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의지 “비뚤어지지 않고 야구 열심히 하길 참 잘했다”[KBO 빅5가, 19살 나에게]

심진용 기자 2024. 5. 15. 20:17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두산 양의지가 지난 7일 고척 키움전에서 포수 역대 3번째로 통산 250홈런을 때린 뒤 그라운드를 돌고 있다. 두산 베어스 제공



‘어른’이 되기 전의 마지막, 열아홉의 추억은 누구에게나 있다. 많은 프로야구 선수들에게도 만 열아홉살은 학교 야구의 울타리를 넘어 프로 무대에 입단, 사회에 발을 내딛는 출발선이다.

스포츠경향은 창간 19주년을 맞아 프로야구 선수들의 19살 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고졸 입단 출신 선수 중 KBO리그를 맨앞에서 끌어가며 역사를 새로 쓰고 있는 최형우(KIA), 류현진(한화), 양현종(KIA), 김광현(SSG), 양의지(두산)에게 물었다. 지명 당시의 기억, 입단 첫해의 추억, 만 19살 그때는 몰랐던 야구인생의 가장 큰 고비, 그리고 19살의 나에게 지금 해주고 싶은 말을 통해 프로야구와 그들의 추억을 함께 나눠본다.

두산 양의지(37)는 2006 신인 드래프트 2차 8라운드, 전체 59순위로 두산에 입단했다. 지금껏 쌓아 올린 경력과 명성을 생각하면 높지 않은 순위. 19세 양의지에 대한 현장의 평가는 본인의 말처럼 “어중간” 했다. 광주 진흥고에서 4번 타자를 했고, 포수 마스크까지 썼지만 프로에서도 통할지 애매하다는 평가가 적지 않았다.

양의지는 내심 3라운드 지명까지 바랐다. 한편으론 아예 지명을 받지 못할 가능성도 생각했다고 했다. 드래프트 당일 오전, 아버지와 함께 자주 다니던 동네 어등산을 다녀왔다. 오후부터는 본격적인 ‘광클’의 시간. 인터넷 중계 홈페이지에 들어가 3라운드 이후부터 수도 없이 ‘새로고침’을 했고, 결국 지명을 확인했다. 양의지는 “크게 떨지는 않았던 것 같다. 정 안되면 대학 가서 계속 야구하면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9세 시절 그 역시 지금처럼 느긋했다.

순번이 낮아 거액의 계약금은 받지 못했다. 월급 160만원을 받으며 야구했다. 적은 돈이지만 엊그제까지만 해도 고등학생이던 양의지에게는 돈을 받고 야구한다는 것 자체가 신기한 경험이었다.

입단 첫 해 양의지는 시즌 내내 2군에 머물렀다. 프로의 훈련량에 우선 놀랐다. 양의지가 프로 초년생이던 시절 두산 2군 배터리 코치가 강인권 현 NC 감독이다. 양의지는 “강 감독님이 오셔서 훈련을 정말 많이 시키셨다”며 “프로에서 살아남으려면 정말 훈련을 많이 해야 하는 구나, 학교 다닐 때처럼 단체훈련 끝났다고 다 끝나는 게 아니구나 하는 걸 그때 딱 느꼈다”고 말했다.

2006년, 19세 시절의 양의지가 타격 자세를 잡고 있다. 두산 베어스 제공



신인 시절부터 명포수 출신 지도자들을 만난 건 축복이었다. 김경문 전 감독이 당시 두산의 사령탑이었고, 김태형 현 롯데 감독이 1군 배터리 코치로 있었다. 포수 출신에 눈썰미 좋은 이들 지도자들이 양의지를 살뜰히 챙겼다. 다만 2군 시절 본의 아니게 오해를 사기도 했다. 특유의 무심한 표정에 ‘8(八)자 걸음’ 때문에 신인답지 않다는 꾸지람을 들었다. 양의지는 “나도 내 걸음걸이가 그런 줄은 몰랐다”면서도 “사람은 겉으로만 판단하면 안된다”고 웃었다. 훈련장에선 누구보다 크게 파이팅을 외쳤다는 게 그의 항변이다.

양의지가 프로에서 꽃을 피운 건 경찰청 복무 이후 2010년부터다. 김경문 당시 두산 감독은 시즌 초반이니 경험이나 쌓게 한다는 의도로 양의지를 개막 엔트리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왠걸, 그전까지 1군 세 경기 출장이 전부였던 신인 양의지가 시즌 세 번째 경기에서 멀티 홈런을 때려냈다. 양의지는 “운이 좋았다”고 했지만, 시즌 내내 운이 이어질 수는 없는 법이다. 그해 양의지는 127경기에 출장해 20홈런을 때리며 역대 세 번째 포수 신인왕에 올랐다.

2010년 이후 양의지는 ‘왕조 두산’의 주전 포수 자리를 놓치지 않았지만, 힘겨웠던 시절이 없지 않았다. 2015년 첫 한국시리즈 우승 이전까지 포스트시즌만 되면 고전했다. 방망이는 침묵했고, 결정적인 실책도 여러 차례 저질렀다. 신인왕을 탄 그해, 생애 첫 가을야구가 그랬다. 롯데와 준플레이오프 첫 두 경기 동안 양의지는 바운드 공 하나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할 만큼 긴장을 많이 했다. 감독은 준플레이오프 3차전부터 바로 베테랑 포수 용덕한을 중용했다. 양의지는 “자존심이 상하면서 한편으로는 경기를 안 나가고 싶기도 했다. 지금이야 잘 하든 못 하든 내가 나가서 승부를 내고 싶지만 그때는 그만큼 긴장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그랬던 양의지가 14년이 지난 지금엔 한국시리즈 MVP만 2차례 따낸 ‘가을의 사나이’가 됐다. 잠깐의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긴긴 세월을 버텨온 결과다.

양의지는 19세 시절 자신을 향해 “뭣도 모르고 프로 와서 비뚤어지지 않고 잘 버텨줬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고 했다. 전체 59순위로 입단한 무명의 포수가 신인왕에 오르며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고, 포스트시즌 부진으로 한순간 좌절도 했다. 어린 나이에 비난의 표적이 되며 한때는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을 느끼기도 했다고 양의지는 털어놨다. 그런 고비들을 잘 이겨냈기에 지금의 양의지가 있다. 양의지는 “돌이켜보면 프로 생활하면서 인복이 많았던 것 같다. 신인 때부터 좋은 감독님들을 많이 만났다”면서 “힘들었던 시절도 있었지만 열심히 야구하면서 잘 버텨온 덕에 지금 자리에서 야구를 할 수 있고, 가족들과 행복하게 살고 있는 것 같다”고 웃었다.

2006년, 19세 시절 양의지가 방망이를 휘두르며 웃고 있다. 두산 베어스 제공



심진용 기자 sim@kyunghyang.com

Copyright © 스포츠경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