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마술사' 사전트와 패션이 만났을 때[통신One]

조아현 통신원 2024. 5. 15. 20: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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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도, 소품, 옷 질감까지 계산된 초상화…뛰어난 연출가적 면모
7월 7일까지 英 런던 테이트 브리튼 기획 전시
존 싱어 사전트가 1889년부터 1890년까지 그려 완성한 17세 소녀 엘시 팔머양의 초상화. 팔머양은 흰색 고급 새틴으로 된 티 가운(tea gown)을 입고 있다. 19세기 중후반과 20세기 초에 유행한 티 가운은 여성들이 손님을 집에서 맞이하거나 애프터눈 티를 즐길 때 다소 헐렁한 핏으로 입던 옷이다. 아래로 길게 늘어뜨린 옅은 라벤더 숄은 사전트의 의도에 따라 배치된 구성이다. 해당 작품은 이번 ‘사전트와 패션(Sargent and Fashion)’ 기획 전시의 메인 홍보 작품 가운데 하나다.

(런던=뉴스1) 조아현 통신원 = 1800년대 사교계 파티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드레스를 입은 여인들이 서로 팔짱을 끼고 한 손에는 부채를 들고 걸어간다.

얼핏 보면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에 나오는 여주인공 엘리자베스와 언니 제인을 닮은 것 같기도 하다.

멀리서도 시선을 사로잡는 핫핑크색 바지와 색깔을 맞춘 듯한 연한 분홍에 회색이 섞인 높은 굽의 빈티지 워커부츠. 그 위에 오버핏의 회색 재킷과 드롭형 앤틱 귀걸이를 매치한 중년 남성이 우아한 걸음걸이로 걸어간다.

연갈색과 올리브색이 섞여 있는 체크무늬 코트와 동그란 안경으로 세련미를 살린 젊은 남성.

그 옆에는 진한 스칼렛 레드 코트를 매치한 덕에 고동색 단발과 기품 있는 용모가 돋보이는 여성도 앉아 있다.

수많은 관람객들 사이에서 예상치 못한 19세기 풍 의상을 입은 여인들과 간간이 반짝이는 패셔니스타들 덕분에 눈이 즐겁다.

영국 런던에 있는 미술관인 테이트 브리튼에서는 화가 존 싱어 사전트(1856~1925)와 패션(Sargent and Fashion)을 주제로 한 기획 전시가 한창이다.

이번 전시는 화려한 작품 라인업에도 불구하고 저명한 영국의 미술평론가로부터 잔인할 정도의 혹평을 받았다. 전시 구성이나 작품 배치의 부조화가 주된 이유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시를 보러오는 관람객들은 국적을 불문하고 주말마다 문전성시를 이룬다.

특히 사람들이 몰리는 오후 시간에는 붐비는 관람객 틈에 끼어서 눈치를 봐가며 작품을 감상해야 할 정도다.

영국 런던 테이트브리튼에서 진행 중인 ‘사전트와 패션’ 기획 전시에 관람객이 북적이고 있다. 2024.05.14/ ⓒ 뉴스1 조아현 통신원

1800년대 중후반 유럽과 미국을 오가면서 명성을 쌓았던 사전트는 대중의 손가락질과 비난, 찬사, 흠모, 사랑을 모두 받았다.

그는 우리에게 초상화가로 잘 알려져 있지만 풍경화나 자신과 가까웠던 우인, 가족뿐 아니라 서민들을 소재로 한 작품도 다수 남겼다.

또한 자신의 영역을 넓혀 공공 도서관과 미술관의 벽화 프로젝트, 전쟁 예술가로도 활동하면서 말년까지 기량을 아낌없이 퍼부었다.

그는 평생 결혼도 하지 않았고 슬하에 자식도 남기지 않았다. 후원자이면서도 우인이었던 시빌 사순이나 클로드 모네, 오귀스트 로댕 등 가까운 친구들 외에는 친밀한 관계를 맺은 사람도 드물었다.

사전트가 약 140년 전에 그렸던 60여 점의 초상화 작품과 작품 속 인물들이 입었던 실제 드레스를 나란히 눈 앞에서 볼 수 있다면 어떨까.

사전트가 모델을 쳐다보고 다시 캔버스에 붓칠을 하면서 스튜디오 한 편에 틀어 놓았던 음악이 그의 화폭을 감상하는 오늘 내 귓가에 들린다면 어떤 기분일까.

템스강변에 자리잡은 테이트 브리튼의 기획 전시장에 입장하면 선명한 붓칠 흔적만 남은 사전트의 그림과 그림 속 모델이 입었던 드레스 실물을 직접 볼 수 있다.

사전트가 스튜디오에서 그림을 그리면서 즐겨 들었다던 곡들도 휴대폰으로 QR 코드를 찍으면 음원 플랫폼 스포티파이(Spotify)와 연결돼 플레이리스트로 재생이 가능하다.

그의 매혹적인 작품과 그림 속 모델이 실제로 입었던 의상, 화가가 사랑했던 음악이 한 군데 어우러지면 마치 1800년대 사전트가 있는 스튜디오와 내가 서 있는 테이트 브리튼의 전시 공간이 종이 한 장의 중간 접선을 경계로 겹치는 듯한 오묘한 느낌이 들 정도다.

'사전트와 패션' 기획 전시의 매력이 여기에 있다.

영국 미술평론가 조너선 존스는 이번 전시를 다녀간 뒤 별점 5개 가운데 1개만 줄 정도로 혹평 했지만 관람객들의 발길은 더욱 북적인다.

사실 사전트에게는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서의 면모가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지나칠 정도로 까다롭게 모델이 입을 의상을 선택했고 디자인과 소재를 활용해 작품을 더욱 극적으로 표현할 줄 아는 자질도 뛰어났다.

패션을 모델의 정체성과 개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강력한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그는 남성 모델의 몸매를 강조하기 위해 무거운 코트를 꽉 잡아당겨 묶거나 여성 모델의 어깨에서 드레스 끈을 일부러 흘러내리게 만들기도 했다.

후자의 경우 프랑스 살롱을 뒤흔들었던 작품 '마담X'에서 그의 극적인 연출을 확인할 수 있다.

사전트는 작품을 그릴 때 연출과 스타일링에 심혈을 기울였다. 모델이 입고 온 의상을 그대로 그리기보다 소재와 액세서리를 활용해 작품의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했다.

의상을 고정하고 접어서 새로운 모양과 질감을 만들어내는가 하면 실제로는 눈에 잘 띄지 않는 안감에 빛의 효과를 넣어 관객들의 시선을 사로잡도록 줄무늬로 표현하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사전트의 세심함과 연출력, 많은 이들이 흠모했던 그의 색채 표현, 찰나의 빛에서 나오는 아름다움을 포착하는 역량을 엿볼 수 있다.

어쩌면 전 세계의 상류층 고객들이 어째서 사전트에게 앞다퉈 자신의 초상화를 의뢰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될 기회일지도 모른다.

관람객들은 파리 살롱전 논란으로 유명해진 대표 작품 '마담 X', 사전트가 2년에 걸쳐 집념으로 완성한 뒤 영국 왕립 아카데미에서 처음으로 찬사를 받은 '카네이션, 백합, 백합, 장미', 가장 큰 성공을 가져다 준 '라크노의 애그뉴 부인' 초상화 등을 이번 전시에서 감상할 수 있다.

1884년 프랑스 살롱에서 논란의 정점이 된 이후 사전트를 비난과 궁지로 몰아넣었던 작품 ‘마담X’는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으나 이번에 20년 만에 영국으로 돌아와 ‘사전트와 패션’ 전시장에 걸렸다.

프랑스 파리 오르세 미술관이 소장한 사전트의 작품 '카르멘시타(La Carmencita)'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 1890년대 미국과 영국에서 큰 인기를 누린 스페인 무용수 카르멘시타가 초상화 속에서 착용했던 의상으로 추정되는 화려한 노란빛 드레스도 공개돼 있다.

이번 ‘사전트와 패션’ 기획 전시는 영국 런던 테이트 브리튼과 미국 메사추세스주 보스턴미술관의 공동 기획으로 진행됐다. 지난해 10월부터 올해 1월까지 보스턴미술관에서 관람객을 맞이한 이후 올해 2월 말 영국 테이트 브리튼으로 옮겨왔다.

사전트가 1890년에 그린 스페인 무용수 카르멘시타의 초상화. 카르멘시타는 당시 미국, 유럽, 남미 전역에서 광범위하게 활동한 무용수였고 사전트 역시 매우 존경해 그의 공연을 여러 차례 찾았다. 오른쪽 의상은 1890년 당시 카르멘시타의 의상으로 제작된 새틴 실크 드레스. 짧은 종 모양의 풍성한 치마와 볼레로 재킷, 비즈 장식이 특징인데 카르멘시타가 다른 그림이나 삽화, 영화에서 등장할 때 입었던 옷과도 유사하다. 사전트는 이 드레스를 보관하고 있다가 친구였던 시빌 사순에게 선물로 보냈다. 사순은 이후 드레스를 소장해 왔다. 2024.05.14/ ⓒ 뉴스1 조아현 통신원

tigeraugen.ch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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