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주뻘 스승 덕에 세상을 깨쳤는데… 점차 문닫는 야학
30대 스승 “돌아가신 할머니 떠올라”
지난 13일 서울 중랑구의 태청야학에서 열린 스승의날 기념식은 여느 학교 행사와는 조금 달랐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우러러 볼 수록 높아만지네.” 노래를 부르는 학생들은 60~70대 노인들이었다. 이들이 가슴에 카네이션을 달아준 교사들은 20~30대 청년. ‘노인 학생’들은 ‘손주뻘 선생님’들에게 “늦은 나이에도 공부할 수 있게 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라고 했다.
12년 전 태청야학에서 한글 쓰기부터 배웠다는 최예순(69)씨는 “글자를 읽을 수 있게 되면서 아들 도움 없이도 은행 업무를 볼 수 있게 됐다”며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라고 했다. 야학에선 중·고등 검정고시를 위한 ‘국영수’ 수업부터 스마트폰·키오스크 작동법 등 ‘디지털 문해’ 교육도 한다.
야학 수업료는 무료. 한 30대 교사는 “돌아가신 할머니가 평생 ‘학교를 못 나와 글씨를 읽지 못해 답답하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가슴에 남아 자원 봉사를 한다”고 했다.
야학(夜學)은 19세기 말 개화기 때부터 제도권에서 소외된 사람들의 배움터였다. 심훈의 소설 ‘상록수’(1935)에서 야학은 농촌 계몽 운동의 무대로 등장한다. 일제에 저항하는 독립 운동의 산실이기도 했다. 산업화·민주화 시기엔 노동자·여성·농민들의 ‘못 배운 설움’을 풀어주는 사회운동의 현장이었다. 최근 야학은 어르신 만학도들의 ‘디지털 문맹’ 문제를 해결해주는 전진 기지로 진화했다.
그러나 야학은 2004년 정부가 중학교 의무교육을 전면 시행하고, 지방자치단체들이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다. 전국야학협의회 자료를 보면 1997년 30곳이었던 서울 지역 야학은 올해 10곳으로 줄었다. 2014년 전국에 야학 62곳이 있었지만 협의회는 “전국 단위는 이젠 집계할 역량이 없다”고 했다.
수십 년 전통의 야학들이 학생 감소와 재정난에 허덕이다 소리 없이 문을 닫는다. 올해 개교 50주년을 맞은 태청야학 교무부장 김윤성(34)씨는 “월세가 200만원인데 교사들의 자발적 회비와 ‘후원의 밤’ 행사 등으로 월세를 간신히 충당한다”고 했다. 천성호 전국야학협의회 교육연구원장은 “지자체·기업의 지원도 기대하기 쉽지 않다”고 했다.
고령화로 야학에 오는 ‘노인 학생’ 숫자도 줄고 있다. 서울의 한 야학은 코로나 사태 이후 학생 수가 30% 이상 급감했다고 한다. 이 야학 관계자는 “10년 뒤면 입학하겠다는 사람도 거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서울 둔촌동 강동야학에서 중·고등 검정고시를 모두 통과해 방송통신대까지 진학했다는 이주성(79)씨는 “대학생이 되고 싶다는 열망을 야학에서 이뤘다”며 “야학이 우리 곁에 오래도록 남아줬으면 좋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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