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러 400년 국경분쟁에 남은 역사적 ‘앙금’ [푸틴 방중 5대 포인트③]

구자룡 기자 2024. 5. 1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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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러 우호 관계의 기저에는 ‘국경 갈등’ 앙금
서로 어려운 상황일 때 이익 챙긴 과거는 그대로
[모스크바=AP/뉴시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지난 7일(현지시각) 모스크바 크렘린궁에서 열린 취임식을 갖고 있다. 2024.05.15

[서울=뉴시스] 구자룡 기자 = 중국 정부는 지난해 5월 4일 “러시아가 6월 1일부터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사용권을 제공했다”고 발표했다.

청나라 말기 아이훈 조약을 통해 러시아에 넘겨주었던 이곳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165년 만에 사용 권한을 갖게 된 것이다.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 등 동북 도시의 화물을 랴오닝성 잉커우나 다롄을 통하지 않고 바다로 옮겨 시간과 비용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사용권의 역사적 의미

중국에게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이용은 경제적 이익 이상의 역사적 의미가 있다.

중국은 1858년 아이훈 조약으로 항구의 사용권을 넘겨주었고 2년 후에는 베이징 조약으로 연해주 전체를 빼앗겨 동해로의 출로가 막혔다.

중국은 그동안 연해주의 주요 항구를 사용하는 ‘차항출해(借港出海·항구를 빌려 바다로 간다)’를 요구했으나 러시아는 줄곧 거부했다.

러시아가 연해주를 차지한 것은 2차 아편전쟁을 일으킨 영국과 프랑스 등이 베이징까지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가 황실의 후원 원명원을 불태우는 등 청나라를 압박하는 가운데 일어났다.

서양 제국주의 세력앞에 종이호랑이처럼 무기력해지자 러시아의 시베리아 총독은 함포를 실은 군함을 아무르강에 보내 위력을 과시하는 것만으로 대포 한 방 쏘지 않고 2년 간격으로 아이훈 조약과 베이징 조약을 얻어냈다.

지금은 헤이룽장성 헤이허인 접경 도시 아이훈에는 당시의 굴욕적인 조약 체결 장면을 보존하고 있다.

동해로 나가는 길이 막힌 중국은 북한 나진항 사용권을 얻어내기 위해 부심했다. 더욱이 북한의 핵실험으로 인한 제재로 나진항 사용도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블라디보스토크 항구 사용권을 얻어낸 것이다.

중국 러시아 북한 3국이 접경하는 두만강 하구는 동해에서 상류로 15km 가량은 북한과 러시아 두 나라의 접경이다. 중국 동북지방이 두만강을 통한 동해 진출이 15km를 앞두고 막혀 맹지(盲地)가 된 것이다.

중국은 두만강의 자유로운 선박 운행을 통해 동해 접근을 시도했으나 역시 러시아가 허락하지 않았다.

블라디보스토크의 중국어 표기 ‘하이산웨이(海參葳)’는 ‘해변의 작은 어촌’이라는 뜻이지만 러시아로는 ‘동방을 정복하라!’이다.

쑹화강 하류 연해주의 제2 도시 하바로프스크도 중국 동북 지방까지를 포함하는 극동 진출의 전초 기지로 건설된 곳이다. 러시아 지폐에도 이 도시가 소개된다.

중국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도움이 절박한 상황에서 동북에서 역사적 과제의 일부를 해소한 것으로 보인다.

중-러간 국경 갈등은 종식됐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중·러간 협력 관계가 강화되고 있지만 그 이면에는 오랜 역사적 앙금이 자리잡고 있다.

러시아가 연해주 차해출항 등 극동 지역에 대한 중국의 진출에 경계를 하는 것은 이곳이 경제적으로 중국에 압도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극동의 러시아 인구는 600여만 명이지만 동북 3성 중국 인구는 1억 명이 넘는다.

러시아로서는 17세기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막힌 동방 진출 지역을 만회하는 것이기도 했다.

1689년 청나라 강희제 때 맺어진 이 조약은 네르친스크에서 청나라 병사들이 포위한 위압적인 분위기에서 체결됐다. 러시아인들이 개척한 광대한 땅을 내주고 물러나야 했다.

러시아는 2차 대전 말기 일본군과의 전투 등을 위해 동북 지방을 점령해 장제스 정부에서 많은 이권을 확보했다.

얄타협정의 핵심 내용 중에는 동북에서 러시아의 이권을 인정해주는 것이었다.

1950년 1월 모스크바에서 처음 스탈린을 처음 만난 마오쩌둥은 ‘중소 동맹조약’을 맺으면서 국민당 정부가 내준 이권의 대부분을 겨우 되찾았다.

1969년에는 우수리강의 전바오다오(珍寶島·러시아명 다만스키섬)에서 국경전쟁을 벌였다. 중국이 핵무기 사용도 고려할 정도로 심각했다.

극동지방에 러시아인 중에는 인구 불균형이 심한 극동 지방에 중국인과 중국 경제가 밀물처럼 밀려와 중국화하는 ‘황화(黃禍)’ 의식이 있다. 러시아에서 제작된 드라마 중에는 중국인들에 대한 공포를 담은 것들도 있다고 한다.

탈냉전 이후 중-러는 1991년 5월 ‘중·소 국경 동단(東段) 협의’ 등을 통해 2000년대 초에는 국경선 획정에 대한 이견을 해소하고 2004년 국경 분쟁을 매듭지었다.

마찰이 끊이지 않았던 하바로브스크 인근의 아무르강 헤이샤쯔다오(러시아명 볼쇼이 우수리스크)를 두 부분으로 나눠 경계를 정한 것이 상징적이다.

그럼에도 러시아가 1648년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남진이 막힌 것을 약 200년이 지나 일단락됐지만 중국은 청말 어수선한 시기에 내어 준 동북 지역 영토에 대한 앙금은 남아있다.

☞공감언론 뉴시스 kjdragon@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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