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심장 밖에 있다

한겨레21 2024. 5. 16.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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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적의 글쓰기]쓰는 사람 아닌 읽는 사람의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글쓰기, 마음 밖 연결고리가 핵심
담쟁이 줄기를 끊고 간 사람에 대해 글을 쓸 때 ‘화났다’는 말을 최대한 안 쓰고 그 감정을 담을 매개물을 찾다보면 글이 좀더 독자 곁으로 갈 수 있다. 사진은 서울 서대문구 연세대 담쟁이덩굴. 한겨레 자료

오늘은 감정을 글로 어떻게 다룰지에 대해 말해보려 합니다.

지난주에 겪은 고약한 일 얘기부터 해야겠군요. 저나 제 가족에게 악의를 품은 누군가가 봄철 맹렬히 뻗어 나가던 담쟁이 줄기를 끊어놓았습니다. 저에게 직접 달려들었다면 응수해줬을 텐데, 야비하게도 사람이 없을 때 말 못하는 식물의 명줄을 끊어놓다니 비겁한 사람입니다. 골목 어귀에 있는 공용 감시카메라가 비추지 않는 곳을 찾아, 뿌리 가까운 줄기를 또각또각 모조리 끊어놓았더군요. 회색빛 담장의 등짝을 초록빛으로 감싸주던 이파리들이 갑자기 겨울 낙엽처럼 싯누렇게 말라 죽었습니다. 2년을 숨죽여 기다렸다가 겨우 뻗어 나가던 담쟁이였습니다. 비가 쏟아지던 날, 시신을 거두듯이 벽에 눌어붙어 있는 줄기와 이파리를 투두둑 잡아떼냈습니다. 집을 나설 때나, 들어설 때나, 밥을 먹을 때나, 누워 있을 때나, 오줌을 눌 때나 담쟁이 생각뿐입니다. 담쟁이를 끊어놓은 사람 생각뿐입니다.

내가 아닌 상대의 감정을 자극하는 글

그런데 이렇게 감정이 상할 때야말로 글을 쓸 절호의 기회입니다. 마음이 출렁거릴 때 글을 쓰면 술술 나옵니다(못됐죠?). 화남, 분함, 억울함, 슬픔, 미움, 외로움, 그리움, 안타까움, 애틋함, 뿌듯함, 기쁨 등 온갖 감정은 마음을 ‘격동’시킵니다. ‘평정심’은 우리가 추구할 이상적인 상태일 뿐입니다. 감정은 시시때때로 변합니다. 우리는 감정 자체입니다. 감정과 함께 감정과 싸우면서 삽니다. 사실이나 사건과 싸우는 게 아닙니다. 사실과 사건이 만들어내는 감정과 싸우는 겁니다.

그래서 글에서 감정을 어찌 다룰지가 중요한 문제입니다. 글은 결국에 감정을 담으니까요. 그런데 감정은 글과 같지 않습니다. 감정 자체는 글이 아닙니다. 여기서 말하는 글은 감정을 쏟아붓는 글이 아닌, 감동을 ‘주는’ 글입니다. 감정 전달이 글의 주된 기능인 것이 카톡에 쓰는 글입니다. ‘ㅎㅎ, ㅠㅠ, 와, 쩝, 스읍, 풉, 넵, ^^, -.-;’처럼 감탄사와 이모티콘을 남발하며 순간순간 떠오르는 감정을 바로 전달합니다. 감정을 전달하지 않으면, 도리어 이상합니다. 공지 사항만 있는 단톡방은 삭막합니다. ‘기획회의 5월20일 오후 2시 4층 대회의실’ ‘어제 회식비 각자 18,950원씩 입금 요망. 계좌번호 ○○은행 1234~’. 이렇게 써야 답글이 달립니다. ‘어쩌죠? 5월20일에 또 기획회의가 잡혔네요ㅠㅠ. 지난주에 이미 탈탈 털렸는데, 뭘 더 뽑아내려는 건지!!’ ‘어제 회식 즐거웠슴다~. 슬기님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된 건 큰 수확이네욤. 회식비 영수증을 봤더니 각자 18,950원씩 입금해주시면 됩니당. 마음은 제가 쏘고 싶지만~^^;;’

우리가 쓰려는 글은 카톡 글이 아닙니다. 카톡과 정반대의 글입니다. 우리의 글은 자신의 감정을 잘 요리해 독자에게 미적 감흥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예술의 궁극 목표는 카타르시스입니다(늘 말씀드리지만, 우리가 쓰는 글은 예술입니다!). 선동이나 설명이 아닙니다. ‘후련함’ 같은 겁니다. 막힌 하수구가 뚫려 고인 물이 콸콸 내려가는 듯한 후련함입니다. 주변 눈치 안 보고 꺼이꺼이 울 만큼 솟구치는 겁니다. 그 폭풍이 지나가고 난 다음에 찾아오는 감정이 카타르시스입니다.

문제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사람이 누구냐는 거겠죠. 글쓴이와 독자가 동시에 느끼면 좋겠는데, 둘 중 하나만 택하라면 저는 독자를 택하겠습니다. 내가 아니라 상대의 감정을 자극해야 합니다. 손가락으로 옆구리를 찌르면 쉽게 자극할 수 있을 텐데, 풀잎으로 발가락을 간지럽히면 쉬울 텐데, 독자는 저만치 떨어져 있으니 그러지 못하죠. 내 글이 자극적이어야 합니다. 타인의 몸을 간지럽히듯이, 내 이야기가 (내가 아닌) 독자의 감정을 격발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독자는 글을 통해 글쓴이가 만난 현실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글에서는 감정을 쏟아붓기보다는 절제해야 합니다. 감정을 쏟아붓는 글이 쓸모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 감정이 정화될 수 있다면 백번이라도 쏟아내야 합니다. 신파극이 있듯이 그런 글도 필요합니다. 감정을 절제하라고 하면, ‘감정을 숨기라’는 뜻으로 이해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절제’는 넘치지 않게 조절하는 겁니다. 넘치는 걸 ‘과잉’이라고 하죠. 감정이 과잉된 글을 읽으면, 글자로는 ‘미칠 듯이 기쁘다’고 쓰여 있지만 독자는 무덤덤한 채로 있습니다. 간지럽히는 손가락이 웃으면 안 됩니다. 간지럽힘 당하는 옆구리가 웃어야 합니다.

‘빡치다’ 말고 쓸 수 있는 말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요? “단어 ‘화’는 감정이 아니다.” 한발 더 나아가 “‘화’라는 감정은 없다!”(잉?) 어느 서당 훈장이 천자문 공부를 하지 않는 학생에게 너는 왜 공부하지 않느냐고 했더니 “하늘은 푸르지만 ‘하늘 천(天)’ 자는 푸르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는 옛이야기와 비슷한 감각을 가져보자는 겁니다. 글은 이성적입니다. 차갑고 건조하고 평면적이고 느리고 재미없습니다. 종이엔 내 눈물을 떨굴 수도 없고, 영상처럼 웃음을 담을 수도 없습니다. 설령 눈물방울을 떨어뜨렸다고 해도 독자가 그걸 받아들었을 때는 말라서 얼룩진 종이일 뿐이겠죠. 그 얼룩이 뭘 뜻하는지 알지 못합니다(파본이라고 환불을 요구할지도). 거기서 여러분의 슬픔을 느낄 수 없겠죠.

그래서 “단어 ‘화’에는 감정이 없다. 말로 표현하지 못할 어떤 감정이 있을 뿐이다. 내가 느끼는 감정은 ‘화’라는 단어로는 도무지 담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그러고 나서, 그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새로운) 언어를 찾아주는 것입니다. ‘열 받다, 뚜껑이 열렸다, 빡치다, 돌아버리다’와 같이 ‘화나다’와 비슷한 표현을 떠올리자는 게 아닙니다. ‘그와 헤어지게 되니 슬픔이 밀려왔다. 이별의 아픔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앞날이 캄캄하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처럼 쓰지 말자는 겁니다.

감정을 일으키는 매개체를 찾아 그걸 쓰자는 겁니다. 시학에서는 감정을 절제하려면 감정 자체가 아닌, 감정을 전달하는 객관적인 대상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이를 ‘객관적 상관물’이라고 부릅니다. 사람들은 객관적인 상관물을 매개로 감정을 전달해왔습니다. 그래야 오래 기억하고 심장에도 새겨집니다.

며칠을 아무것도 먹지 않은 노새가 있었습니다. 양쪽 똑같은 거리에 물과 여물을 놓아두었더니, 물을 먼저 먹을지 여물을 먼저 먹을지 고민하다가 결국 굶어 죽었다는 얘기입니다. 우물쭈물하지 말고 선택을 단호하게 하라는 메시지겠죠. 그런데 사람은 다릅니다. 사람은 선택을 돕는 ‘도구’(매개물)를 생각해냅니다. 동전이나 아카시아 잎 같은 것이죠. 동전을 던져 앞이 나오면 물, 뒤가 나오면 여물. 아니면 아카시아잎을 하나씩 떼면서 ‘물, 여물, 물, 여물, 물, 여물’ 이런 식으로 했죠. 도구에 기대어 선택하는 방법을 찾았습니다. 그게 인간이 고등생물로 진화한 과정이자 결과입니다. 무엇을 택할지 고민될 때 ‘동전’이나 ‘아카시아잎’이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피부 밖의 매개물을 찾아서

글쓴이와 독자의 감정 사이에 어떤 매개물(도구)을 놓을지 고민해야 합니다. 서두에서 저희 집 담쟁이 줄기를 끊고 간 사람에 대해 썼는데, 제가 느끼는 감정은 분노였습니다. 그 말을 어떻게 하면 하지 않을까 궁리했습니다. ‘화났다’라는 말을 쓰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최대한 안 쓰고 그 감정을 담을 매개물을 찾다보면 글이 좀더 독자 곁으로 갈 수 있을 겁니다.

감정과 감정은 직거래하지 않습니다. 거간꾼이 있어야 합니다. 매개물이 있어야 합니다. 내 안에 감정이 있는 게 아니라, 내 심장과 피부 밖에 있다고 봐야 합니다. 어디에 있을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각자 찾아야 합니다. 내 심장과 피부 밖에 있으니, 세상만사 모든 게 다 될 수 있겠네요(이렇게 말하고보니, ‘감정 아닌 모든 것으로 감정을 표현하라’는 말이 되는군요. 뭔가 심오한?). 내 감정을 격동시킨 매개물을 쓰는 겁니다. 그것만 쓰는 겁니다. 그러곤 가늠해보는 겁니다. 내 감정이 이 매개물을 통해 독자의 감정을 격발시켰는가?

(*지난 원고의 ‘제목’이 바뀌었는지 알려드린다고 했죠? 분하게도 그 원고의 제목도 바뀌었습니다. 원래는 ‘제목은 내용을 초과한다’였는데, ‘‘밤양갱’ 노래 제목이 ‘탕후루’였다면?’으로 바뀌었습니다. 스읍.)

<한겨레21> 독자 영희님이 보낸 글은 주변의 소문에도 꿋꿋하게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여러 감정이 뒤엉켜 속이 시끄러운 모습을 재치 있게 표현했다. 사진은 와이어링 부품을 납품하는 회사 경신의 통합물류센터 작업자. 한겨레 자료

[독자 글]

‘오해’를 주제로 일곱 분이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선옥님은 동료의 소개로 알게 된 지인이 외로울 것이라 오해하면서도 계속 이해해보겠다는 다짐의 글을 보내주셨습니다. 그분께 ‘외롭냐’고 직접 물어보시면 어떨까요? 정선님은 어머니를 고생시킨 아버지와 정반대의 사람과 만나 부족한 점은 고쳐가며 살면 되겠다고 생각해 결혼했는데, 남편 때문에 마음고생, 몸고생을 많이 하셨나봅니다. 군인인 준준님은 부대 선임이 말을 놓고 지내자고 했는데, 처음에는 그러지 못하다가 차츰 친밀감이 생겨 반말했더니 기분 나빠하더라는 얘기를 들려주었습니다. 담이님은 친구가 집에 갈 때 하는 ‘잘 지내’라는 인사말이 자신에게는 헤어지는 상황에서나 쓰는 말이라는 생각과 겹쳐서 낯설었다는 경험을 썼네요. 혜욱님은 상대가 반지를 내밀어 친구로만 지내자고 거절했는데, 몇 달 뒤 수척해진 얼굴에 몸이 안 좋아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모습에 마음이 흔들려 결혼했다고 하네요. 실은 과민성대장증후군 때문이었을 뿐인데. 하하. 풀레님은 상처를 남기고 헤어진 사람을 다시 만나 그동안 서로가 나눈 말이 전혀 다르게 받아들여졌다는 걸 깨닫게 됐다는 이야기를 해주셨습니다(잘 이해했는지 모르겠군요). 한 편의 글에 너무 많은 세월과 이야기를 담으려는 욕심이 다시 보입니다. 작고 미세하게 쓰시길 권합니다. 이번호부터는 독자 글도 함께 싣기로 했는데, 영희님의 글을 소개합니다. 주변의 구설과 소문에도 꿋꿋하게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도 여러 감정이 뒤엉켜 속이 시끄러운 모습을 재치 있게 쓴 글이더군요.

<제목 : 없음>

영희는 공장 노동자다. 하루 평균 14시간 일하고, 식사는 잘 하지 않으며, 잠은 틈나면 잔다. 신문과 뉴스는 늘 공장의 가혹한 노동 환경에 관해 떠들어대지만, 영희는 딱히 불만이 없는 편이었다. 영희는, 그렇게 일하는 것이 별로 괴롭지 않은 사람이었고, 바로 그 사실 때문에 늘 괴로워했다.

공장에서 일한 지 10년이 넘었지만 사람들은 아직도 그런 영희를 낯설게 보곤 한다. 영희씬 참, 공장 사람 같지가 않아! 공장 사람들은 어떻게든 노동의 고단함을 잊으려는 듯 자주 언성을 높이고, 끼니때면 밥을 두 그릇씩 먹고, 일과가 끝나면 술집이나 노래방엘 가고, 틈만 나면 남의 흉을 보거나 욕을 한다. 영희도 한때는 어떻게든 공장 사람들과 닮아보려 꾸역꾸역 밥을 먹고, 좋아하지 않는 노래를 따라 부르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런 일을 그만두었다. 그래봤자, 소문만 더 커질 뿐이었기 때문이다.

근데 영희씨 말이야, 언제부터 저기 있었지?

누군가는 영희가 먹지도 자지도 않고 작업지시서를 기계처럼 출력해내는 걸 봤다고 했다. 점심때 밥을 먹고 왔더니 나흘치 작업지시서가 완성돼 있더라니까. 어라, 어제는 A라인에 있었는데? 아냐, B라인에 있던데? 그럴 리가, 오후 3시에 C라인에서 김씨랑 얘기하는 걸 내가 똑똑히 봤는데? 에이, 사람이 어떻게 동시에 세 장소에 있을 수 있어? 영희씨, 사실 사람이 아닌 거 아닐까?

소문은 에스에프(SF) 소설처럼 흥미진진한 이야기로 뻗어 나가기도 했지만 종종 추문으로 번지기도 했다. 밤에도 집에 안 간대요. 사실은, 공장장의 오피스 와이프라던데? 점심시간에 영희가 밥을 먹으러 가는 대신 신문이나 잡지를 읽고 있으면, 옆 라인 언니들은 화장품 파우치를 옆구리에 끼고 와서 영희에게 말을 걸곤 했다.

“영희씬 맨날 뭘 그렇게 읽어?”

“왜, 무슨, 진짜 작가라도 되게?”

그런 말끝은 늘 까르르 하는 웃음으로, 또는 들릴 듯 말 듯한 수군거림으로 이어졌다. 아니, 애가 싸가지가 없잖아. 밥맛이 없어서 밥을 안 먹어? 고상한 척 말 없을 때부터 알아봤어. 젊은 애가 웃음기 하나 없이. 하여간 진짜, 재수 없어.

영희는 늘 능력에 비해 가진 게 너무 많다고 생각하는 쪽이었지만, 사람들 눈에는 또 뭐가 많이 없기도 한 모양이었다. 점심시간에 <한겨레21>을 읽는 건 무슨 죄일까? 죄목을 달자고 따지고 들면 물론 없음이겠지만, 사람들은 영희의 일거수일투족에 제목 달기를 좋아했다. ‘밥맛이 없어서 밥맛인 영희’ ‘젊은 애가 웃음기도 없는 영희’ ‘말이 없어 재수도 없는 영희’.

그래서 이 글의 제목은 뭐로 하지? 영희는 고민하다 자신의 가장 간절한 바람을 적기로 했다.

-영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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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당한 일에 사사건건 대들며 살기 어렵습니다. 가끔, 아주 가끔, 견딜 수 없어 저항하거나 반항합니다. 그래서 사춘기 때의 무조건적인 반항이 기억에 오래 남나봅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났는지. 크고 작은 힘에 저항했던 기억이 있으시죠? 살아 있음을 느꼈을지, 내심 겁났는지 궁금하군요. 그 결과는 어땠나요? 장렬한 패배였나요, 예상 밖의 승리였나요? 저항 또는 반항의 기억을 한 편의 글로 써주세요. 어울리는 제목도 붙여주시고요.

주제: 저항, 또는 반항

분량: 1천 자 정도씩(띄어쓰기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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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낼 곳: han21@hani.co.k

김진해(경희대 교수, <말끝이 당신이다>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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