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콜마의 반짝 빛나는 결정 [한국의 창(窓)]

2024. 5. 15.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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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보다 현저히 낮은 남성 육아휴직률
육아휴직의 '낙인효과' 가능성 배제해야
정부도 '한국콜마' 사례 적극 지원해야
ⓒ게티이미지뱅크

한국의 인구문제가 사상초유라고 하지만 정치권의 단편적 대책들은 일관된 해결의지가 있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그러던 중 반짝 빛나는 기사 하나에 눈길이 멈췄다. 한 화장품 제조사가 남녀 구분 없이 육아휴직을 의무화하기로 했다는 기사였다.

화장품 브랜드에 제품을 개발, 제조해 공급하는 한국콜마는 누구나 아는 기업은 아니지만 기술력과 시장 입지가 탄탄하다고 알려진 중견기업이다. 이런 특성이 전향적 시도에 작용했을 것이다. 정부 정책에 비해 한층 앞서 나가는 제도를 발전시킨 대기업은 사실 적지 않다. 10여 년 전 이미 '자동 육아휴직제', 즉 따로 신청 또는 결재 없이 사용하는 육아휴직제를 도입한 기업사례도 있다. 살펴보니 이제는 해당자 95% 정도가 사용하는 제도로 정착됐다고 한다.

다만 여기서 '해당자'는 대체로 여성들일 것이다. 2013~2022년 사이 한국의 육아휴직 사용 비율은 여성은 53%에서 70%로, 남성은 0.4%에서 6.8%로 늘었다. 증가세로만 보면 남성 쪽이 두드러지나 여전히 절대적 수치는 낮다. 중소기업과 격차를 보이는 대기업에서도 남성의 사용 비율은 10%에 못 미친다. 이 때문에 전체 육아휴직자 중 남성 비율은 27% 수준에 머물고 있다.

이런 사정이어서 한국콜마의 기사가 특히 눈에 들어왔다. '의무화'라는 말에 따라붙은 '아빠도 예외 없이'라는 대목 때문이었다. '의무화'가 휴직을 망설이게 만들던 임금 손실을 기업이 보전해 주겠다는 의미라면, '남녀 모두에게'는 여성에게 오롯이 맡겨지던 돌봄 부담을 남성이 나눠 져야 한다는 사회 인식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저출산의 주요한 원인임에도 한국에서는 최근 들어서야 주목받고 있는 '노동시장 내 젠더 평등'에 대한 적극적 조치라는 점이다.

육아휴직 같은 유연 근무 제도를 사용할 때 따라붙는 낙인(flexibility stigma)이 있다. '일과 조직에 대한 헌신이 부족한 직원'이라는 낙인이다. 관련 제도를 주로 여성 제도로 보고 관행화하는 환경에서는 자녀를 둔 여성뿐 아니라, 언젠가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여성이 채용, 배치, 임금 등에 불이익을 당하기 쉽다. 낙인이 젠더와 결합하는 환경에서 여성 개개인도 양자택일의 기로에 놓인다. 아이를 위해 남성과 경쟁하는 경력 추구를 일찌감치 포기하거나, 혹은 성공적 경력 추구를 위해 가족 돌봄의 기회를 포기해야 하는 것이다. 어느 쪽이든 그에 따른 비난과 부담은 다시 여성 몫이다.

우리 사회의 절대다수는 이제 여성의 직업적 소득 활동이 필요하다는 데 동의하지만(사회조사 2023), 세계 가치관 조사자료에서는 "여성이 일할 경우 가족 생활의 어려움이 커진다"는 서울 응답자 비율이 도쿄나 상하이의 응답자에 비해 크게 높다는 사실이 발견된다. 이런 모순 속에서 선택을 내려야 했던 여성들의 고민이 합계출산율 0.72라는 현실로 이어진 것이다.

중요한 점은 이런 낙인은 여성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직장에 헌신하고 일에 과몰입해야 좋은 직장인이라는 '이상적 노동자상' 아래에서는 일하는 한국 남성들에게 이 낙인은 더 가혹하게 작용할 수 있다. 현장에서 뚜렷하게 감지되는 현상이기도 하다. 몇 년 전 참여했던 한 조사에서 남성 육아휴직자들은 조직에서 처음 제도를 사용한 데 따른 부담과 경력상 위험을 토로했다. 최근 진행한 공공 부문 연구에서는 젊은 남성 직원 중 여럿이 "결혼하고 아이 낳아 기르는 삶이 사기업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해 이직했다"고 했다. 남성인 자신이 육아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준비가 돼 있지 않고는 결혼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인식도 엿보인다.

적극적 조치를 '대기업이니까 가능'하다 여기는 중견기업들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이 먼저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기술과 제품 혁신을 하려 해도 좋은 인력을 못 구해 어려운 기업이라면 그 돌파구를 한국콜마의 선택에서 찾아봄 직도 하다. 물론 이런 선택을 기업들에만 맡길 것이 아니라 이끌고 지원할 책임이 정부에 있다는 점도 상기할 필요가 있다.

권현지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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