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각장애인은 ‘피지컬 100’을 어떻게 볼까?

백수진 기자 2024. 5. 14.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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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장애 방송인 이동우·개그맨 김경식, 음성 해설로 예능을 들어보니
그룹 틴틴파이브 멤버였던 이동우(왼쪽)와 김경식이 8일 서울 종로구 넷플릭스 코리아 시사실에서 예능 ‘피지컬 100′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이태경기자

“예능만 나오면 답답해서 채널을 돌리고, 뉴스·다큐멘터리만 보고 살았어요. 예능은 호흡이 빠르고, 표정과 동작 위주라 누군가의 도움을 받지 않고는 따라갈 수 없더라고요.”

개그맨 이동우(54)씨는 2010년 실명 판정을 받고 나서, 좋아하던 예능 프로그램과 멀어졌다. 1999년 시각장애인을 위한 화면 해설이 국내에 처음 도입된 이후 25년이 지났지만, 배리어 프리(Barrier Free·장벽이 없는) 콘텐츠는 여전히 제한적이다. 5월 셋째 주 목요일(16일)은 장애인의 디지털 접근성을 높이기 위해 만든 ‘세계 접근성 인식의 날’. 이를 앞두고 시각장애 방송인 이동우, ‘출발! 비디오 여행’ 진행자인 김경식과 넷플릭스 예능 ‘피지컬 100′을 화면 해설 버전으로 모니터링했다.

넷플릭스 화면 해설 및 자막 설정 화면. /넷플릭스

화면 해설은 시각 장애인을 위해 화면에서 벌어지는 상황을 말로 설명해주는 기능이다. ‘두둥!’ 하고 시작하는 오프닝부터 성우는 “빨간색 알파벳 대문자 N이 다양한 색상의 스펙트럼으로 펼쳐진다”고 화면을 읽어줬다. 이어서 “높다란 계단에는 1부터 50까지의 숫자가 쓰여 있다” “홍범석은 애써 웃는다”처럼 스튜디오 배경, 참가자들의 표정, 컴퓨터 그래픽(CG)까지 음성으로 변환됐다.

보지 않고도 머릿속에서 그림이 그려지도록 해설하는 게 관건. 공 뺏기 경기가 시작되자 해설이 더 촘촘해졌다. “김동현과 엠마누엘이 뛰어들어와 중앙에 놓인 공으로 달려든다. 엠마누엘이 공을 꽉 끌어안자 김동현이 팔 안쪽으로 자신의 팔을 넣어 건다….” 이동우는 “화면 해설 콘텐츠의 절대량이 부족하기 때문에 산소호흡기를 받은 느낌”이라면서도 “경기 장면에선 건조한 해설보다는 조금 더 역동적으로 연기해주셔도 좋겠다”고 건의했다. 김경식은 “화면 해설인지, 참가자의 목소리인지 헷갈릴 수 있어서 음향을 입체적으로 구분해달라”고 보탰다. 넷플릭스는 이들의 의견을 수용해 앞으로 제작할 콘텐츠에 반영할 계획이다.

그래픽=정인성

방송법 개정으로 2011년부터 국내 방송사는 5~10% 비율로 화면 해설 방송을 제작해왔으나, 적용 대상이 아닌 국내 OTT의 드라마나 예능은 여전히 접근하기 어려웠다. 반면 글로벌 OTT인 넷플릭스는 2016년 영화 ‘데어 데블’을 시작으로 자체 제작하는 모든 작품에 화면 해설을 지원하고 있다. 2022년 국회입법조사처가 펴낸 국정감사 이슈 분석 보고서에서도 “주요 OTT 중 배리어프리 콘텐츠에 가장 적극적인 곳은 넷플릭스이고, 국내 OTT는 장애인 접근성이 미흡한 편”이라고 지적했다.

23년째 영화 소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김경식은 모든 OTT를 구독하는 반면, 이동우는 OTT를 아예 이용하지 않는다. 가족들과 종종 영화관에 갈 때도, 내용을 5~10% 정도 이해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이동우는 “액션 영화를 보다 잠든 적도 있다. 무슨 상황인지 물어보고 싶을 때도 있지만, 주변 사람들한테 방해될까 봐 참는다”고 했다.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으로 살아가면서, 사랑받거나 환영받는다고 느낄 때가 흔치 않거든요. 화면 해설 콘텐츠를 발견하면, ‘나도 세상과 소통하고 있구나!’ 하고 사랑받는 기분이 들어요.”

시각장애 방송인으로 활동 중인 이동우(오른쪽)는 “경식이랑 유튜브 채널 ‘우동살이’를 운영하며 하고 싶은 일들이 늘었다. 같이 클럽도 가고 패러글라이딩에도 도전하고 싶다”고 했다. /유튜브 '우동살이' 캡쳐

1990년대 개그맨 겸 가수 그룹 틴틴파이브 멤버로 인기를 끌었던 이동우는 2010년 망막색소변성증으로 실명 판정을 받았다. 당시 멤버였던 김경식은 “평생 내가 너를 책임지겠다”며 오열했고, 그 후로 10여 년간 옆에서 그의 눈이 되고 있다. 최근 한 예능에 출연하며 두 사람의 남다른 우정이 화제가 됐다. 이날도 김경식은 이동우 옆에서 “어두컴컴하고 붉은 조명에 사람 실루엣만 보여” “공 크기는 축구공보다 좀 더 크고, 가죽 재질이야”처럼 궁금해할 만한 것을 설명해줬다.

이동우는 “경식이와의 우정이 ‘아름다운 이야기’로 주목받는 게 오히려 슬펐다. 그만큼 우정을 나누기 어려운 시대라는 반증 같다”고 했다. “저희가 만나서 까불고 놀고 웃는 일상을 전국 초·중·고 학생들에게 보여주고 싶어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같이 살아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교재가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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