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연인·부부' 신고 차마…반의사불벌죄의 그늘[의대생 사건 그후]⑤

박혜연 기자 2024. 5. 14. 0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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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밀한 사이에서의 폭력…처벌 의사 밝히기 꺼리는 피해자들
반의사불벌죄 폐지해도 첩첩산중…실질적인 보호 조치 필요

[편집자주] 경찰청에 따르면 지난해 검거된 교제폭력 피의자는 1만 3939명에 달한다. 피해자가 신고를 꺼리는 교제폭력 사건 특성상 통계에 잡히지 않은 가·피해자도 많을 것이다. 강남역 의대생 살인 사건이 연일 주목 받고 있지만, 교제폭력 대책은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뉴스1>은 '의대생 사건' 이후 개선해야 할 교제폭력 실태를 집중 보도한다.

서울 강남역 인근 건물 옥상에서 자신의 여자친구를 살해한 혐의를 받는 20대 남성 A 씨가 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중앙지법에서 열린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에 출석하고 있다. .2024.5.8/뉴스1 ⓒ News1 김민지 기자

(서울=뉴스1) 박혜연 기자 = 이별을 통보했다는 이유로 동갑내기 연인을 잔인하게 살해한 20대 의대생 사건은 전형적인 교제폭력이다. 부부나 연인 등 친밀한 사이에서 나타나는 교제폭력·가정폭력은 관계에 집착한 나머지 상대를 구속하고 통제하며 심지어 살인까지도 이어질 수 있는 범죄다 하지만 피해자가 신고를 하지 않거나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현행법상 반의사불벌죄에 해당하는 폭행과 협박은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으면 처벌할 수 없다. 반복적인 피해가 발생하더라도 수사기관이나 사법부에서는 피해자의 '처벌 불원' 의사에 따라 손 놓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 때문에 교제폭력·가정폭력과 같은 특수한 상황에서는 반의사불벌죄 적용 제한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 보복 두려움에 신고 꺼리는 피해자들…'처벌 불원' 한마디에 좌지우지

교제폭력 상황에서 피해자가 쉽게 처벌 의사를 밝히지 못하는 데는 다양한 이유가 있다. 우선 단순 폭행이나 협박의 경우 가해자가 현행범으로 체포되더라도 사안이 경미하다고 봐 구속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별로 없다. 가해자가 풀려난 이후 오히려 보복당할까봐 걱정해야 하고, 한때 가까운 사이였던 연인을 수사기관에 적극적으로 고발해야 한다는 심리적 부담도 있다.

폭력이 자주 반복되면 자존감이 낮아지고 무력감에 빠지는 심리적 상태로 인해 피해자가 신고를 지레 포기하기도 한다. 부부 사이에는 자녀 양육 문제나 경제적 기반 상실에 대한 불안감으로 신고나 처벌을 꺼리는 경우도 있다.

김소정 한국여성의전화 여성인권상담소장은 "가해자도 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밝혀주면 본인이 처벌을 피할 수 있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다"며 "가해자가 피해자의 개인정보나 약점을 이용해 추가 피해를 가할 수 있다고 위협하는 경우도 있어서 처벌을 하고 싶어도 그 의사를 밝히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최근 가정폭력처벌법은 제3자에게 신고 의무를 부과하고 수사기관이 임시 분리조치 등을 직권으로 할 수 있도록 개정되면서 엄벌주의로 나아가는 추세다. 다만 원가정 보호라는 취지와 피해자 의사를 존중해야 한다는 조항 때문에 가정보호사건으로 처리되면 가해자가 상담을 받거나 교육·봉사 명령을 받는 대신 형사처벌을 피할 수 있도록 돼 있다.

교제폭력 및 가정폭력과 비슷한 사유로 발생하는 스토킹 범죄는 지난해 7월 국회에서 법이 개정되면서 반의사불벌죄 규정이 폐지됐다. 이를 발판 삼아 스토킹처벌법을 교제폭력이나 가정폭력 사례에도 넓게 적용해 반의사불벌죄 적용을 제한할 수 있다는 의견이 있다. 21대 국회에서 발의된 데이트폭력처벌법도 반의사불벌죄 적용 배제 등 피해자를 보호하는 취지의 규정이 포함돼 있다.

김성천 중앙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스토킹과 교제폭력, 가정폭력 3가지의 본질은 비슷하다"며 "경찰이 더 적극적으로 개입할 수 있도록 법 적용 범위를 확대하거나 종합적으로 법 체계를 관리할 수 있는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 News1 DB

◇ "반의사불벌죄 폐지만으론 해결될 수 없어…사회적 지원 시스템 뒷받침돼야"

반면 단순히 반의사불벌죄 적용 배제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시각도 있다. 장다혜 한국형사·법무정책연구원 범죄분석·조사연구실 연구원은 "폭행과 협박은 사소하게 많이 일어나는 분쟁 유형이어서 반의사불벌죄를 완전히 폐지하면 그 모든 사건을 다 처리하기엔 인력과 예산이 제한적"이라고 말했다.

장 연구원은 "특정 관계에서 반의사불벌죄 적용을 배제하려면 특별법을 만들어야 하는데 데이트폭력은 그 관계 설정을 어떻게 할 것인가, 관계를 어떻게 확인할 것인가 이 부분이 계속 쟁점이 되고 있어 쉽지 않다"고 설명했다.

반의사불벌죄 규정이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양형과 기소 단계에서부터 피해자의 의사가 영향을 미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는 지적도 있다. 즉 반의사불벌죄를 적용하지 않더라도 피해자가 '처벌 불원 의사'를 밝히면 기소유예나 가벼운 벌금형 또는 집행유예 수준의 처벌이 여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스토킹처벌법에서도 반의사불벌죄는 폐지됐지만 여전히 피해자의 합의나 처벌 불원 의사는 피고인에게 유리하게 작동한다.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지난 3월 스토킹 범죄 양형기준을 정하며 피해자가 처벌을 원하지 않을 경우 벌금형을 택할 수 있게 했다.

장 연구원은 "처벌 불원이라는 피해자 의사만 있으면 실제로 사법적인 절차가 거의 작동하지 않는다"며 "조항을 없애는 것 외에도 신변보호조치나 심리 상담을 통해 위험한 상태를 감소시키는 노력, 가해자의 폭력성을 억제하는 사회 지원 시스템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

김 교수는 "가정폭력 쉼터도 부족해 아주 시급한 상황이 아니면 들어갈 수 없고 피해자가 일시적으로만 머물렀다 다시 나와야 한다는 문제가 있다"며 "피해자에 대한 경제적·심리적 지원이 체계적으로 구축돼야 한다"고 말했다.

김 소장은 "반의사불벌죄와 별개로 피해자 보호조치에는 일선 수사관이 더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다"며 "수사기관에서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접근하는 것을 더 강력하게 제지하도록 교육하거나 전담팀에 권한을 더 많이 주는 등 섬세한 운영이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hypark@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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