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서가 된 스웨덴 성교육책... 우수도서는 어떻게 '유해물'이 됐나

손효숙 2024. 5. 16. 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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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윤위, '일단, 성교육을 합니다' 유해물 판정
스웨덴 성교육 전문가 저서...15국 출간 호평
각계서 "시대착오적 성인식" 비난 목소리 
"디지털시대, 국제 수준 포괄적 성지식 필요"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간행물윤리위원회(간윤위)가 스웨덴 성교육 전문가가 쓴 책 '일단, 성교육을 합니다'를 '청소년유해간행물'로 심의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지면서 각계에서 우려와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스웨덴 정부가 공인한 성교육 전문가의 저서인 데다 15개국에 번역돼 성교육 교재로 쓰이는 책에 대한 난데없는 금서 지정을 두고 지적 자유에 대한 심각한 침해일 뿐 아니라 성에 대한 협소한 이해와 편견을 일으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15일 한국일보 취재를 종합하면 간윤위는 일부 시민단체가 '음란·유해도서'라고 주장한 성교육 도서 68권에 대한 심의를 진행한 결과 67권에 대해 "유해도서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의결하면서 '일단, 성교육을 합니다'에 대해서만 청소년유해간행물로 결론 내렸다. 현재 책은 '19세 미만 구독불가' 표시가 붙어 청소년에게 판매 금지된 상태다.


간행물윤리위 "삽화, 문구 등 청소년보호법 위반"

간행물윤리위원회가 지적한 그림 일부(책 '일단, 성교육을 합니다' 중 22쪽). 문예출판사 제공

심의결정문에 따르면 간윤위는 책의 문구 및 삽화를 발췌하면서 해당 부분이 출판문화산업진흥법와 청소년보호법을 위반했다고 판단했다. 출판문화산업진흥법에 따라 책의 내용이 청소년보호법 제9조 1항의 어느 하나라도 해당되면 청소년유해간행물로 결정할 수 있는데 적시한 내용이 이용 청소년 연령, 매체의 특성과 이용 시간을 감안해 '유해성'이 상당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다만 유해성에 대한 구체적인 판단 근거는 적시하지 않았다.

간윤위가 유해성이 있다며 문제시한 부분은 70여 개다. "음경이 꼿꼿하게 일어서고, 단단해지고, 뜨거워지고, 아마 평소보다 약간 붉은색을 띨 겁니다. 이것을 '발기'라고 해요. 흔히 '섰다'라고 하는 상태죠"(20쪽), "다만, 취향을 저격하는 포르노를 발견하면 자위를 좀 더 즐길 수 있지요. 포르노는 위험 부담 없는 섹스와 비슷한 데가 있습니다"(51쪽), "상대의 의사와 상관없이 성기 사진을 보내는 것은 타인의 경계를 침범하는 행위, 다시 말해 상대를 존중하지 않는 행위입니다"(227쪽), "헤테로섹슈얼, 바이섹슈얼, 호모섹슈얼, 게이, 레즈비언, 에이섹슈얼, 퀴어 등의 어휘 설명"(176쪽) 등 대부분 남녀의 성기와 성행위, 동성애 등 성 지식을 사실적으로 설명한 대목이다. 앞서 간윤위에 심의를 제기한 단체는 이 책을 포함한 68권에 대해 "성기와 성행위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부분이 성적 호기심과 충동을 자극"하며, 동성애를 다룬 부분에 대해서는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성 정체성 혼란과 가족 개념을 무너뜨린다"고 주장한 바 있다.


"맥락 무시한 채 근거 없는 '선정성' 잣대만"

책 '일단, 성교육을 합니다'의 표지. '소년부터 성년까지 남자가 꼭 알아야 할 성 A to Z'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문예출판사 제공

한국에서 2020년 출간된 책은 그간 보수 언론을 비롯한 일간지에 성교육 추천 도서로 소개됐다. 실제 해당 도서의 저자는 성교육 전문가 차베즈 페레즈로, 스웨덴 정부가 임명한 성평등 전문가다. 기본적인 성 지식부터 올바른 성 가치관과 성평등 지식까지 아우르며 스웨덴에서 최우수 청소년 도서상을 수상한 데다 15개국에서 출간돼 호평을 받았다. 한국에서 이 책을 낸 문예출판사는 당혹스러운 기색이 역력하다. 문예출판사 관계자는 "스웨덴 정서에 기반한 책의 표현이 한국 정서보다 수위가 높을 수는 있지만 갑자기 '유해물'로 규정된 것은 황당하다"며 "'청소년에게 필요한 지식인지 유해한 지식인지를 판단하는 근거가 무엇인지 납득할 수 없다"고 말했다.

출판사 측은 간윤위에서 문제시한 사실적인 묘사 역시 국제적 성교육 규범에 비추어 문제가 없다고 보고 있다. 책의 감수를 맡은 노하연 성문화연구소 라라 대표는 "챕터별로 성기와 성욕 등 남자의 몸과 마음을 제대로 아는 것에서 출발해서 여자와 평등한 섹스를 하기 위한 조언, 수치심 같은 감정, 성전파 질환과 임신에 대한 올바른 이해 등을 알려주는 책"이라며 "책에서 다룬 내용은 성적 판타지를 심어 주거나 과장된 표현이 아닌 사실에 기반한 정보 제공 수준이며 포괄적 성교육 규범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포괄적 성교육'은 유네스코(UNESCO)가 2018년 개정 발표한 '국제 성교육 가이드'에서 권고한 교육 과정으로 생물학적 성 뿐만 아니라 젠더 정체성, 성소수자 존중, 피임법 등 다양한 주제를 구체적으로 다룬다.

현장에서 청소년들을 직접 만나는 성교육 전문가들도 비판의 목소리를 보태고 있다. 김지학 한국다양성연구소 소장은 "디지털 미디어 시대에 접어들며 성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청소년들의 성적 안정과 건강을 보장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며 "오히려 청소년들이 부적절한 정보에 노출되기 전에 정확하고 객관적인, 평등과 안전에 입각한 정보를 전달할 필요성이 커진 상황에서 이번 유해물 판단은 시대착오적"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해당 출판사와 출판 단체는 이번 간윤위 결정에 대한 공동 대응을 할 방침이다. 문예출판사는 16일 간윤위에 재심의 요청서를 제출한다. 최대 출판단체인 대한출판협회도 앞서 유해도서 지정에 대한 비판 성명을 낸 데 이어 심의 결과에 따른 추가 대응을 예고했다.

손효숙 기자 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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