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 절반 “정치성향 다르면 밥도 같이 먹기 싫어”

이봉현 기자 2024. 5. 16.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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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창간기획] 한국의 대화 소통을 실험하다
‘한국의 대화’ 왜 필요한가
자유연대 회원들이 2019년 12월1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태극기와 성조기 등을 흔들며 공수처, 연동형 비례대표제 반대 집회를 열고 있다. 김혜윤 기자 unique@hani.co.kr

한국사회 갈등, OECD 국가중 3위
가슴 후비는 막말에 “사이다” 환호
혐오·조롱 담은 신조어 빠른 공유
자신과 다른 관점 들을 생각 없어
정치권은 사회통합 관심 없고
상대를 적으로 보고 응징 몰두

저출생이나 기후위기가 발등의 불이지만, 그 못지않게 짙은 먹구름이 한국 사회를 덮고 있다. 갈등이 첨예화해 구성원끼리 불신하고 혐오하고 배척하는 사회적 분열이 그것이다. 지지하는 정당, 이념, 세대, 남녀, 지역, 인종의 차이가 곧 ‘적과 아군’을 가르는 분단선이 돼, 공동체를 ‘정서적 내전’ 상태로 몰고 가고 있다. 어떤 중요한 합의도 결정도 안 되는 사회, 상대가 한 일을 허물고 반대로 가느라 날이 새는 나라, 격동기에 길을 잃은 한국의 자화상이다. 이제는 분열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이를 해결하자는 말마저 공허한 지경이 됐다. 여기서 돌려세우지 않으면 우리는 현세의 지옥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간의 여러 조사는 우리 사회의 갈등과 분열이 어떤 수준인지를 보여준다. 몇개만 인용하자. ‘한국의 정치·경제·사회 분야 갈등 수준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30개국 가운데 멕시코, 이스라엘에 이어 세번째로 높아 심각한 상황이다’(전국경제인연합회 갈등지수, 2016년 기준), ‘국민의 51%는 여야 정당 간 대립과 갈등이 과거보다 커졌다 생각하고, 58%는 민주주의 등 여러 측면에서 사회가 좋지 않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고 생각한다’(한겨레, 2022년 12월 기준), ‘국민 41%는 정치성향이 다른 사람과 밥도 같이 먹기 싫다고 한다’(조선일보, 2022년 12월 기준), ‘국민의 절반 이상은 지지 정당이 다른 사람이 나 또는 자녀의 결혼 상대가 되는 게 불편하다고 답했다’(경향신문 2023년 12월 기준).

미움과 불신은 날 선 언어로 표출된다. 내 편이 아닌 쪽으로 던지는 말본새가 나날이 거칠어진다. 가슴을 후벼 파는 막말에 ‘사이다’라 환호하고, 혐오와 조롱을 담은 신조어를 재빨리 공유한다. 종북 좌파, 토착 왜구, 이대남, 한남충, 꼴페미, 꼰대, 수박이 그렇고, 앞에 ‘개’나 ‘핵’ 같은 접두사를 붙여 자신의 감정을 한껏 강하게 드러내는 게 유행이 됐다. 자신의 입장을 고집할 뿐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관점은 들어볼 필요도 없는 양 행동하는 이가 많아진다. 극단적 생각을 실행에 옮기는 일도 벌어진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지방을 방문한 야당 대표를 겨냥한 정치 테러가 자행됐다. 우리만 이런 것은 아니다. 미국도 도널드 트럼프가 전면에 나선 이후 정치와 사회의 분열이 첨예화했고, 2021년 1월에는 대통령 선거 결과에 불복한 트럼프 지지자들이 의사당에 난입하는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유럽에서도 분열의 언어를 구사하는 좌우 극단주의 정치집단이 선거 등을 발판 삼아 세력을 키워가고 있다.

시민들이 편을 나눠 싸우는 정치적, 정서적 양극화는 경제적 격차의 심화, 즉 불평등 확대가 근본 원인이란 게 학계의 통설이다. 지난해 가을 한겨레 아시아미래포럼 연단에 선 민주주의 이론가 제인 맨스브리지(미국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불평등이 커지면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We-feeling)이 무너진다. 서로 멀어지고 소통하지 않으며, 사람들을 다른 세상에서 살게 한다. (…) 그러면 동질감을 느끼는 유일한 방법은 외부 적을 찾아 악마화하거나 전쟁하는 것이다.” 불평등 연구자 토마 피케티(파리 경제대 교수)도 엘리트들이 상인 우파와 브라만 좌파로 나뉘어 ‘현대판 귀족 놀음’을 하면서, 대변자를 잃은 하층민이 포퓰리즘적 선동의 먹잇감이 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렇다 해도 정치가 조정하고 통합하는 본연의 역할을 했다면 상황이 이렇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한국이나 미국, 유럽에서도 정치는 반대로 작동했다. 화나고 억울한 사람의 감정을 상대편에게 투사하도록 해 반사이익을 노리는 정치가 득세했다. 한국의 여야도 이젠 상대를 경쟁자가 아니라 적으로 대한다. 자신들의 비전과 능력을 펼치기보다 정치적 경쟁자의 추악함을 부각해 시민들을 화나게 하고 내 편을 묶어세우는 데 여념이 없다. 막말과 조롱은 유머와 품격을 밀어냈다. ‘정치의 사법화’니, ‘검찰 독재’니 하면서도 정치가 할 일을 고소장으로 대신하는 행태가 이어진다. 여기에 확증편향과 반향실 효과를 증폭하는 디지털 환경, 승자독식의 ‘소선거구-단순다수제’ 선거제도, 정당 간 지지층 규모가 엇비슷해지면서 오는 치열한 경쟁 구도가 심각성을 더한다. 지난 대선과 이번 총선이 그랬듯 선거는 더 나은 선택이 거의 불가능한, 그래서 더 싫은 정치인을 응징하는 게임이 됐다.

참여하는 건강한 팬심을 넘어 비방 문자 폭탄을 쏟아내는 적대적 팬덤은 정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은 데 따른 반작용이다. 정치학자 박상훈(전 국회미래연구원 연구위원)은 “팬덤은 대중에게 아첨하는 정치, 혐오를 악용하는 정치가 만들어낸 부산물”이라고 말한다. 이런 팬덤은 내 편이 아니면 적, 즉 타도의 대상으로 규정하고 거침없고 당당하게 혐오와 배제에 나선다. 그래서 정치인을 눈치 보게 하고 ‘나쁜 정치’를 강화하는 되먹임 작용을 한다.

죽일 듯 싸우는 혐오의 정치는 사회를 갈가리 찢어 서로 공동체의 구성원이 맞는지를 의심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대통령이 일을 못하면 야당이 무척 좋아하고, 야당이 곤란해지면 대통령과 여당이 크게 박수를 친다. 선거 때면 이렇다 할 정책 제시나 토론도 없이 오로지 정쟁만 난무하는 정치가 국민에게 이로울 리 없다. 정치가 이럴 때 가장 피해를 보는 계층은 자신을 보호해줄 학벌도, 재산도, 지위도 변변치 않은 중하층민들이다.

남북 분단에 더해 내부의 분단까지는 참기 어렵다면 행동해야 할 때다. 바둑을 이기는 평범한 원리는 ‘묘수’가 아니라 ‘정수’를 계속 두는 것이라 한다. 시민이 할 수 있는 행동은 불편해도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열린 기술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사회적협동조합 빠띠의 황현숙 이사는 “대화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황금 열쇠는 아니지만, 대화 없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고 말한다. ‘통섭’의 과학자 최재천(이화여대 석좌교수)은 “인터넷 공간에서 자신의 감정을 배설하기 전에, 또 거리로 뛰쳐나가기 전에 사람들끼리 둘러앉아 얘기한다면 이렇게까지 ‘지옥 같은 사회’에 살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라고 한다. 우리는 만나는 것만으로도 많은 매듭이 풀리는 걸 경험으로 안다. 독일 유력 주간지 ‘디 차이트’가 여는 대화 프로그램 ‘독일이 말한다’에 참여해 이슬람 이주민 문제를 토론한 한 참가자는 평소 색안경을 끼고 봤던 상대방이 그저 평범한 이웃이란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느낌을 이렇게 알려왔다. “‘페기다(반이슬람 정치조직) 괴물’이나 그보다 더 나쁜 것을 상상했죠. 대신 그 자리에는 마음씨 좋고 따뜻하며 유머러스한 여성이 자전거를 끌고 언덕으로 올라왔습니다. (…) 우리는 비슷한 관점으로 세계를 보고 설명할 수 있었습니다.”

불편하고 달라도 만나고 대화해야
“대화가 갈등의 황금열쇠 아니지만
대화 없인 어떤 문제도 해결 못해”

이런 만남과 대화는 ‘어떻게’가 핵심이다. 종편 등에서 늘 나오는 ‘배틀’만이 토론이 아니다. 상대를 논리와 말솜씨로 제압하는 토론이 필요한 곳도 있지만, 이는 대화의 일부일 뿐이다. 이진순 재단법인 와글 대표는 “우리는 오도된 소통 구조 속에 있다. 소통을 승자와 패자의 구도로 본다”며 이겨야 하는 대화가 아니라 서로 경청하고 배려하는 대화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실제 서로를 존중하고 경청하는 대화를 해본 이들은 서로가 ‘울림판’이 되어 생각이 넓어지고 고양되는 경험을 했다고 증언한다. 이런 방식의 대화를 확장해 연금개혁이나 저출산 대책 같은 정치·사회적 의제를 두고 공감과 합의를 만들어가는 토의도 가능할 것이다. 최재천이 제안하는 ‘숙론’, 즉 “누가 옳은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이 옳은가를 함께 찾아가는 과정”도 이런 토론일 것이다.

정치가 끊임없이 적대와 증오의 독기를 발산하는데 시민이 변하면 된다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정치인이 먼저 달라져야 하는 게 맞다. 그런데도 정치와 사회를 개선하는 시민들의 역량과 역할도 분명히 존재한다. 박상훈은 “다름과 차이가 의심과 증오, 적대를 낳게 할지, 아니면 좀 더 다양하고 풍요로운 의견이 넘치는 다원 사회를 만들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며 “달라도 안전할 수 있고, 느려도 길을 잃지 않으며, 침착하고 다정해도 뒤처진 느낌이 들게 하지 않는 민주주의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고 말한다.

더 많은 만남과 대화가 불신과 적대, 혐오를 이길 수 있다. 불편해도 생각이 달라도 만나서 ‘공동의 언어’를 넓혀가는 대화가 절실하다.

이봉현 한겨레경제사회연구원장 bh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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