ‘무감각의 구덩이’라고 규정한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2020년 말과 2021년 말 진행했던 펀딩을 통해 ‘관심을 가진 사람’이 적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열군은 2020년 말에는 ‘허락되지 않은 기억’ 온라인전시관을 만들기 위해, 2021년 말에는 다크투어 가이드북 제작을 위해 각각 온라인 펀딩을 진행했다. 2020년에는 233명이 참여해 928만원을 후원했고, 2021년에는 176명이 참여해 592만원을 모아줬다.

“평화·군사부문 활동을 하다보면 상당히 갑갑하고 변하는 게 없는 것같이 느껴졌는데, 그래도 관심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느끼며 좀 뿌듯했습니다.”

신 활동가는 이런 관심을 더욱 넓히는 것을 열군과 자신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아마도 그 과정은 옥녀봉에서의 경험과 비슷할 수 있다. 수십년간 외롭게 지내던 옥녀봉학살 현장에 자신과 박석진 활동가가 찾아가고, 이후 더 많은 시민이 찾아간 것처럼, 그래서 닫힌 공간을 열린 공간으로 만들어간 것처럼….

신 상임활동가는 ‘앞으로의 인생경로’를 묻자 “군사 분야에 대해 더 공부하고 싶다”고 답했다.

“피스모모라는 평화단체에서 ‘조기 경보’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참 가슴에 와닿았습니다. 현재 우리가 빠져 있는 ‘무감각의 구덩이’에서 우리 모두가 함께 빠져나오려면 누군가는 ‘조기 경보’를 울려야 해요. 그것을 위해서는 시민사회 활동가가 조금 더 예민하고 똑똑해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공부하는 활동가 신재욱이 울리는 ‘조기 경보’가 기대된다.

김보근 선임기자 tree21@hani.co.kr

사진 정용일 선임기자 yongil@hani.co.kr

서울살이 길라잡이 서울앤(www.seouland.com) 취재팀 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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