中企기준 9년째 그대로… 자재 값 올라 ‘강제졸업’ 하는 기업들

오승준 기자 2024. 5. 16.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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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기업’ 승격땐 中企지원 못받아
성장 꺼리는 ‘피터팬 증후군’도
전봇대 등에 사용되는 전력선을 제조하는 경기 지역 H기업은 최근 미국으로의 수출 제의를 받았지만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다. 수출로 매출이 늘면 중소기업 기준인 매출 1500억 원을 넘어 중견기업이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 경우 금리가 현재의 2배까지 오르고 조달청 입찰에 컨소시엄을 꾸려 참가할 수 없게 된다. H기업 대표는 “핵심 원자재인 구리 가격이 올해만 30% 이상 올라 만들수록 손해인 제품이 많다”며 “영업이익률이 급감한 상황에 중소기업 지원마저 없으면 경영 자체가 휘청일 수 있어 미국 수출문이 열렸는데 기뻐할 수가 없다”고 토로했다.

최근 원자재 가격 상승 등으로 매출은 커지는 반면 영업이익률은 감소하는 중소기업들의 시름이 커지고 있다. 중소기업 매출액 기준을 넘으면 중견기업으로 승격해 각종 지원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중소기업 기준은 2015년부터 9년째 그대로다. 고정된 매출액을 토대로 중소기업을 구분하는 현행 제도가 오히려 중견기업으로의 성장을 꺼리는 ‘피터팬 증후군’을 부추긴다는 지적이 나온다.

15일 전선조합에 따르면 조합 소속 기업 60곳 중 40%가 넘는 25곳이 원자재값과 납품단가 상승에 따라 매출이 1500억 원에 근접해 중견기업으로 분류될 상황이다.

법적 기준만 충족하면 무조건 지원하는 방식 자체를 바꿔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임채운 서강대 경영학과 명예교수는 “각 기업에 대한 보편 지원보다는 성장 가능성, 업종, 업력 등에 초점을 두고 선별 지원해 한계기업이 정부 지원으로 연명하는 일은 막아야 한다”고 말했다.

“中企지원 끊기면 경영난… 매출 1500억 안넘기려 OEM 위주로”

자재 값 올라 中企 ‘강제졸업’
수출 제의 와도 중견기업 될라 주저
법인 쪼개기 편법 동원이 현실
“스스로 성장하도록 지원 틀 바꿔야”

TV와 자동차 부품으로 활용되는 코일과 전선을 생산하는 충북의 한 기업은 몇 년째 매출이 1500억 원에 미치지 못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연구개발을 거쳐 제품을 직접 생산, 판매하기보다 대기업 주문대로 생산만 하는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 위주로 매출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업 대표는 “자체 개발 제품을 생산하는 쪽이 기업에도 이득이지만 지금 같은 고금리, 고환율, 고물가 상황에 매출 기준을 섣불리 넘겼다가 중소기업 지원이 끊기면 당장 경영이 어려워져 어쩔 수 없이 OEM 위주로 생산한다”고 말했다.

금속과 플라스틱 등 원자재 값이 급등한 다른 기업들도 비슷한 고충을 호소한다. 지방에서 기계 관련 사업장을 운영하는 최모 씨는 “10년 전과 비교해보면 재료비가 2, 3배 오르고 여러 구매 비용이 많이 상승했는데 중소기업 기준은 그대로”라며 “‘법인 쪼개기’ 같은 수단을 동원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말했다.

최근 중소기업계에서 2015년 이후 9년째 그대로인 중소기업 범위 기준을 변경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중소기업계에서 이 같은 목소리를 내는 이유는 원자재 값 급등 때문이다. 중소기업중앙회에 따르면 중소기업 기준이 매출액으로 처음 정해진 2015년 이후 지난해까지 생산자물가는 20.7% 상승했다. 특히 금속 제조업의 주요 원자재인 철광석은 2015년부터 올해 초까지 73.5%, 플라스틱의 주원료인 폴리에틸렌은 27.4% 올랐다.

중소기업 기준은 원칙적으로 5년마다 기준을 변경해야 하지만, 중소벤처기업부는 “중소기업 비중에 큰 변화가 없다”며 기준을 유지하기로 2018년 결정했다. 중소기업 관계자는 “최근 몇 년 새 원자재 값이 크게 뛰었는데 납품단가는 원자재 값만큼 올릴 수가 없다”며 “경영은 어려워졌는데 오히려 중소기업 지원은 받지 못하게 되는 셈”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많은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전환되면서 제조업 기업 중 중소기업 비중도 줄어들고 있다. 10인 이상 사업장을 기준으로 전체 제조업 기업 중 중소기업 비중은 96.9%로 2015년 대비 1%포인트 줄었고, 종사자(―4.4%포인트)와 생산액(―4.1%포인트) 모두 감소했다.

중소기업과 달리 중견기업이 대기업집단으로 분류되는 기준은 국내총생산(GDP)과 연동된다. 2015년 자산 5조 원 이하였던 중견기업 기준은 올해 기준 자산 10조4000억 원으로 2배 이상으로 높아졌다. 한국 경제가 성장한 만큼 기준도 높아진 것이다. 중기중앙회 관계자는 “경제성장률이나 물가 등에 연동하는 근본적 개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중기부는 현재 내년 6월까지 기준 개편을 목표로 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방향은 결정되지 않았다.

중소기업 지원제도 자체를 다시 점검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박상문 강원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준 하나로 중소기업을 구분하면 기업은 성장하지 않으려 할 것”이라며 “중소기업들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도록 자생력, 성장성 있는 기업을 선별 지원하는 등 지원의 틀을 바꿔야 한다”고 지적했다.

오승준 기자 ohmygod@donga.com
정서영 기자 cero@donga.com
송진호 기자 jin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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