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파동 적산가옥의 낭만적인 실험, 카페 ‘킷테’ 이준호 대표
고택을 카페로 변신시킨 ‘킷테’의 오너 이준호 대표와 오래된 공간이 주는 가치와 아름다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눴다.
생활의 미감을 끌어올리는 공간을 찾아갑니다. 트렌드는 물론 고유성과 정체성을 갖춘 디자인부터 음식, 공간 속 숨은 이야기까지. 일상에서 쉽게 접할 수 없는 보고, 듣고, 먹는 특별함을 선사합니다.
리모델링 또한 집이 오랫동안 쌓아온 고유한 특성을 존중하며 진행했다. 가족, 건축가의 철학과 스타일은 철저히 감추고, 공간 본연의 결을 그대로 살린 것. 이준호 대표는 "리모델링은 가족, 건축가, 목구조 전문가 등과 긴밀하게 협업해 완성했어요. 풍부한 아카이브가 만들어낸 결과물이죠"라고 말했다.
5대의 추억이 담긴 소중한 공간
일본 가옥의 특징인 다다미를 사용했지만, 일본보다 추운 우리나라 겨울 날씨를 고려해 부분적으로 구들방(온돌을 놓아 난방 장치를 한 방)을 활용한 것 같아요. 또 노란색 외관과 실내 테라스, 응접실, 박공지붕 등의 서구 건축 요소도 곳곳에 녹아 있습니다. 이렇게 일본과 서양 요소가 혼합된 결과물을 전문가들은 화양절충식 주택이라고 부르더라고요. 흔한 유형은 아니죠.
이곳엔 언제 정착했나요.
1960년이요. 저희 어머니를 포함한 8명의 자매와 외증조모, 외할아버지, 외할머니까지 총 11명이 거주했어요. 이 집은 1945년 광복 이후에 적의 재산(자신의 나라 안에 있는 적국의 재산), 적산가옥으로 분류됐습니다. 곧 민간에 불하(拂下), 즉 매각했고요. 마침 목포에서 서울로 이사를 해야 했던 외할아버지가 이 집을 인수해서 3대가 함께 살기 시작했죠.
이 건물이 일본식 가옥이라는 것은 원래 알고 있었어요. 건축 연도와 최초 건축주는 2017~2019년 리모델링 도중 지붕 아래 붙어 있던 상량문(집을 새로 짓거나 고친 내력, 이유, 날짜, 시간 등을 적은 글)을 발견하며 알게 됐죠. 상량문에 최초 건축주 이름은 야마자키 카츠사부로, 직업은 호리우치구미라는 건축 회사의 경성 지점 부지점장으로 명시돼 있었어요. 또 건축 연도는 쇼와 5년, 1930년 11월 8일로 적혀 있었고요.
추억도 많을 것 같아요.
외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까지는 매주 일요일 외가 친척들과 이곳에 모였어요. 마당에 있던 아궁이에 불을 지펴 국을 끓여 먹었죠. 지금은 철거했지만 연못, 우물 근처에서 친척들과 뛰어놀고 방에서는 함께 만화책도 읽었어요. 그 시간이 너무 즐거워서 일요일만 기다렸던 것 같아요.
2017년 주택은 새로운 쓰임새를 찾았고, '카페’를 선택했습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2015년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8명의 자매는 이곳의 용도에 대해 깊은 고민을 했어요. 매매, 헐고 건물을 올리자, 보존 등 다양한 의견이 나왔죠. 논의 끝에 오랜 시간 방치해둘 순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고, 일곱째인 저희 집에서 복원 공사를 진행하기로 했습니다. 처음부터 카페를 목적으로 공사한 건 아니에요. 상업적으로 활용하더라도 집의 구조적 안정성이나 단열의 보완이 필요했거든요. 어렵게 공들여 보존한 건물을 우리도, 찾아오시는 손님도 험하게 쓰지 않는 것이 최우선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불을 사용하거나 술을 파는 외식업은 자연스럽게 제외됐고요. 또 누구나 쉽게 찾아올 수 있는 공간을 지향했고, 지역 주민으로서 이 근처 랜드마크가 생기면 좋겠다는 욕심도 있었어요. 이 모든 걸 종합했을 때 가장 적합한 공간이 '카페’였어요.
단 한 분도 없었어요. 가족 모두 건물이 오랫동안 유지되려면 사람의 손길, 발길이 닿아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당연히 여러 자재가 망가지겠지만, 그만큼 더 보완하고 보수하면 건물 자체의 수명이 길어질 테니까요. 코로나19 때 손님이 없어서 몇 달을 그냥 비워뒀는데, 확실히 먼지가 더 쌓이고 빨리 낡더라고요.
가족을 대표해 킷테의 운영자가 됐어요. 부담스럽진 않나요.
저는 원래 금융맨이었어요. 스위스에서 10년 동안 주식 애널리스트와 M&A 자문 뱅커로 일했죠. 하지만 늘 마음속에 품고 있던, '내 사업을 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2019년 퇴사했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 준비한 주류 회사 설립을 위해 공부를 시작했죠. 운이 좋게 국내 위스키 회사의 후원을 받아 장학생으로 선발됐고, 스코틀랜드에서 양조학 석사과정을 마쳤어요. 2021년 귀국한 뒤 금융계 전공을 살려 음식료 부문 중소기업의 컨설팅과 강원도 위스키 공장 설립을 동시에 진행하고 있었어요. 그 와중에 복원 공사를 시작한 외갓집을 누군가 관리해야 했고, 부모님의 추천으로 제가 킷테를 맡게 됐죠.
"킷테를 운영해달라"는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나요.
고민 많이 했죠. 저는 카페 운영을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머릿속엔 위스키뿐이었거든요. 또 역사가 깊은 공간을 제가 잘 활용할 수 있을지 걱정됐습니다. 그렇다고 가족들의 추억 가득한 이 집을 방치하기도 싫었어요.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이 바뀌었고, 오랜 고민 끝에 카페를 운영하기로 결심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건 '가족’이었거든요. 제가 카페를 운영함으로써 가족들이 이 공간을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다면 그게 행복이라고 여겼죠. 그러기 위해선 본래 집의 디자인과 무드를 최대한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난방 등 구조적 결함을 보완하되 본연의 분위기는 유지하는 방향으로 리모델링을 진행했습니다.
보존과 복원 과정을 통해 재현한 옛것의 고결함
맞아요. 매 순간 선택과 집중을 해야 했어요. 그럴 때마다 마음속에 세운 2가지 원칙을 떠올렸습니다. '원형을 보존하고, 안전과 관련된 부분은 무조건 강화하자’라고요. 그래서 일식 가옥 특유의 몰딩 처리와 장식적 요소, 계단과 조명은 원래 것을 그대로 유지했어요. 보존이 어려운 부분은 복원해서라도 비슷하게 만들어내려고 노력했고요. 바닥에 깔린 다다미, 문손잡이, 잠금장치, 창살 등은 사실 100% 본래의 것이 아니에요. 일부 깨지고 부서져 있어 전문가가 원형과 유사하게 복원했죠.
킷테를 '노란 집’으로 부르는 사람이 많아요. 노란색 외관도 본래 컬러였나요.
가족들이 이 집에 이사 왔을 때도 노란색이었다고 해요. 사실 리모델링할 때 외관에 공을 많이 들였어요. 색도 바래고 시멘트도 많이 떨어져 나갔거든요. 과거와 비슷하게 만들려고 했는데 질감도 워낙 독특하고 미묘한 노란색도 재현해내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근대 가옥 복원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어냈습니다. 독특한 질감의 외벽은 시멘트를 개어 손으로 던지는 식으로 구현했고요.
2층은 좀 더 훼손 없이 보존하고 싶었어요. 원래 개방할 생각이 없었지만 관심을 갖는 손님들이 많아 예약제로 운영하고 있어요. 기본적인 구조는 1층과 크게 다르지 않아요. 다만 훼손 우려로 1층에 두기 어려웠던 칸살 문과 일본 가옥의 특징인 도코노마(다다미방 정면에 바닥을 한 층 높여 붓글씨와 인형, 꽃꽂이 등으로 장식하는 공간)와 오시이레(일본식 특유의 붙박이장)를 그대로 유지했죠. 도코노마는 개인적으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공간이에요. 일본 전통 문양 중 하나인 카쿠아사 모양으로 장식돼 있거든요. 집으로 사용하면서 떨어지거나 파손된 조각 문양들을 모아뒀었고, 그 조각들을 이용해 모양을 맞췄어요. 또 중량이 있는 가구 때문에 바닥이 망가지는 게 싫어 좌식을 선택했어요. 무엇보다 킷테는 바닥까지 보일 정도로 낮은 눈높이에서 봐야 제일 예쁘거든요. 1층은 손님들의 편의를 생각해서 높은 테이블과 의자를 놓았다면, 2층은 다다미 위에 방석을 깔아 킷테를 온전히 즐길 수 있게 구성했습니다.
지난해 8월에는 이 집에 관한 역사를 보여주는 아카이빙 전시회도 열었어요.
글과 사진으로 남긴 리모델링 과정을 보여준 전시회였어요. 전시회를 통해 많은 사람이 집과 인간의 교감 및 고택의 가치를 깨닫길 바랐죠. 관람객을 대상으로 집 투어도 진행했는데, 신청자가 100명을 넘어 깜짝 놀랐어요. 오래된 것들에 흥미와 관심을 갖는 사람이 많다는 걸 깨달았고요.
전시를 관람한 한 건축학부 교수가 건축물에 사용한 스크래치 타일을 보고, 1920년대 초기 일본에서 유행했던 자재라고 설명해줬어요. 당시 미국 건축가가 일본 제국호텔 재건축에 사용하면서 일본에 처음 알려진 타일인데, 그 후 한국으로 넘어와 이 집을 지을 때 사용한 듯하다고요. 언뜻 보면 흔한 타일 같지만 시대상이 남아 있다는 게 신기했어요.
킷테를 통해 손님들에게 전달하고 싶은 가치가 있다면요.
고유성이요.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화한 것들의 고결함은 대체 불가하다는 걸 알아줬으면 해요. 유럽이나 일본에는 100년이 넘은 카페나 레스토랑이 많아요. 그곳이 주는 깊은 안정감과 차분함은 누구도 절대 따라 할 수 없죠. 세월이 준 선물이니까요. 또 공간은 단순히 누군가가 머물렀던 곳이 아니라, 그 시대와 사회의 스토리가 스며든 역사적 산물과도 같아요. 90년 넘은 킷테를 통해 이 모든 것을 느끼셨으면 합니다.
90년 동안 주거 공간이었던 이곳이 킷테로 얼마나 더 자리할까요.
50년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웃음). 솔직히 이제 10년만 지나도 저는 감이 많이 떨어져 있을 것 같아요. 그때는 가족 중 킷테를 운영하고 싶은 사람에게 넘길 예정이고요. 개인적으로는 50년 후에도 이 모습 그대로였으면 좋겠어요. 정기적으로 보수는 하겠지만 오래전부터 품고 있던 이 분위기가 유지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람들이 킷테를 통해 오래된 것들에 대한 귀중함과 아름다움을 가슴 깊은 곳에 간직할 수 있도록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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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지호영 기자
정세영 기자 sy28230@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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