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령 500호 특집1] <월간山> 500호 전호(全號) 소유 독자

신준범 2024. 5. 16.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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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비둘기산우회의 속 깊은 큰형 김원식씨

산은 마셔도 마셔도 가시지 않는 목마름

월간산이 나왔던 1969년에 스물아홉 살이었어. 그땐 등산지식에 정말 목말랐어. 1960년대의 손경석씨의 등산백과는 달달 외울 정도였어. 바이블이었거든."

김원식(金源植·71)씨의 아파트는 작지만 깔끔했다. 방의 한쪽 벽 전체가 책꽂이였는데 그중 한 모퉁이를 <월간山>이 메우고 있었다. 42년이 흘렀어도 책은 깔끔했다. 그의 단정한 성품을 읽을 수 있었다. 김 선생은 스스로를 낮추는 데 일가견이 있었다. 작은 노력이 아닌데도 "버리기도 그렇고 우리나라 등산사니까…"하며 조용히 말을 감추었다.

인수봉에 깊이 빠졌던 그는 1965년에 창립한 산비둘기산우회를 이듬해 가입했다. 바위에 푹 빠져 살았던 그는 산우회 후배인 유학재씨가 고1 때 함께 산을 다녔다고 한다. 스무 살 차이인 그는 유학재씨에게 등반을 가르쳤냐고 묻자, "누굴 가르치긴, 그냥 산에 같이 다녔다"고 한다. 김 선생은 검소함과 성실함, 겸손 같은 요즘 시대에 찾기 힘든 미덕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그는 조용히 자랑을 한 가지 했다.

"보통 일이 바빠서 산에 못 다니는 공백기가 있어요. 나는 다행히 사업이 힘들거나 크게 아팠던 적이 없어서 그동안 산행을 거른 적이 없어요."

1966년부터 지금까지 아무리 산을 못 가도 최소 3주에 한 번은 갔다고 한다. 다만 2년 전 잠깐 아파서 한 달 못 간 게 유일한 결석이다. 빙벽과 바위는 지금도 하고 싶은 마음이 있지만 가뜩이나 바위와 얼음에 등반하는 이들이 많아 후배들도 하기 힘든데 주책 부리기 싫어서 가끔 사람 없고 여유 있을 때만 한다.

월간산 기사 중 주로 윤제학씨와 이호신씨의 글을 좋아하는데 요즘은 상업성이 너무 강해진 것 같다며 아쉬워한다. 책을 다 가지고 있는 건 "대단한 게 아니고 42년 정기구독한 많은 사람 중에 책을 버리지 않고 모아뒀을 뿐"이라며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월간산 말고도 <사람과 산> 역시 창간호부터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으며 월간 <현대문학>을 1960년대부터 지금까지 다 소장하고 있다. 순수문예지 구독이 큰 도움이 된다며 덕택에 단편소설 수백 편과 시 수천 편을 읽어, 자연스레 문학의 역사를 체득하게 되었다.

좋아하는 산을 묻자 말이 없던 그는 "어느 산 좋다고 하면 다른 산이 서운해 할 것 같아서 찍어서 얘기 못 하겠다"고 한다. 그의 발이 시선을 끈다. 두 발 다 엄지발가락이 바깥쪽으로 휘어 있다. 작은 암벽화를 워낙 오랜 세월 신다 보니 발가락이 변형됐다.

그는 산에 대한 애정에 수식어를 붙이지 않는다. 그러나 가만히 듣고 있으면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깊음을 감지할 수 있다. 김원식 선생은 1997년 자신의 이름으로 산시집 <구름 위에 띄운 엽서>를 냈다. 평생 쓴 산시를 묶어 책을 낸 것이다. 시집 서문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산은 결코 나를 원하지 않는데 나 혼자 산을 좋아합네 하면서 산을 얼마나 괴롭히고 있는가. -중략- 수려한 암봉마다 하켄을 치고 그것도 모자라 볼트를 박고……. 진정 산을 좋아하고 사랑한다면 오늘부터 등산을 그만둘 일일 것이다. 그러나 산은 마셔도 마셔도 가시지 않는 하나의 목마름이다.'

'산 전도사'이자 '영원한 고문' 박태규씨

"재미있게, 탈 없이 등산 즐긴 건 모두 <월간山> 덕분이죠"

"대한의사산악회·서울시의사산악회·서울의대 동창회산악회 등 내가 속한 산악회의 창립을 주도한 관계로 주변에서는 나를 보고 '산 전도사'라고 하는데, 사실 산 전도사 사부 역할을 한 건 월간산입니다. 월간산에 나온 시산제나 축문, 산행정보 등을 보고 산행장소를 정하고 많은 회원들에게 전달하곤 했죠."

소아과 의사였던 박태규(76)씨는 산행경력은 그리 오래된 건 아니다. 40년이 채 안 된다. 1970년대 초부터 병원까지 북한산 언저리로 걸어서 출근한 게 등산의 시초가 됐다.

1972년 병원 개업 뒤 빨리 자리를 잡기 위해 일에 얽매여 몸이 지쳐 있을 때였다. 건강 생각에 집에서 줄넘기를 하려다 세 번을 넘고서는 숨이 차서 그냥 주저앉아버렸다. 요즘 말로 '저질' 체력에 스스로 충격을 크게 받았다. 작심을 했다. 무조건 걸어 다니자고. 그때부터 집에서 병원까지 4㎞ 남짓 되는 거리를 매일 걸어서 출퇴근했다. 그러다 수유동 근처 북한산을 오르내리며 본격 등산을 시작했다.

처음엔 같이 다닐 산행동료도 없어 동대문 클로버산악회에 가입해 몇 년 다녔다. 당일과 무박산행 등 어디든 빠지지 않았다. 등산에 재미가 붙어갔다. 동네에 있는 의사친구들 여섯 명이 모여 정기적으로 산행 다니자고 '육봉회'를 조직했다. 그게 1980년 직후다. 육봉회는 아직까지 매달 정기적으로 산행을 계속한다.

'중독 중에 가장 좋은 중독은 등산중독'이라는데 서서히 등산중독자가 된 박씨는 본격 '산 전도사' 역할에 나섰다. 1988년부터 의사산악회를 만들자고 주변 동료 의사들에게 계속 권했다. "의사들은 남의 병 고치느라 하루 종일 얽매여 평생을 바치는데, 의사들이 자기병 고치는 데 돈도 안 들고 가장 좋은 방법은 등산이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점차 반응이 나타났다. 1990년대 초에 서울의사산악회가 창립됐다. 그 산파역은 물론 박태규씨였다. 주변에서 회장을 맡으라고 했지만 뒷바라지하겠다고 고사하고 고문으로 활동했다. 이후 전국 조직인 대한의사산악회 창립도 도와 또 고문을 맡았다. 2000년대 초엔 서울의대 동창산악회 창립도 주도했다. 또 고문을 맡았다. 실제로 주변에서 그를 '영원한 고문'이라고 부른다. '산 전도사'에 '영원한 고문'이 그의 비공식 명칭이다.

수십 년간 산에 다니면서 잊지 못할 추억도 많다. 1980년대 초 수몰되기 직전 마을 주민이 전부 철수해 텅 빈 충주호 일대 먼지 날리는 비포장도로를 한 바퀴 돌았던 기억은 선명하다. "내가 아마 수몰되기 전 장면을 가장 마지막으로 본 사람일 것"이라고 그는 말한다. 서울로 돌아오니 주행거리만 1,000㎞가 훌쩍 넘었다.

육봉회 친구들과 설악산 야간산행을 갔을 때 한 명이 기진맥진 쓰러져 돌아가면서 업고 겨우 한계령으로 내려왔던 기억도 새롭다. 한계령에서 택시를 불러 양양 비행장에서 마지막 비행기를 이륙 직전 탑승, 서울로 돌아왔다. 아마 1분만 늦었으면 비행기를 놓쳐 다음날 출근을 못 했을 것이다.

건강을 위해 다닌 산행으로 신체는 좋아졌지만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요즘 등산을 못 하고 있다. 백내장으로 한쪽 눈이 거의 실명위기에 있다. 평소 눈이 너무 좋아 검사를 받지 않은 게 실수였다. 백내장은 시야를 좁게 해 신문은 볼 수 있지만 멀리 있는 물체는 못 봐 하산길이 굉장히 위험하다.

"등산을 못 가 너무 갑갑하고 힘듭니다. 나이가 있어 회복될 것 같지는 않네요. 요즘은 평지를 걷고 있습니다. 아 직까지 다른 증상은 나타나지 않지만 나이가 있어 다른 곳에 영향을 미칠까봐 사실 겁이 납니다."

그가 수십 년간 모아온 <월간山> 수백 권은 의사산악회 에 기증할 예정이다. 어쩌면 그의 등산인생과 <월간山>은 공동운명체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대한산악연맹 학술정보이사 변기태씨

"빠진 홋수 적어놓고 한 권씩 지우는 재미로 모았어요"

"대학시절 단어장에 <월간山> 빠진 홋수를 적어 놓고 틈 날 때마다 청계천 헌책방을 뒤지고 다녔어요. 누가 월간山을 정리한다는 얘기만 들리면 달려갔어요. 서울시연맹이 이사할 때도 박스에 담아 용달차로 싣고 왔으니까요. 그런데도 1969년 말부터 1970년 초까지 여섯 권이 비어요. 희귀본인 창간호는 3권이나 있어요. 제가 책 모으는 걸 워낙 좋아하니까 주변 분들이 챙겨준 거죠."

대한산악연맹 학술정보이사 변기태(邊起兌·53·한국하켄클럽)씨는 <월간山>을 1969년 5월호 창간호부터 499호까지 모아온 산악인이다. 그가 <월간山>에 관심을 가진 것은 무엇보다 루트개척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선배들이 인수봉 A코스를 한 번 데려간 뒤 다른 루트를 가지 않는 거예요. 길을 잘 알지도 못하고 자신도 없었던 거죠. 그래서 개척기에 관심이 많았어요. 개척기를 읽은 다음 등산의 '산' 자도 모르는 친구를 바위로 데려가 줄 잡아 달라 하곤 올랐으니까요. 옛날 선배들의 등반기를 읽을 때면 흥분됐어요. 뜨거운 열정에 감탄했고요. 산악전문서적이 많지 않던 시절이라 교양을 넓혀주는 내용도 많았죠. 그렇게 <월간山> 모으는 재미가 산서 수집으로 이어졌어요."

1974년 암벽등반을 시작해 불암산 천보암에 루트를 개척하고 1983년에는 남미 원정을 다녀오는가 하면 이태 전 알프스 등반도 다녀오는 등, 고교 1학년 때 등산에 입문한 이후 지금까지도 현역 클라이머로 활동하는 변기태씨는 <월간山>뿐 아니라 산서(山書) 장서가로 이름나 있다. 그의 사무실과 부모님 댁 책꽂이에 꽂혀 있거나 쌓여 있는 산서는 무려 6,000권에 이른다. 국내외 산악관련 서적뿐 아니라 유람기와 유산기가 실린 고서와 지리서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그는 <설악산시>를 가장 아끼는 책으로, 1865년부터 지금까지 결호 한 권 없이 모아온 영국산악회 발간 <알파인저널>을 가장 소중한 책으로 꼽는다.

"유산기를 통해 옛날 산의 모습뿐 아니라 선인들의 산악관을 읽을 수 있어요. 아무튼 총각시절 모은 책은 부모님 댁에 있고 결혼 후 모은 책은 사무실에 있어요. 가까이 있어야 한 권이라도 더 읽을 수 있으니까요."

한국산서회 창립 멤버이자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 부회장을 역임하고 2007년 장서가들 사이에서 가장 권위 있는 상으로 꼽히는 '올해의 애서가 상'을 수상한 바 있는 변기태씨는 "산악인들이라면 산서 읽는 일에 게을리 하면 안 된다"며 "적어도 스스로 전문 산악인이라 생각한다면 '산이 거기 있으니까 간다'는 식의 답변에서는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는 최근 출판사를 등록하기도 했다. 인수봉이 마주보이는 고갯마루인 '하루재'에 그의 산악회 이름처럼 '클럽'을 붙였다.

"3년 전 캐나다 밴프에서 열린 산악영화제 때 찾은 도서전에서 정말 좋은 책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어요. 대부분 초판 이후 돈이 안 되니까 재판되지 않은 책들이에요. 그 때 마음먹었어요. 스무 권 정도는 책을 내보자고요. 현재 번역을 거의 다 마친 'Fallen Giant' 같은 책이 그중 한 권이에요. 캐나다로키 등반사도 낼 거예요. 알프스 등반사, 일본 등반사도…. <월간山> 모을 때처럼 단어장에 적어 놓고 한 권 한 권 지워나갈 거예요. 그게 선배 산악인으로서 후배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요."

대전 샤또그레이스호텔과 경안건업을 경영하는 중견 사업가인 변기태씨는 "잡지사가 돈을 많이 벌면 좋은 단행본도 펴낼 텐데 산꾼들이 책을 잘 읽지 않다 보니 내가 떠맡게 된 것 같다"고 웃으며 "아무튼 가이드북이 아닌 영원히 남을 산악 명저를 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한국 700명산> 저자 신명호씨

"<월간山>은 평생 산행친구이자 안내서"

"월간산은 나의 평생 산행친구이자 안내서입니다. 월간산만큼 정확하고 상세한 기사와 지도를 제공하는 잡지는 없습니다. 다른 잡지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신뢰가 갔습니다. 처음엔 다른 잡지와 같이 보다가 언젠가부터 다른 잡지는 볼 필요가 없어 지금까지 월간산만 보고 있습니다."

<월간山> 40여 년 애독자 신명호(71)씨의 말이다. 신씨는 비교적 늦은 나이인 38세부터 산에 다니기 시작했다. 산에 다니기 시작한 건 순전히 건강 때문이었다. 동대문에서 작은 사업을 하면서 잠도 못 자고 무리하게 일을 하다 몸이 만신창이 됐다. 호흡기 질환, 위장병, 요통 등 나이든 사람이 겪어야 할 질병을 젊은 나이에 벌써 앓았다. 주변에서 산에 다녀보라고 권했다. 처음엔 그저 그러려니 하고 산에 갔다. 1년이 지나면서부터 호흡기 질환이 없어지더니, 3년이 되자 위장병과 요통이 거짓말같이 말끔히 사라졌다. 지금도 그 고통스러웠던 순간과 신기할 정도로 감쪽같이 사라진 순간이 기억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건강을 회복하면서 모든 일에 자신감이 생겼고 더욱 산행에 박차를 가하게 됐다. 그러나 호사다마랄까, 고비가 찾아왔다. 산행에 입문한 지 5년 만에 바위산행을 하다 북한산 원효능선에서 3m 아래로 추락했다. 아마 머리부터 떨어졌으면 바로 저 세상 사람이 됐을 텐데, 엉덩이가 바위 사이에 끼는 자세로 내려앉는 바람에 생명은 건질 수 있었다. 대단한 행운이었던 셈이다. 병원으로 실려 갔다. 엑스레이 촬영 등 모든 검사를 다 받았다. 뼈는 이상이 없다고 하는데 6개월 동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아마 떨어지면서 뼈가 충격 받고 놀라서 조금 흔들리며 그렇게 되지 않았나 싶다"고 그는 돌이킨다.

당시엔 산에 가고 싶어 몸이 안달이었다.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웠지만 그래도 서서히 몸을 만들어 갔다. 다시 살살 걷기 시작하면서 산부터 올랐다. 산행 입문 10년쯤 됐을까. 포천 운악산 알봉 부근에서 암벽산행을 함께하던 선배가 눈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추락한 것이다. 이 사건으로 암벽산행은 접고 워킹산행에만 주력하는 직접적 계기가 됐다.

그러나 인생의 고비는 여러 차례 있듯 위기가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1998년 5월 백두대간 종주에 나섰다. 친구와 함께 지리산 중산리를 출발해서 30일 만에 진부령에 도착했다. 매일 평균 12시간씩 27㎞ 정도를 걸었다. 그 중 열흘은 우중산행이었다. 거의 끝나갈 무렵인 그 해 6월 13일 오후 2시쯤 미시령 가는 길에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고 배는 고파서 기진맥진한 상태였다. 힘이 빠져 '이젠 죽었구나' 생각뿐이었다. 아무 말도 없었다. 그래도 남은 빵조각이라도 먹기 위해 앉았다. 바로 눈앞에 나무에 걸린 비닐조각이 보였다. 무조건 그쪽으로 짐승 발자국보다 희미한 등산로를 따라갔다. 불과 1㎞도 못 가 원래 가려고 했던 등산로가 나타났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젠 살았다!" 소리친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모든 산행 순간 항상 그의 곁에 있었던 건 <월간山>에서 가져온 산행정보였다. 그 산행정보가 그에게 더없이 소중한 가치를 발할 줄 당시까지 몰랐다. <555산행기> 저자인 고 김형수옹을 산에서 만나 같이 산행하기에 이르렀다. 김옹은 책을 쓸 때나 산에 갈 때 항상 <월간山>을 지침서로 삼았다고 한다. 그리고 김옹이 세상을 떠나기 전 모아뒀던 <월간山> 초기의 책을 그에게 줬다. 꼭 책을 쓰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지금 신씨는 <한국 700명산> 등 산 관련 책을 7권이나 쓴 저술가가 됐다. 모두 <월간山>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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