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복 두려워 스토킹 신고 못하는 피해자들… ‘교제폭력’ 방지법은 국회 통과 못해

최정석 기자 2024. 5. 16. 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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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활 잘 아는 전 연인 스토킹, 신고 어려워”
신고 후 보복성 피해 입는 경우도 부지기수
“교제폭력 법적 정의부터 내려야 입법 수월”
일러스트=정다운

스토킹 피해자인 20대 여성 박모씨는 지난 14일 기자와 만나 “(가해자를 신고하려고) 경찰에 전화했다 곧바로 끊은 적도 몇 번 있어요. 너 죽고 나 죽자 하면서 보복할 수도 있잖아요”라고 말했다.

박씨는 약 1년 동안 전(前) 남자친구에게 스토킹을 당하고 있다고 했다. 작년 말에 헤어지자고 했더니 전 남자친구가 문자 메시지, 카카오톡과 전화로 계속 연락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씨가 수신 차단을 해도 전 남자친구는 다른 사람 휴대폰을 빌리거나 새 휴대폰을 만들어 계속 연락을 해왔다.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전 남자친구는 한밤중 박씨의 자취방으로 찾아와 “만나서 얘기하자”며 문을 두드리기까지 했다. 결국 박씨는 자취방에서 나와 본가에서 부모님과 지내고 있다.

그런데도 박씨가 전 남자친구를 스토킹 혐의로 신고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보복이 두렵기 때문이다. 박씨는 “가끔 죽는 게 차라리 편하겠다 싶어요”라며 “가해자를 확실하게 격리할 수 있게 하는 법이 있으면 좋겠어요”라고 말했다.

스토킹 처벌법과 스토킹 방지법이 가해자 처벌 수위와 피해자 보호 조치를 강화했지만 일부 피해자들은 여전히 신고를 꺼리고 있다. 지속적인 스토킹 끝에 상대방을 때리거나 살해하는 ‘교제폭력’으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할 법적 수단이 없는 탓이다. 지난 19대 국회부터 지금껏 교제폭력 관련법만 10여 건이 발의됐으나 한 건도 통과되지 못했다.

스토킹 신고 건수가 매년 늘고 있기는 하다. 스토킹 관련 112 신고 건수는 2020년 4513건이었는데, 스토킹처벌법이 처음 시행된 2021년에는 1만4509건으로 증가했다. 이후 2022년 2만9565건, 2023년 3만1824건을 기록했다. 그러나 신고 건수보다 실제 스토킹 피해자 규모가 훨씬 클 것이란 지적이 나온다.

서혜진 더라이트하우스 법률사무소 변호사는 “연인이나 부부 관계에 있다 헤어진 뒤 한쪽에서 스토킹을 하면 피해자가 경찰이 아닌 법률사무소를 먼저 찾는 경우가 상당히 많다”며 “자신의 생활반경, 하루 일과, 거주지 등을 스토킹 가해자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보복에 대한 두려움이 큰 것”이라고 말했다.

법원의 접근금지 명령을 어기고 옛 연인을 찾아가 흉기로 살해한 30대 스토킹범 A씨가 지난해 7월 오전 인천 논현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뉴스1

스토킹 피해자가 가해자를 경찰에 신고했다가 보복당하는 사건은 흔하다. 지난달 한 20대 여성이 전 남자친구의 스토킹, 상습폭행 끝에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여성은 사망 전까지 1년간 12번에 걸쳐 전 남자친구를 경찰에 신고했다. 또 지난해 7월에는 한 30대 남성이 전 여자친구를 한 달간 스토킹한 끝에 흉기로 살해했다. 남성은 진작에 피해자로부터 경찰 신고를 당해 법원의 접근금지 잠정조치까지 받은 상태였다.

한민경 경찰대학 교수는 “살인이나 살인 미수로 이어진 스토킹 범죄는 대부분 최초 스토킹 범죄 시작 후 한 달 내 발생했다”며 “경찰 신고 직후 피해자 보호를 더욱 강화해야 한다”고 말했다. 스토킹 행위뿐만 아니라 그 이후 발생할 수 있는 보복성 강력 범죄로부터 피해자를 보호할 법적 수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교제폭력을 방지할 법률이 계속 발의는 되고 있지만 국회 문턱을 넘지 못하고 있다. 교제폭력 가해자를 피해자 주거지로부터 퇴거시키거나 유치장 혹은 구치소에 임시로 가두는 조치, 피해자를 향한 접근과 연락을 금지하는 조치 등을 도입하려는 법안들이 지난 19대 국회부터 10여 건 발의됐다.

전문가들은 교제폭력을 법적으로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에 대한 논의를 우선 끝마쳐야 입법이 수월해질 것이라 말했다. 서 변호사는 “교제폭력이라는 용어 자체가 기존 법률에 존재하지 않는다”며 “교제폭력이란 단어의 법적 정의를 내리는 단계에서부터 성숙한 논의가 필요한데 지금껏 그런 과정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피해자를 어떻게 보호하고, 어느 단계서부터 공권력이 개입할지 설정하는 건 다음 문제”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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