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첩 혐의로 불법구금 된 재일동포…“국가가 사과하고 재심해야”

고경태 기자 2024. 5. 16.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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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일·고찬호·강호진·여석조…2기 진실화해위 최초
역용 공작원으로 활용하다 가치 없어지자 구속
최창일 재심에 검찰 “중정과 공조 증거능력 있다”
“재일동포 직권조사해 일괄처리할 필요” 지적도
고 최창일씨. 최정규 변호사 제공

간첩 활동 혐의로 불법 구금돼 고문 등 가혹 행위를 받고 중형까지 선고 받은 재일동포 고 최창일·고찬호·강호진·여석조 4명의 인권침해 사건에 대해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14일 오후 열린 제78차 전체위원회에서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14년 만이다. 1기 진실화해위(2005~2010) 때는 김정사·유지길·김동휘 등 10여명의 재일동포 간첩조작 사건에 대한 인권침해 확인 결정이 있었으나, 2기 들어서는 이번이 처음이다. 아직도 40여건 넘게 남아있는 재일동포 사건에 대해 일괄적인 직권조사가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들 4명은 일본 본사의 한국 지사 근무나 가족방문차 국내를 왕래하며 간첩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1972년부터 1986년까지 육군보안사령부(보안사, 현 방첩사) 수사관들에게 영장 없이 연행돼 최대 69일의 불법구금 상태에서 가혹 행위를 비롯한 강압수사를 받은 뒤 국가보안법 및 반공법 위반의 혐의로 징역 15년 등의 중형을 선고받았다. 국내에 연고가 별로 없고 한국어가 미숙해 자기 방어력이 부족한 재일동포는 보안사의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보안사는 최창일·강호진·여석조씨에 대해서는 조총련 정보수집을 위한 ‘역용 공작원’으로 활용하다가 성과가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판단하자 구속했다.

제주 출신인 고찬호씨는 당시 재판 중 항소이유서에서 이렇게 쓰기도 했다. “1986년 8월25일 제주 보안대에 붙들려가 갖은 전기고문으로 간첩 행위를 했다는 허위자백을 하게끔 한 점에 대해 너무나도 우리나라에 와서 크나큰 충격이었다. 또한 검사님께서도 이것은 죄가 되지도 않고, 죄가 된다 하더라도 조금만 고생하면 나온다고 하길래 미약한 마음에서 그대로 진실하게 얘길 하지 않고 조서대로 허위 자백한 것이다.“

4명의 진실규명 대상자 중 현재 생존해 있는 이는 없으며 최창일(1941년생)씨의 경우 딸 최지자(나카가와 도모코, 中川智子)씨가, 고 고찬호(1940년생)·강호진(1938년생)·여석조(1920년생)씨는 재일한국양심수동우회 대표 이철씨(76)씨가 진실 규명을 신청했다. 이철씨는 1975년 ‘재일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사형확정 판결(1979년 무기징역 감형)을 받고 13년간 옥살이를 했던 당사자이기도 하다. 이철씨는 이번에 진실 규명된 3건을 비롯해 총 38명에 대한 재일동포 인권침해 사건을 신청해 놓은 상태다.

진실화해위는 이번에 진실 규명된 재일동포 피해자 4명과 그 가족에 대한 국가의 사과와 함께 재심 등의 조치를 권고했다. 최창일씨 유족의 경우 이미 서울고등법원이 지난해 11월 “보안사 수사관들이 피고인을 수사할 권한이 없었다”며 재심 개시를 결정해 오늘 23일 선고를 앞두고 있다. 문제는 검찰이 “보안사가 최초에 수사를 시작했으나 중앙정보부(현 국정원)와 공동수사 형식을 취했으므로 보안사에서 확보한 증거의 증거능력이 인정될 여지가 있다”는 등의 논리를 펴며 공소를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 재일동포 인권침해사건 피해자 38명에 대한 진실규명을 신청한 이철씨가 14일 오후 서울 중구 정동길 프란치스코 교육회관 1층에서 열린 본인의 회고록 ‘장동일지’ 출판기념회에 참석해 앉아있다. 김영환 제공

최창일씨 사건을 대리하는 최정규 변호사(법무법인 원곡)는 “당시 보안사의 불법수사를 방치했던 검찰이 50년이 지난 현재에도 억지스럽게 공소를 유지하고 있다. 당시 중앙정보부법과 관련 대통령령(정보 및 보안업무조정·감독규정)에 의거할 때 경찰청·검찰청·보안사 등 정보수사기관은 정보 사범 수사에 있어서 중앙정보부와 공동수사의 형식을 취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중앙정보부가 이 사건 수사에 어떤 식으로 개입되었다고 하더라도 보안사의 불법 수사가 정당화될 수 없다”고 했다.

진실화해위는 이번에 재일동포 4명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문을 개인별로 발표했다. 이에 대해 사건 신청인 이철씨는 15일 한겨레에 “아직 규명되어야 할 분들이 40여명 계시는 거로 알고 있는데 거기에 비하면 이번 결정은 미흡하다. 이미 돌아가신 분들도 많고 또 과거 사건에 대한 공포심이 있어 숨어 지내는 분들을 찾아내는 일이 보통 힘든 게 아니다”라며 “진실규명을 하려면 개인별로 할 것이 아니라 재일동포 사건을 통째로 일괄처리해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2005년 대법원은 “오욕의 사법부 역사를 청산하겠다”며 지난 판결 6000여건을 검토했고, 2006년 이중 문제가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건 224건을 꼽은 바 있다. 여기엔 재일교포 유학생들을 고문해 간첩으로 만든 사건이 상당수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진실화해위 조사2국 관계자는 한겨레에 “대법원이 꼽은 224건에 포함된 사건부터 직권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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