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방울은 아무 의미 없어, 그래서 인생 걸고 그립니다 [요즘 전시]

2024. 5. 13.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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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방울 화가’ 김창열 개인전
작고 3주기…그의 예술 세계 조명
현실 존재 힘든 물방울 사실적으로
“극사실적이지만 지극히 초현실적”
2000년대 김창열 작가 모습. [갤러리현대]

[헤럴드경제=이정아 기자] “캔버스를 뒤집어 놓고 직접 물방울을 뿌려 봤어. 꺼칠꺼칠한 마대에 매달린 크고 작은 물방울의 무리들, 그것은 충분히 조형적 화면이 성립되고도 남질 않겠어. 여기서 보인 물방울의 개념, 그것은 하나의 점이면서도 그 질감은 어떤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는 새로움의 발견이었어. 점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감도라 할까, 기적으로 느껴졌어.” (‘공간’ 1976년 6월호)

재활용하려고 비켜 둔 캔버스에 맺힌 영롱한 물방울이 햇빛에 반짝였다. 그 순간 화가는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존재하나 사라져 없어지는 그것은 영락없는 ‘일루전(환상)’이다. 어디서부터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벅차올랐다. 나이 마흔 둘, 화가는 운명처럼 만난 물방울에 천착했다. “예술의 본질은 환상일 텐데, 이것을 재검토해 보려는 게 나의 예술이다.” 남은 인생을 내건 그의 붓질은 예술, 그 자체가 됐다. 프랑스 파리 근교 마구간에서 지낸 그가 어느 날 아침 우연히 발견했다가 속절없이 붙들린 ‘물방울 50년’은 이렇게 시작했다.

김창열, 물방울 ENS79002, 1979, 캔버스에 유채. [갤러리현대]

‘물방울 화가’로 잘 알려진 김창열(1929~2021)의 작고 3주기를 맞아 그의 예술 궤적을 회고하는 전시가 열렸다. 서울 사간동 갤러리현대가 진행 중인 김창열 개인전 ‘영롱함을 넘어서’다. 갤러리현대는 이번 전시를 위해 그동안 판매한 국내 곳곳의 김창열 작품 소장자를 직접 찾았다. 마대 위 물방울이 처음 등장한 1970년대 초반 작품부터 2010년대 제작된 근작까지. 김창열이 수행하듯 그려낸 물방울 너머를 반추할 수 있는 주요 작품 38점이 기획 전시된 것이 특히 눈에 띈다. 이번 전시작 중에는 방탄소년단(BTS)의 멤버 RM 소장작 1점도 포함돼 있다.

화폭에는 같은 물방울이 없다. 톡 건드리면 금방이라도 흐를 듯 맑고 또렷하게 맺힌 1970년대 물방울, 우주 만물의 원리를 담고 있는 천자문과 만난 1980년대 이후 물방울, 다른 물방울과 부딪히며 흐르는 끈적하면서 밀도가 높은 물방울, 한지 위에 여러 겹으로 켜켜이 쌓아 올린 색과 문자 위에서 순수하게 존재하는 물방울…. 무엇보다 연대기적 구성에서 나아가 조형언어로서 물방울이 직관적으로 전하는 미학이 이번 전시에서 조명된다.

이 아름다움은 역설적으로 물방울과 물방울이 존재하는 표면의 ‘관계성’을 사유하게 만든다. 간명하고 편하게 다가오는 물방울 형상이 가진 힘이다. 1972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살롱 드 메’ 전시에서 처음 소개된 그의 물방울에 대해 초현실주의 시인인 알랭 보스케는 “물방울은 최면의 힘을 갖고 있다”고 평했다.

김창열, 물방울, 2012, 캔버스에 유채. [갤러리현대]
김창열, 물방울, 1973, 캔버스에 유채. [갤러리현대]

실제로 화면에 담긴 물방울 자체로는 아무 의미가 없다. 물방울은 승려가 염불을 외우듯 그려졌는데, 작가는 ‘뜻이 없다’는 지점에서 문제의식을 가졌다. “물방울은 하찮은 물건, 곧 사라져서 없어질 물건, 그러나 존재하면서도 뭔가 충만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처럼, 물방울은 극사실적이지만 지극히 초현실적인 존재다.

작가는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그러나 철저하게 있음직한 물방울을 만들어냈다. 중력이나 빛의 반사 등 자연의 물리 법칙을 거스르고 표현한 화폭 속 물방울이 대표적이다. 표면에 그려진 글자를 가리거나 완전히 보이지 않게 지워낸 물방울을 그린 것도 이에 대한 연장선상이다. 물방울을 향한 작가의 실재하는 집념이 피상적인 환상을 넘어서는 순간이다. 그래서 엄밀히 따지면, 김창열은 물방울 자체를 그린 것이 아니다. 그에게 어느 순간 물방울은 물감과 같은 재료와 같았을지도 모른다.

김창열, 회귀 SH 9016, 1990, 캔버스에 한지, 먹, 아크릴릭. [갤러리현대]
김창열, 회귀 SH 2013001, 2011, 캔버스에 아크릴릭. [갤러리현대]

이번 전시는 갤러리현대가 여는 15번째 김창열 개인전이다. 앞서 작가는 1976년 갤러리현대와 첫 개인전을 열고 한국에 ‘물방울 회화’를 공개했다. 도형태 갤러리현대 대표는 “그동안 작가의 작품은 수행, 성찰, 회귀, 그리고 전쟁으로 죽어간 많은 영혼에 대한 레퀴엠 등 다양한 서사를 품은 은유적 언어로 해석돼 왔다”라며 “이번 전시는 한국의 현대미술을 상징하는 작가인 그가 반세기동안 실험한 물방울의 표현과 독자적인 조형언어를 통해 그간 덜 주목받았던 예술의 본질을 재조명하는 자리”라고 말했다.

김창열은 국립현대미술관(1993), 드라기낭미술관(1997), 사마모토젠조미술관(1998), 쥬드폼미술관(2004), 중국국가박물관(2005), 국립대만미술관(2012) 등 국내외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60여 회의 개인전을 가졌다. 그의 작품은 프랑스 퐁피두센터, 일본 도쿄국립미술관, 미국 보스톤현대미술관, 독일 보훔미술관, 한국 리움미술관 등 전세계 주요 미술기관에 소장돼 있다. 작가는 지난 2013년 대표작 220점을 제주도에 기증했고, 2016년 제주시 한림읍에 김창열미술관(현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이 개관했다.

전시는 6월 9일까지. 무료.

2010년대 김창열 작가 모습. [갤러리현대]

dsu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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