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내 안에 화석처럼 쌓여 있어
가장 행복했던 ‘내’가 지나간 연애에 있다 환승연애>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잠시 나는 앞에 타들어가는 고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고민하는 척했지만 늘 내 대답은 한결같았다.
“야, 돈 준다는데 당연히 나가야지. 난 이제 걔랑 아무렇지도 않아. 나가면 더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으니 나야 생큐지.”
25살. 멋모르던 대학생 새내기를 지나 이제는 어엿한 직장인 혹은 취준생이 된 동기들이지만, 만날 때마다 나에게 하는 질문은 늘 똑같았다. 그것도 취할 때만 말이다.
말할 수 없는 비밀 “잊지 못했다”
“너 Y한테 다시 연락 오면 잘해볼 생각 없어?”
요즘엔 질문이 바뀌었다. 최근에 <환승연애>라는 프로그램이 유행한다나 뭐라나.
“너 Y가 <환승연애> 나가자고 하면 나갈 거야?”
20살의 나는 3년 동안 Y를 만났다. 그것도 대학 시절 부메랑과 같다는 과 시시(CC·캠퍼스커플)로. 30명 남짓한 동기 사이에서 과 시시를 할 생각을 했다니, 지금 생각하면 미친 짓이다. 이별한 지 2년이 지나도 여전히 동기들의 안줏거리가 되고, 제대 뒤 학교에서 마주칠까 조마조마하며 다닐 줄 알았다면 시작도 안 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당시 Y와 나는 연인이자, 둘도 없는 ‘베프’였다. 우리 둘이 떨어지게 될 줄은 하늘도 몰랐을 것이다.
불러주지도 않을 <환승연애>의 출연 여부를 묻는 동기들의 말에 나는 늘 쿨한 척했다. 헤어진 지 얼마나 됐는데 Y 얘기를 하느냐고. 걔 이름이랑 얼굴도 까먹을 판이라고. 천만에. 내 방 서랍 맨 밑 칸엔 훈련병 시절 Y가 써주었던 수많은 인터넷 편지와 손편지며 함께 찍은 인생네컷 수십 장이 케케묵은 상자 속에 고이 남아 있다. 네이버 클라우드에도 비밀번호를 치고 힘겹게 폴더 4개를 거치면 Y와의 사진들이 아직 남아 있다. 나만의 ‘말할 수 없는 비밀’이랄까.
가끔 친구들의 이별 상담을 해줄 때면 ‘금방 잊힌다고, 날 보라’며 떵떵대지만 현실은 정반대다. 거리를 걷다 Y가 쓰던 지미추 향수 내음에 무심코 뒤를 돌아보거나, 플리에서 Y가 즐겨 듣던 트로이 시반의 <스트로베리 앤 시거레츠>(Strawberry & cigarettes)가 흘러나올 때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이미 알고 있는 가사를 또 본다. 이뿐만이랴. Y와 아지트처럼 드나들던 후암동에 간다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면 그때처럼 신나 부탁하지도 않은 남의 데이트 코스까지 짜주는 나다. 천국과 지옥을 가르는 기준이 거짓말이라면, 난 이미 지옥행이다.
Y를 다시 만나고 싶은 것은 분명히 아니다. Y와 헤어진 뒤 울고불고하며 재회를 몇 번씩이나 생각하고, 지운 번호도 다시 눌러가며 취중에 전화를 걸던 내 모습은 더는 없다. 첫사랑이라 그런가. 아니면 이별 뒤 현실에 치여 연애를 못해서 그런가. 이런저런 고민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사랑하며 가장 행복했던 내 모습을 잊고 싶지 않기 때문일 것이라고. 그래서 모든 연애는 행복했던 당시의 ‘나’를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존재일 것이라고.
<환승연애>를 잘 모르지만, 그곳에 나와 “더 좋은 사람 만나면 좋겠어”라는 출연자들을 난 믿지 않는다. 그들도 분명히 나와 같은 ‘말할 수 없는 비밀’이 있을 것이기에. 행복했던 자신을 만들어준 X를 마주한 채, 새 사랑을 찾아 나서는 모습은 때론 내게 위선적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어쩌면 공개적인 자리에서 X를 완전히 잊고 새 출발을 당당히 선언하는 그들을 보며 느끼는 나의 질투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나 분명한 것은 그들에게도 지난 연애가 남긴 족적은 화석처럼 켜켜이 쌓여 있어, 고작 몇 회짜리 방송 혹은 X룸 따위로 쉽게 드러날 서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이것이 3년간의 연애를 통해 얻은 나의 경험칙이다.
‘환승연애’ 출연자를 믿지 못하는 이유
글을 다 쓴 뒤 그녀의 이름을 Y로 고친다. 그동안 쓴 글은 노트북에 저장해왔지만, 이 글은 아니다. 카페에서 음료와 샌드위치 부스러기를 정리하며 이 글도 함께 정리한다. 길을 나서며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오른다. 아, 오늘은 서랍 밑 상자를 열어 그녀가 써준 편지를 읽어볼 것 같다.
최승훈 sallowooman@naver.com
심사평
- MZ의 보편적 사랑
연애나 결혼이라는 단어 뒤에 ‘시장’을 붙이는 게 어색하지 않은 세상이다. 한우 등급 매기듯 결혼정보회사에 등록된 인간 상품들에도 똑같이 등급이 있다는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법륜 스님 말씀 중에 “인간의 탐욕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가 바로 결혼 상대를 고를 때”라는 게 있다. “평생 우려먹을 상대를 골라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연애가 시장의 영역이라면, 예능 프로그램 <환승연애>는 ‘비전형 시장’이다. 중고상품과 신상품을 한군데 놓고 고르게 하기 때문이다. 연애시장에 진열된 인간의 핵심 상품가치는 인기와 성적 매력이고 그건 시간이 지나면 감가상각이 된다는, 자명한 자본주의 원리에 어긋나는 역선택자들이 <환승연애> 출연자 중에 있다는 건 연애가 여전히 시장과 비시장의 경계에 있음을 깨닫게 한다. 그런 점에서 <환승연애>는 21세기에도 진지한 사랑이 가능하다는 방증이 아닐까.
한국 사회에 엠제트(MZ)세대만의 사랑법이 따로 있다는 담론이 형성돼 있는 듯하다. MZ는 인스턴트식 가벼운 사랑을 하고, 헤어질 때도 카톡으로 이별을 통보한다는 식이다. 그러나 3회차 ‘미지의 소리’ 응모 글들은 세대와 상관없는 사랑의 보편적 가치와 정서를 보여줬다. 선정작을 쓴 최승훈씨는 전 연인과의 사랑과 이별에 대해 “연애가 남긴 족적은 화석처럼 켜켜이 쌓여 있어 고작 몇 회짜리 방송 혹은 X룸 따위로 쉽게 드러날 서사가 아니”며 “모든 연애는 행복했던 당시의 ‘나’를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존재”라고 선언한다. 사랑과 연애의 본질을 성숙한 자세로 응시하고 있다.
가수 박완규의 노래 <비밀>의 가사가 왜 이별의 비밀에 관한 것인지를 통찰한 한관우씨의 글, 연인과 <환승연애>를 함께 보면서 토론하던 장면을 자세히 묘사하면서 담담하게 현재의 이별을 받아들이는 이홍규씨의 글, 명작소설을 읽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개연성과 핍진성이 높은 픽션 스토리를 쓴 윤채원씨의 글, 가성비 쾌락과 도파민 중독이라는 관점에서 프로그램을 분석한 정초하씨의 글은 모두 선정작으로 선택하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김창석 한겨레엔 교육부문 대표·한겨레교육 미디어아카데미 강사
다음 주제
퇴사가 맥주보다 좋은 7가지 이유
원고지 10장(2천 자) 안팎
마감 2024년 6월23일(일) 밤 12시
발표 제1520호
문의·접수 leejw @hanien.co.kr
※응모시 메일 제목은 [미지의소리_이름]으로 기재 부탁드립니다.
원고료 당선작 1편 원고료 10만원, 한겨레교육 마일리지 10만 점
※마일리지는 한겨레교육 모든 강의에 사용 가능합니다.
※마일리지 사용기한 : 적립일로부터 한 달 내
*MZ는 어떻다, 뭐가 다르다… 이런 구구절절한 제삼자의 평가는 이제 그만해주세요. MZ 당사자가 말하는 MZ. 4주마다 글을 공모해 심사 뒤 싣는다.
Copyright © 한겨레21.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