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미군 철수와 제2의 ‘애치슨 라인’ [아침햇발]

길윤형 기자 2024. 5. 14. 18:05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4월 미국 국빈방문 때 백악관 이스트룸에서 ‘아메리칸 파이’를 부르고 있다. 연합뉴스

길윤형 | 논설위원

지금도 ‘그날 일’을 생각하면 자다가 벌떡 일어날 것만 같다.

2006년 5월4일, 미군기지 확장 사업이 예정돼 있던 평택의 대추리·도두리 벌판에서 ‘여명의 황새울’ 작전이 시작됐다. 이 작전 수행을 위해 경찰 110개 중대 1만1500명, 수도군단 700특공연대 2개 연대 2800여명이 동원됐다. 군경과 농민·지킴이들의 첫 충돌은 이제는 사라진 대추초등학교 정문 쪽으로 뚫린 미군부대 쪽문 앞에서 시작됐다. 전경들의 맹렬한 공세에 개떼처럼 밀려난 농민·노동자·학생들은 대추초등학교 건물에서 몇 시간 동안 농성하다 다시 피를 철철 흘리며 개떼처럼 끌려 나왔다. 이렇게 확보한 땅에 현재 미국 본토 밖의 미군기지로는 세계에서 가장 크다는 ‘캠프 험프리스’가 들어섰다.

황새울의 비극을 보며 받은 충격 탓인지 한동안 평택 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한반도와 동아시아를 둘러싼 엄혹한 안보 현실을 깨닫게 되면서 생각이 조금씩 바뀌어 갔다. 한국 안보에서 주한미군이 차지해온 비중과 그 ‘억지력’을 생각할 때 미군 주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을 어느 정도는 감내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 ‘변절’로 평택 시절의 적잖은 벗을 잃었다.

주한미군의 억지력이란 무엇일까.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학 석좌교수 등이 일본 언론인 스노하라 쓰요시와 진행한 대담집 ‘일-미 동맹 vs 중국·북한’(2010)이란 작은 책에 매우 흥미로운 문답이 등장한다.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방부 차관보를 지낸 저명한 학자인 나이 교수는 이 책에서 미국의 확장억제가 작동하기 위한 조건을 묻자 “핵 유사 사태가 발생했을 때 미국이 일본을 지킨다는 것을 담보해주는 것은 핵무기 그 자체가 아니라 일본에 주둔해 있는 미군의 존재”라고 말한다.

사실, 한 나라가 자신이 핵 공격 받을 것을 감수하며 다른 나라를 지키겠다는 확장억지 공약이란 “이 거짓말은 진짜”라고 선포하는 것과 같다. 이와 관련해 흥미로운 일화가 전한다. 1961년 6월2일 파리 정상회담에서 샤를 드골 프랑스 대통령은 존 에프(F) 케네디 미국 대통령에게 “소련이 핵무기를 쓸 때 우리를 지켜줄 것이냐”고 물었다. 젊은 케네디가 “그렇다”는 모범답안을 내놓자, 산전수전 다 겪은 드골은 소련의 침략이 어디까지 뻗치면, 언제 어느 목표물을 타격할지 재차 물었다. 미국이 파리를 위해 워싱턴·뉴욕을 희생할 수 있냐고 추궁한 것이다. 케네디는 답할 수 없었고, 이미 독자 핵무장의 길에 선 프랑스를 막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미국은 서울을 위해 워싱턴·뉴욕을 희생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한 모범답안 역시 정해져 있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지난해 4월26일 ‘워싱턴 선언’에서 “한국에 대한 미국의 확장억제는 핵을 포함한 미국 역량을 총동원하여 지원된다”고 호언장담했다.

이 ‘거짓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것은 바보나 다름없지만, 한국은 오랫동안 드골 같은 날 선 추가 질문을 하지 않았다. 약속 이행을 강제하는 ‘최소한의 담보’ 때문이었다. 미국이 정말 ‘절박한 상황’에서 ‘극한의 판단’에 나서게 될 때 고려하게 될 ‘유일한’(!) 변수는 아마도 한국의 운명이 아닌 평택의 캠프 험프리스, 가나가와의 요코스카, 오키나와의 가데나에 머무르던 미군과 그 가족들의 운명일 것이다. 이 기지가 북·중의 핵 공격에 철저히 파괴돼 수만명의 미국인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면, 미국은 정말 바이든 대통령의 약속대로 “즉각적, 압도적, 결정적 대응”에 나설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2만8500명에 달하는 주한미군과 그 가족들의 존재는 미국이 한국을 위해 제공한 ‘피의 담보물’이나 다름없다.

11월 대선을 앞둔 도널드 트럼프 후보 진영에서 잇따라 주한미군 철수 관련 언급을 쏟아내고 있다. 단순히 돈을 더 달라는 게 아니라 엘브리지 콜비 ‘마라톤 이니셔티브’ 대표처럼 한-미 동맹의 존재 의의 자체를 허무는 주장을 내놓은 이도 있다. 이 극단적 의견이 미 조야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을 것이라 보진 않지만, 세상일을 어찌 장담할 수 있는가. 주한미군 철수는 한국에 대한 확장억지 공약을 철회하는 것이자 미국의 방어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한다는 제2의 ‘애치슨 라인’을 선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윤석열 대통령은 근심 걱정에 자다가 벌떡 일어나야 한다.

charisma@hani.co.kr

Copyright © 한겨레.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크롤링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