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부 간 의대증원, 정부 갈등관리·정책입안 역량 부족 방증"

권지현 2024. 5. 15. 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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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차적 정당성' 두고 이견…"협의 부족" vs "여러 정권서 공론화"
"의사집단, 능동적으로 사회의제·대안 제시할 역량 길러야"
'의대 증원 반대' 항의 팻말 지나는 이주호 부총리 (전주=연합뉴스) 나보배 기자 = 전공의들이 3주 넘게 진료실에 복귀하지 않은 13일, 전북대학교를 방문한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의대 증원에 반발해 팻말을 든 의대 교수들 앞을 지나고 있다. 2024.3.13 warm@yna.co.kr

(서울=연합뉴스) 권지현 기자 = 의과대학 증원을 놓고 의료계와 정부의 갈등이 심화하는 가운데 정부가 증원 과정에서 갈등을 관리하며 정책을 입안하는 역량이 부족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2천명'이라는 증원 숫자의 적정 여부를 떠나 과정이 적정했는지를 따져볼 때 정부가 의사를 포함한 이해당사자의 이견을 조율해 정책적 합의까지 끌어내는 능력이 부족했다는 분석이다.

전문가들은 의대 증원이 정치적으로도, 정책적으로도 풀리지 못하고 사법부 판결을 바라보게 된 것 또한 증원 과정에서 정부가 제 역할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우려했다.

다만, 정부뿐 아니라 의료계와 의사 단체 역시 대내외적 정책적 역량이 부족했다는 평가도 나왔다.

"상호 설득·협의와 학습 빠져…정부 동원 방식 대신 거버넌스 패러다임"

15일 학계 등에 따르면 정부·시장·시민사회 간의 협력을 중심으로 보건복지서비스 생산에 대해 연구하는 강창현 단국대학교 공공정책학과 교수는 "이번 의대 증원 과정에는 진정한 상호 설득·협의 과정이 빠졌다고 본다"며 "과거와 달리 정부가 일방적으로 정책을 던지고 추진하는 '동원 모형'은 현시점에서 가능하지 않다"고 지적했다.

강 교수는 이를 설명하기 위해 '거버넌스 패러다임' 개념을 설명했다. 의사결정 체제에서의 거버넌스란 다양한 이해관계자가 참여해 문제 해결에 협력하는 의사 결정 구조다. 다수의 정책학자는 21세기의 국정 패러다임이 정부 주도의 하향식에서 민간이 참여하는 네트워크인 거버넌스로 이동하고 있다고 본다.

강 교수는 "정책 수용 집단 또는 대상으로 분류됐던 민간 부문의 역량이 과거와 달리 굉장히 높아져서 정부가 '이렇게 하자'고 하는 방식으로는 정책의 목표를 달성하기가 어려운 환경이 됐다"고 평가했다.

그러면서 "의대 증원은 국민이 지지하는 정책이지만 그것을 성공적으로 이뤄 나가기 위해서는 여러 수단이 필요한데 그런 점에서 정부가 소홀했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영국의 경우 공공의료 체계인 국민보건서비스(NHS)를 개혁할 때 시민들이 자유롭게 참여하는 공청회를 개최한다는 점을 예로 들며 "정부가 보건의료 정책의 상위 로드맵, 소위 '마스터플랜'이라는 것을 정하고 공론화를 거쳤어야 했다"고 말했다.

윤석열 대통령 기자회견 방송 지나치는 의료인 (서울=연합뉴스) 김성민 기자 = 9일 오전 서울 한 대학병원에서 한 의료인이 '윤석열정부 2년 국민보고 및 기자회견'이 생중계되고 있는 텔레비전을 지나치고 있다. 2024.5.9 ksm7976@yna.co.kr

"자유방임 의료정책, 거버넌스 작동 못시켜…제도 속으로 의사 끌어들여야"

보건정치학을 연구하는 정웅기 미국 존스홉킨스대 박사는 근본적으로 "한국의 보건의료 정책은 '자유방임적'이었기 때문에 정부가 보건의료 거버넌스를 작동시킬 역량이 없고, 공급자(의사)를 통제할 수단도 갖고 있지 않다"고 봤다.

한국의 보건의료 서비스는 개원의와 재벌 병원 등 민간이 주도해 왔고, 저수가-저급여-저보험료 체계가 확립되며 의사들은 비급여 진료를 통해 이윤을 추구해 왔다는 것이다.

"'정부가 나에게 해준 게 뭐가 있냐고 간섭하느냐'는 의사들 말이, 실은 문제의 핵심을 짚은 것"이라는 게 그의 지적이다.

정 박사는 "의사들은 자신의 노력으로 상당한 금전적 보상을 얻을 수 있는 한 정부와 관계를 형성할 유인이 없다"라며 의료 관련 정책에 대한 의사의 기대를 충족시키고 이들이 이해관계를 표출할 제도적 장을 열어주는 동시에 책임성을 부과하자는 게 그의 주장이다.

정 박사는 그러기 위해서는 수십년간 쌓여온 의사들의 '정부불신' 타파가 우선이라고 했다.

그는 불신 해소를 위한 구체적인 방법으로 보건의료정책심의위원회(보정심), 건강보험정책심의위원회(건정심)의 내실화를 들며 "(환자 등)각계의 의견을 대변하는 전문성 있는 민간 연구자들로 '작업반'을 만들고, 이들이 숙의하고 연구한 결과물에 대해 각 집단 대표가 토론을 통해 결정할 수 있게 하자"고 제안했다.

비어있는 대한의사협회장 자리 (서울=연합뉴스) 최재구 기자 = 조규홍 보건복지부 장관이 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열린 2024년 제1차 보건 의료정책심의위원회에 참석해 발언하고 있다. 참석하지 않은 이필수 대한의사협회장의 자리가 비어있다. 2024.2.6 jjaeck9@yna.co.kr

"정부, 여러 정권 걸쳐 증원 공론화해…절차적 정당성 충분히 확보"

반면, 의대 증원은 오래된 논쟁거리인데다 긴 시간 동안 정부가 이미 충분히 공론화했다는 시간도 있다.

정형선 연세대학교 보건행정학과 교수는 "이번 사태만 놓고 보면 의대 증원 추진 과정이 거칠었다고 할 수도 있지만, 역대 정권은 여러 번 '태스크포스'를 만들어 증원을 추진해 왔고 그때마다 의사들을 포함한 이해관계자들과 공청회 등을 통해 논의해 왔다"고 말했다.

그는 "의사단체는 역대 정권이 추진한 각각 다른 규모의 의대 증원을 똑같은 근거로 똑같이 반대했다"라고 지적하며 "정책 결정 과정에서 한 직역, 한 조직의 의견을 이렇게까지 들어 주는 경우가 있나"라고 반문했다.

그러면서 이러한 역사를 충분히 겪은 정부가 최종적으로 증원 규모를 결정할 때 이해당사자인 의사단체의 '허락'을 구할 필요는 없다고 일축했다.

다만, 정 교수도 정부가 보건의료 정책을 운용할 수 있는 역량이나 의사들과 협상할 힘을 잃었다는 데에는 동의한다. 그는 그 원인으로 '밀실 합의를 통한 의사 수 감원 정책'을 지목했다.

특히 의약분업 사태 당시 의사 수를 줄여 의료계를 '달래는' 것처럼 밀실 합의로 이뤄지며 의사들의 희소가치와 정치적 영향력이 커졌고, 정부가 의사들의 주장을 제어할 수단도 없어졌다는 것이다.

정 교수는 이러한 관점에서 더 이상 의대 증원을 미룰 수가 없다고 강조하며 "협상장에 나서는 의사단체 대표들도 '내부 표심을 얻기 위한 무조건적 반대'가 아니라 '적극적으로 협상에 임해 회원들을 위한 선택을 받아내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할 시점"이라고 밝혔다.

'모두 지쳐가는 순간' (서울=연합뉴스) 김성민 기자 = 의정갈등이 이어지고 있는 14일 오전 서울 시내 한 대형병원에서 내원객들이 담요를 덮고 휴식을 취하고 있다. 2024.5.14 ksm7976@yna.co.kr

사법판결에 명운 걸린 의대 증원…"의·정, 정책으로 푸는 게 바람직"

전문가들은 정부와 의료계의 이러한 정책·갈등관리 역량 부족으로 의대 증원이 결국 법원 판결을 바라보게 된 데 안타까움을 표했다.

강창현 교수는 보정심 등 정부가 의대 증원에 대해 각계의 의견을 듣기 위해 만든 협의체를 "절차상 요건을 갖추기 위한 형식적인 절차"였다고 보고 "정부가 지금이라도 목표치를 조정해 시간을 두고 정책 협의를 추진하는 게 바람직하다"고 주장했다.

다만 강 교수는 "정책은 직관적으로 결정되기도 하며, 과학적 근거가 있든 없든 법원이 잘못된 정책이라고 판단할 일은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정웅기 박사는 정부가 법원에 제출한 자료 관련 논란을 두고 "과정에서의 정당성은 적극적인 소통·이해당사자와의 협의·투명성 등으로 구성되는데 보정심이나 의정협의체는 그 요건들을 충족했다고 보기 어렵다"라며 "그렇지만 의사 집단의 정책역량 또한 부족했다"라고 평가했다.

정형선 교수는 "최근 의사들이 증원 관련된 사안을 다 사법부로 가져가고 있는데, 정부의 정책적 결정 하나하나를 사법부에서 판단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며 "정책이 제대로 되려면 현장의 목소리를 들어야 하겠지만 정부는 의대 정원을 규제하고 관련 정책을 결정할 권한이 있다"고 지적했다.

fat@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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