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령 500호 특집 1] 월간山 초대석 최선웅씨

신준범 2024. 5. 16.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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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불대장군의 집념이 지금의 월간山을 있게 했다

작은 거인이란 말이 어울렸다. 한 치의 비뚤어짐 없는 단정하고 꼼꼼한 매무새, 논리 정연하고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안정감 있는 말투, 고령에도 여전히 도전적이고 지식에 목마른 열정, 이런 것과 그가 걸어온 길이 겹쳐지자 작은 거인이란 말이 어울렸다. 최선웅(67) <월간山> 초대 편집인이다. 그의 말에서 평범하지 않은 생각을 자주 엿볼 수 있었다.

"등산붐은 이제 십년 뒤면 사그라질 거야."

"우리나라 히말라야 등반은 등반이 아냐."

중고등학교 시절 그는 공부는 하지 않고 산에 미쳐 있었다. 이인정(대산련 회장), 한이석(연세산악회OB)씨 같은 친구들과 인왕산, 북한산을 쏘다녔다. 매주 산에 다녔고 1960년대의 암벽등반은 개척등반이 많았다.

그림을 곧잘 그렸던 그는 고교 졸업 후 외삼촌의 소개로 당시 큰 출판사였던 민중서관 미술부에 들어간다. 1년 반을 일하며 인쇄, 편집, 제본 등 책 만드는 일을 배웠다. 한 번 빠지면 깊게 파고드는 스타일이었기에 등산 정보에 목말라 있었던 그는 1961년에 나온 손경석 선생의 <등산백과>는 달달 외울 정도였다.

군 제대 후 이런 상황에서 동국대산악부 오영복씨가 돈을 댈 친구가 있는데 등산잡지를 만들어 보지 않겠느냐고 제의했다. 스폰서는 장남석이었는데 그의 아버지가 재일교포였다. 돈이 있느냐고 묻자 그는 200만 원을 보여주었다. 당시 한 달 급여 1만5,000~2만 원 받던 시절이니 상당한 돈이었다.

1968년부터 창간을 준비하던 중 1969년 설날 날벼락이 떨어졌다. 한국산악회 설악산 10동지 조난사고가 생긴 것이다. 그는 구조대의 식량담당으로 설악에 들어갔다. 꼼꼼했던 그는 껌 하나도 칼로리를 계산해서 구조활동에 맞도록 매일 식량을 불출했다. 연휴가 끝나도 구조는 계속 되었고 결국 우편으로 회사에 사표를 쓰고 <월간山> 창간 결심을 한다.

장남석 발행인의 인현동 집 2층에 '산악문화사'란 간판을 내걸고 5월 말에 창간호인 1969년 6월호를 낸다. 당시 그의 나이 25세, 발행인이었던 장씨의 나이 24세였다. 최선웅씨가 편집장이자 기자였고 이순용씨가 디자인을 했고 유경이씨가 광고를 맡았으며 현 대한산악연맹 회장 이인정씨가 사진기자를 했고 레이아웃을 잡고 교정교열을 하는 여자 편집자가 또 있었다.

최 편집인과 이인정씨는 급여가 없었다. 수익이 나면 배분하기로 했다. 창간호는 필자가 부족해 최선웅 편집인 기사를 많이 썼다. 당시 일본산서가 많아 일어에 능통한 어머니에게 번역을 부탁해 기사를 쓰기도 했다. 절친했던 이인정 현 대산련 회장이 국회의원 이효상씨나 박철암 선생 등에게 원고를 청탁하고 받으러 다녔다고 한다.

제호는 <山>이 아닌 <등산>이었는데, <山>으로 제호를 정하고 한국산악회원이었던 그가 당시 노산 이은상 회장에게 창간 제호를 써달라고 부탁했다. 이때 노산 선생이 등산이 더 좋지 않겠냐고 제의해 <등산>으로 바뀌었다. 창간호는 설악산 10동지 조난사고가 특집기사로 실렸다. 표지는 한국산악회 임경식씨의 등반 모습을 담은 사진이었는데 그는 <산>지가 창간되면 자신이 사진기자를 하겠다고 해놓고 설악산에서 숨을 거뒀다.

이 와중에 산경표를 발굴한 고 이우형 선생이 최선웅 편집장을 찾아와 다른 등산 잡지를 같이 만들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월간山>보다 한 달 늦은 6월에 이우형씨가 만든 월간 <山水>가 나왔는데 등록번호를 보니 <산>지가 라-1158이고, <산수>가 라-1157로 더 빨랐다. <산수>는 돈을 대기로 했던 김초영씨가 사라지면서 오래가지 못했다.

<월간山> 창간호는 2,000부를 찍었고 인건비를 합해 30만 원이 들었다. 그러나 창간호를 내자 발행인인 장남석씨가 보이지 않았다. 장씨의 친형이 마침 군대에서 제대했는데 들어보니 "막내인 장씨가 집안에서 말썽꾸러기"란 것이다. 그가 보여준 200만 원은 재일교포인 아버지가 보내준 생활비였고 형이 그의 책상서랍을 열자 몇십만 원짜리 술집 영수증이 막 나왔다. 서울 농대생이었던 장씨의 형에게 사정을 설명해 지원을 이어가게 되었다. 그와중에 6~7월이 합본호가 되고 8월과 9월호를 어렵게 냈다.

산악문화사는 날이 지날수록 힘들어졌다. 등산 붐이 지금 같지 않던 시절이었기에 광고나 판매 모두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 와중에 장남석씨는 여전히 나타나지 않았고 그의 형도 "잡지를 더 이상 못 내겠다"고 했다.

최선웅씨의 집은 아버지가 일을 했기에 그가 굳이 돈을 내놓지 않아도 생계에 지장은 없었다. 그러나 집에 손을 내밀 정도로 부유한 편도 아니었다. 10~11월호를 어렵게 합본호로 내고 노산 선생을 찾아가 사정을 얘기했다.

이은상 회장은 "우리나라에서 처음 생긴 산악잡지인데 이걸 죽일 수는 없다"며 "방안을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당시엔 잡지가 1년에 3번 합본이 되면 자동 폐간되도록 규정돼 있었다. 그래서 6호를 납본용으로 급하게 40부를 만들었다. 그는 "잡지 명맥은 살려놔야 했다"고 설명한다.

결국 노산 선생이 돈을 대기로 하고 이은상 선생의 막내 동생인 이신상씨가 사장으로 왔다. 당시 이신상 사장은 "영화 잡지 만들고 노산 선생의 형제들 중 날라리로 찍힌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장과 함께 노산 선생의 개인 비서였던 오정방씨가 총무로 왔는데, 그는 "이신상 사장의 딸을 자빠뜨려 사위가 됐다"고 한다. 그때쯤 박영래(현 월간산 객원기자, 본지 40여 년 근무)씨가 독자만화를 보내왔는데 "무척 잘 그렸다"고 한다.

이신상 발행인 체제로 1970년 1월호가 나왔고 사장은 영화, 약국, 목공소 광고를 따 왔다. 그러다 성병 약 광고까지 가져왔다. 이에 편집인인 최선웅 선생은 "등산잡지인데 이런 광고까지 싣기는 어렵다"고 했고, 사장은 "이 사람이 무슨 소리야. 산에 다니는 사람은 그런 데 안 가?"하고 언쟁을 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사위인 오정방씨가 뭐라 하는 상황이 잦아졌다. 결국 대쪽 같은 성격이었던 최 편집인은 2월호를 내고 사표를 쓰고 나왔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오정방은 당시 오리온제과 과자포장지 도안사로 있던 박영래를 기자로 끌어들였다.

<월간山>지를 그만둔 최 선생은 '잘됐다. 산이나 실컷 돌아다니자'고 결심한다. 이후 출판사인 교진사의 송종배 사장이 찾아와 원고를 청탁했다. <등산가이드>란 책을 만드는데 등산기술에 관해 원고를 써달라고 했다. 김정태, 손경석 선생 등 당시의 내로라는 산악지식인들도 원고를 썼고, 등산수첩의 효시인 이 책이 나왔다. 그의 원고가 마음에 들었던 송 사장은 같이 일을 하자고 제의해, 교진사에 들어가 <등산 코오스 안내집 전국70산>을 낸다.

산행 가이드북인 이 책은 바인더로 종이를 뺐다 끼웠다 할 수 있어 히트를 쳤다. 이후 가스통 레뷰파의 <설과 암(Neige et Roc)> 같은 명 번역서를 냈다. 송 사장의 등산 문외한이던 친구가 번역한 걸 최선웅씨가 다시 재편집해서 완성한 책이었다. 그러나 역자로 외대산악부 일어과였던 변형진씨의 이름을 빌렸다. 산악부 출신의 역자 이름이 들어가야 책이 더 잘 팔릴 거라 생각했다.

1971년부터 등산 장비점이 몇 개씩 생겨났다. 등산 잡지의 광고 수요가 생겼다고 판단, 대한산악연맹과 교진사는 <산악인>이라는 잡지를 창간한다. 사장의 지인이던 박정희 대통령 비서 한기욱씨가 대한교과서 주식회사에 압력을 넣어 책을 찍어냈다. 디자인은 이순용씨를 다시 불러들이고 광고는 송 사장이 맡았다. 사무실은 용산역 철도회관 건물이었는데 공용화장실엔 겨울에도 모기가 들끓을 정도로 노후된 건물이었다.

교진사는 월급을 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점심 먹을 돈이 없어 찐빵 하나를 사서 나눠 먹어가며 잡지를 만들었다. 어렵게 1호와 2호를 만들고 3호를 찍기 위해 종로5가에 있던 대한교과서에 갔더니 "이 달부터 안 찍기로 했는데 얘기 못 들었냐"고 반문했다. 알고 보니 한기욱씨가 비리를 저질러 그만두게 되어 그리된 것이었다. 결국 <산악인>은 두 권을 내고 폐간됐다.

와중에 <월간山>은 일반 잡지를 만들던 다른 편집장이 들어와 3~7월호를 어렵게 냈다. 산악정보에 훤했던 최선웅씨가 그만두자 책을 만드는 작업이 고역이었던지 다시 오정방씨가 찾아와 부탁해 편집원으로 재입사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신상 사장도 1년간 잡지를 내고 수익을 내기 어렵겠다고 판단해, 신우회에 <월간山>을 넘긴다. 신우회는 조선일보 방일영 회장, 신직수 법무부 장관, 노산 이은상 선생 등 정계와 언론계의 당대 인사들이 만든 친목 산악회였다.

1969년 MRS회원들과 숨은벽을 개척할 당시의 최선웅 편집인. 군용 슈즈를 신고 부실한 장비로 등반하던 당시,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기기도 했다고 한다.

"원래 처음 만든 사람은 고생만 진탕하는 거야"

새 편집주간으로 조선일보 문화부장이었던 이일동씨가 오고 최 선생이 편집장이 되었다. 그러나 문화부장 출신이었던 이일동씨의 취향에 따라 책이 점점 문학예술 잡지로 바뀌어갔다. 1월부터 3월까지 세 권을 내고 최선웅 편집장은 "내가 편집장인데 편집재량을 줘야 할 것 아니냐"며 "이게 산악잡지지, 문인잡지냐"고 언쟁을 벌였다. 결국 다시 사표를 내고 나왔다. "그 와중에 박영래는 쭉 있었다"고 덧붙인다.

그후 <월간山>은 조선일보에서 정식으로 인수하며 현재에 이르렀다. 최선웅 <월간山> 초대 편집인은 두 개의 등산잡지를 창간한 산악계의 공헌자다.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고집스런 성품과 20대의 혈기와 산에 대한 열정으로 초창기 <월간山>을 만들었다. 그러나 혈기와 열정이 너무 뜨거웠던 탓에 오래 일하지는 못했다.

"월간산은 내가 이름 짓고, 내가 창간한 거니까 자부심을 가지지. 원래 처음 만든 사람은 고생만 진탕하는 거야."

그랬다. 그는 "산행을 해도 항상 앞에서 걷고, 러셀을 해도 앞에서 하고, 뒤에서 하는 건 싫다"고 얘기하는 독불장군 같은 사람이다. 등산 붐이 일고 등산잡지가 여럿 생겨날 즈음 "산 쪽에 흥미를 잃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히말라야 등반은 등반이 아냐"라고 얘기한 것도 개척이 아니면 의미 없다는 그의 소신 탓이다. 등산 붐이 십년 뒤에 사그러질 거라고 얘기한 것도 이유가 있다. 1970년대 초 그는 50년 뒤에 등산 붐이 수그러질 거라고 했으며 이제 10년 남았다고 한다.

MRS(등반연구회) 회원들과 숨은벽을 개척할 때의 모습. 이들은 숨은벽에 10개 코스를 개척했다고 한다. 왼쪽부터 최선웅, 이번, 이형삼(요델산악회), 민상기(전 KBS 촬영기자), 백경호(고대산악회 OB). 당시 백경호씨가 대장이었으며 숨은벽찬가란 산노래를 지었다.

사람들은 그를 이상한 사람으로 여겼지만 나름 논리가 있다. 일본의 등산잡지인 <산과 계곡>은 80년 역사를 자랑하는데 경영이 어려워 몇 년 전 작은 출판사로 넘어갔다. 마찬가지로 일본의 등산붐도 1990년대부터 사그라지기 시작했는데 GNP가 3만 달러 이상이 되면 등산인구가 줄어든다는 것이다. 등산은 힘드니까 해양스포츠 같은 고비용 스포츠로 넘어 간다는 것이다.

우리나라가 유독 등산인구가 많은 데에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단다. 첫째 산이 낮아 누구나 갈 수 있다. 둘째 경제가 나아지니까 건강에 관심이 가면서 등산을 하게 됐다. 셋째 은퇴한 노인들이 건강을 지키고 남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산에 간다는 것이다.

그는 "산을 제대로 보호하려면 등산을 안 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다. 한때 늘 유서를 품에 넣고 바위를 탈 정도로 산에 미쳤었고 월급도 없이 <월간山>지를 만들던 최선웅씨는 세월이 흘러 산 밖에 서 있었다.

서른한 살 되던 해인가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이후 그의 삶이 바뀌었다. 어린 동생이 셋이나 있었고 돈을 벌어야 했다. 지도회사였던 동양출판사 편집원으로 들어가 일하기 시작했다. 몇 년 후 회사는 한일합작회사(한국소문사)로 바뀌었고 워낙 꼼꼼하고 추진력이 강했던 최선웅씨는 능력을 인정받아 입사 10년 만에 직원에서 사장이 됐다. "산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지도 만드는 데만 매달렸다"고 한다. 현재 그는 지도제작 분야에 있어 우리나라에서 손꼽히는 전문가가 되었다.

그가 2005년 1월부터 본지에 연재한 '최선웅의 지도이야기'는 그의 지도제작 입문 40년, 지도제작 30년을 맞아 시작했다고 한다. 깊이 있는 지도 이야기로 지금도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코너다. 그는 5년 넘게 연재하며 스스로 지도에 대한 공부를 많이 했고, 지금껏 해온 지도 작업을 정립하게 됐다고 한다. 지도이야기를 쓰는 데는 인터넷의 도움이 컸다.

회사 특성상 일본을 자주 다녀야 했던 그는 세월이 흘러 일어에 능통하게 되었고, 일본 번역 웹사이트를 통해 세계의 지도 정보를 섭렵했다. 우리나라는 인터넷 번역기가 최근에야 생겼지만 일본은 전 세계 언어를 번역할 수 있는 시스템이 생긴 지 오래됐다고 한다. 그는 하고 싶은 것이 많다.

"올해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만든 지 150년이거든. 그 사람은 지도제작자지 지도학자는 아냐. 앞으로 우리나라 지도제작사를 만들고 싶어."

1997년부터 6년 동안 한국산악회 총무이사를 했던 최선웅씨에게 당시 문희성 회장이 "총무는 왜 산에 안 다니지?"하고 물었다. 이에 그는 "저는 젊었을 때 너무 산에 미쳐 있어서 지금은 공부하고 싶은 거 하느라 시간이 없습니다"하고 답했다.

산에 갈 때 버너의 화력을 일일이 조사하고 음식의 칼로리를 계산했던 집요한 꼼꼼함, 월급 한 푼 없이도 밤을 새워가며 책을 만들었던 추진력, 유서를 품고 바위를 타던 산에 대한 열정, 이 모든 것이 초창기 <월간山>을 있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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