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삶]비지의 열 번째 뜻

기자 2024. 5. 15. 2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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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바쁜 사람이 멋져 보였다. 그런 사람들은 TV에 자주 나왔는데, 목소리나 손동작에도 당당함이 묻어 있었다. 정장을 입은 채 출근하고 회의하고 종일 바쁘게 일하면서도 엷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퇴근길 손에 들린 서류가방엔 비밀문서가 들어 있을 것 같았다.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을 때조차 멋져 보였다. 영웅은 위기를 극복하며 더 강해지는 법이니까. 바쁜데도 여유를 잃지 않고 철두철미하게 일을 처리하는 그 모습을 닮고 싶었다.

저 때를 떠올리면 아득하다. 직장을 퇴사한 지 어느덧 8년이 되었고 정장을 입고 외출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서류가방을 드는 대신 에코백을 메는 일이 많고 고민이 깊어지면 머리를 쥐어뜯는다. 어찌어찌하여 바쁜 사람이 되었지만, 여유는 없고 결정적인 순간에 덤벙대기 일쑤다. 호기롭게 걷다가 얼음판 위에서 보기 좋게 미끄러지는 사람처럼 말이다. 삶의 많은 부분에서 철두철미보다는 용두사미에 가까워졌다.

며칠 전, 지하철 역사에서 한 외국인이 물었다. “아 유 비지?” 손에 들려 있는 전단을 보고 포교 목적임을 직감했다. “예스, 아이 엠.” 그는 거절당하는 데 익숙해 보였고 나 또한 실제로 바빴으니 양심에 찔리지는 않았지만, 집에 오는 길에 저 말이 자꾸 떠올랐다. “아 유 비지?” 그 전단의 내용이 미아 찾기, 난민 구제 등 혹시 다른 것을 가리키지는 않았을까. 바쁠 때는 정작 눈앞의 풍경을 제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회하는가? 나는 속으로 묻고 답한다. “예스, 아이 엠.”

집에 와서 괜히 ‘비지(busy)’의 뜻을 찾아보았다. 바쁜, 열심인, 붐비는, 통화 중인, 너무 복잡한…. 여유라고는 느껴지지 않는 단어다. 내친김에 국어사전을 펼쳐 무수한 비지들에 도착했다. 예상한 대로 비지가 가리키는 첫 번째 단어는 “두부를 만들고 남은 찌꺼기”였다. 비지가 가리키는 단어는 총 열한 개였는데, 그것은 광업, 법률, 불교, 매체 등에서 두루 쓰였다. 비석에 새긴 글을 비문 대신 비지(碑誌)라고도 한다는 사실, 고을이나 국경의 경계선이 고르지 못하고 들쭉날쭉할 때 그것을 비지(比地)라 일컫는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비지를 찾는 여유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하루의 피로가 조금 풀리는 것도 같았다.

여유가 없을 때면 뭘 자꾸 놓치고 있는 게 아닌지 염려된다. 새 소식이나 기념일이 아니라 일상의 신비나 가까운 사람의 안부 같은 것 말이다. 생각은 생각을 낳고 가뜩이나 여유가 없는데도 잠잘 여유마저 스스로 포기하고 만다. 여유가 없을수록 밤이 길어지는 이유다. 일이 많아서 길어지고, 이 많은 일을 대체 언제 다 하나 고민해서 더 길어진다. 낮의 시간을 반추하는 데 쓸데없이 많은 시간을 할애하기도 한다. 아까 전화할 때 내 목소리가 너무 딱딱하지는 않았을까, 못한다고 말했어야 할 일을 선뜻 수락한 건 아닐까, 메일에 성의 없이 답한 건 아닐까, 봄에 보기로 한 친구에게 왜 오늘도 연락하지 못했을까….

비지가 가리키는 아홉 번째 단어를 보고 기분이 누그러졌다. “보잘것없는 곳이라는 뜻으로, 자기가 사는 곳을 낮추어 이르는 말”이 바로 비지(鄙地)였다. 여기가 비루하고 속된 곳임을 인정하고 나니, 새들한 것 하나하나에 집착하는 게 사치처럼 느껴졌다. 새들한 것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든 것은 열 번째 비지였다. 비지의 열 번째 뜻은 “코를 풀거나 닦는 데에 사용하는 종이”인 비지(鼻紙)였다. 그냥 휴지라고 해도 될 텐데, 비지라고 하면 그 휴지로 꼭 코를 풀어야만 할 것 같았다. 비지의 비슷한 말로 ‘코지’가 있다는 설명을 읽고 나서는 입가에 넌지시 미소가 번졌다.

작은 사물과 자디잔 감정에 이름을 붙여주는 것이야말로 바빠도, 아니 바쁠수록 해야 하는 일이다.

비지의 열 번째 뜻이 휴지를 구체화하는 것처럼, 여유 속에서 나는 분명해진다.

오은 시인

오은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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