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를]황희정승맹사성과학장영실

기자 2024. 5. 15.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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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하얗고 큰 개들의 이름은 장군이나 백호인 것에 반해, 우리집 개의 이름은 ‘나비’입니다. 중학생이던 나비의 작은누나가 지었는데, 이름만 듣고 섣불리 고양이를 상상하는 사람들을 놀려주겠다는 심산이었습니다. 얼핏 무서울 수도 있는 외모인데, 이름 덕에 사람들의 경계가 조금 누그러지기도 하고, 이름 덕에 저렇게 착한 순둥이가 되었나 생각이 들어 작명센스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김춘수님의 ‘꽃’,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라는 구절은 이름의 상징성과 존재의 본질을 이야기한다고 배웠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이름을 가짐으로써 그 본질로 인식된다는 뜻입니다.

재미있어서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는 드라마 <지배종>에는 ‘장영실’이란 이름의 AI가 등장합니다. <아이언맨> 시리즈의 ‘자비스’ 혹은 휴대전화 속 ‘시리’와 같은 존재인데, 허구이지만 그 능력이 출중하여 부럽기도 하고, 가까운 미래에 기어이 현실이 될 것이므로 편리한 인공지능의 출시가 기대되기도 합니다. 주인공들은 “영실아, 차 대기시켜줘” “영실아 검색해줘” 이름을 불러 명령합니다. 조선 최고 과학기술인의 이름이 AI에게 제격이긴 하나, 못내 불편했습니다. ‘프로불편러’가 되지 않으려 자중하고, 낡은 생각일까 참기도 해보았지만, 한 주인공이 “영실이, 꺼져” 하는 장면은 마음에 남아 까슬거립니다. 해군에서 사용할 목적으로 개발된 AI에게 이순신이란 이름을 붙이고 모두가 “순신아, 순신아” 부르는 장면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나요? 국립국어원에서 개발한 AI에게 세종이란 이름을 붙이고 모두가 “세종아, 세종아” 명령하는 장면은 어떤가요?

장영실은 천한 신분인 관기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탁월한 재주를 인정받아 태종에 의해 등용되고, 세종 대에 간의, 자격궁루, 앙부일구 등을 제작하여, 종3품 대호군에 올랐습니다. 존경받아 마땅한 과학기술인이지만, 장영실에 관한 문헌은 찾아보기 힘듭니다. 생몰연도조차 정확하지 않습니다. 양반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사농공상의 신분체계는 기술인을 홀대했기 때문입니다. 많은 어린이들이 과학자를 장래희망으로 꼽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한국은 1960년대부터 대대적으로 과학기술에 투자했고, 이를 통해 산업화와 경제발전을 이루었다.”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조지 헬무트의 평가입니다. 과학자를 존경하고, 기술자를 우대하던 그 시절에 힘입어, 우리는 반도체를 개발하고, 선박을 짓고, 자동차를 만들었습니다.

많은 어린이들의 장래희망이 과학자에서 건물주로 옮아간 요즘입니다. 정부는 과학자들을 뿌리 뽑아야 할 카르텔로 내몰았고, 역사상 처음으로 연구·개발(R&D) 예산을 삭감하였습니다. 그 결과 젊은 과학자들은 일자리를 잃고 한국을 떠납니다. 정부와 사회가 과학자와 기술자를 홀대하니 수험생들은 모두 의대로 몰려갑니다.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우리의 삶이 나아졌다면, 우리 다음 세대의 더 나은 삶을 담보할 수 있는 방법 또한 그 길이 유일합니다. 진돗개 혈통의 무섭고 덩치 큰 개도 사랑을 담뿍 담아 나비라고 부르면, 천진난만 순둥이로 자라납니다. 과학을 숭상하여 감히 “영실아”하고 부르기엔 멋쩍은 사회라면 더욱 좋겠습니다.

김재윤 우리동물병원생명사회적협동조합 대표원장

김재윤 우리동물병원생명사회적협동조합 대표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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