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 얼굴에 노란 테이프 '칭칭'…1㎝ 쪽지문 '범인' 무죄, 왜?

소봄이 기자 2024. 5. 13.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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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노파 살인 12년 만의 용의자 '유죄 근거 부족' 석방[사건속 오늘]
경찰, 수사 성과 못보자 비구니 친누나 내세워 주민을 범인 몰아가기도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결정적 단서인 '쪽지문'. (강원지방경찰청 제공)

(서울=뉴스1) 소봄이 기자 = 과학 수사 기법의 발달로 장기 미제 사건이 하나둘 해결되는 가운데, 강원도 강릉시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용의자가 12년 만에 특정됐다.

숨진 피해자 얼굴에 붙어 있던 포장용 테이프에서 1㎝ 길이의 '쪽지문'이 발견되면서다. 아주 일부분의 손가락 지문이 이 살인 사건의 유일한 증거였다.

그러나 치열한 법정 공방 끝에 나온 결론은 '무죄'였다. 사건 해결에 혈안이 됐던 경찰이 '가짜 범인'을 내세우기까지 했던 '강릉 노파 쪽지문 살인사건'의 시작은 19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전화선으로 손발 묶인 60대 노인…테이프서 발견된 '1㎝ 쪽지문'

2005년 5월 13일,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의 한 산골 마을에서 장 모 씨(당시 69)의 시신이 발견됐다. 장 씨가 숨져있는 것을 이웃 주민이 처음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다.

당시 장 씨의 얼굴에는 포장용으로 쓰는 노란색 테이프가 칭칭 감겨 있었고, 손과 발은 전화선 등으로 묶여 있었다. 이웃 주민은 "장 씨의 집 현관문과 안방 문이 열려 있고, TV 소리가 들리는데도 인기척이 없어 들어가 보니 장 씨가 숨져 있었다"고 말했다.

또 안방 장롱 서랍이 모두 열려 있었고, 장 씨의 금반지를 비롯해 78만원 상당의 귀금속이 사라졌다. 이에 경찰은 금품을 노린 강도 살인 가능성에 무게를 뒀다.

부검 결과 장 씨의 사인은 기도 폐쇄와 갈비뼈 골절 등이었다. 범인이 장 씨 얼굴을 테이프로 감아 숨을 쉬지 못하게 한 뒤, 저항하는 그를 무차별 폭행해 살해한 것으로 경찰은 추정했다.

경찰은 범인을 어렵지 않게 검거할 수 있다고 판단했으나, 현장에서 증거를 확보하는 데 실패하면서 난항을 겪게 됐다.

현장에는 CCTV나 목격자가 없었고, 경찰이 정밀 감식을 진행했지만 깨끗했다. 범인이 지문, DNA, 발자국 등 자신의 흔적을 모두 지우고 도주한 것이다.

경찰은 현장에서 지문 17점을 확보해 감식을 의뢰했지만, 대부분 장 씨와 그의 가족 지문으로 확인됐다.

이때 장 씨 얼굴을 감은 포장용 테이프 심지에서 흐릿하게 남아있던 1㎝ 길이의 쪽지문이 발견됐다. 테이프를 뜯어서 자르려면 속지를 잡고 당기는데, 이 과정에서 지문이 남은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당시 기술로는 1㎝만의 쪽지문으로 용의자를 특정하기 어려웠다. 지문의 끊긴 점이나 곡선 등 13가지 특징점이 뚜렷해야 범인을 찾을 수 있는데, 발견된 쪽지문은 융선과 돌출되는 선이 불분명했기 때문이다.

다만 이 지문과 별개로 지목된 용의자가 있었다.

용의자가 범행에 사용한 포장용 테이프(왼쪽)와 전화선. (강원지방경찰청 제공)

◇"내가 범인" 자백한 수양딸 반전…경찰이 만든 '가짜 범인'이었다

바로 "내가 범인"이라며 자백한 마을 주민 A 씨(당시 45·여)였다. A 씨는 평소 장 씨와 친하게 지냈고 심지어 수양딸로 불릴 정도였다.

또 장 씨에게 200여만 원을 빌리는 등 채무 관계가 있었고, 범행 당일 행적에 대해서도 횡설수설했다. 범행 이후엔 무속인을 찾아가 '장 씨를 살해한 범인이 언제 잡힐 것 같냐'고 묻기도 했다.

A 씨는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가 거절당해 순간 화가 나 살해했다"면서 강도 사건으로 위장하기 위해 장 씨의 귀금속은 집 앞의 밭에 버렸다고 구체적으로 자백했다.

그러나 사건이 검찰로 송치된 후, A 씨는 돌연 "나는 할머니를 죽이지 않았다"며 진술을 번복했다. 거짓말 탐지기 조사까지 했으나 혐의가 드러나지 않았다.

알고 보니 A 씨는 자백을 강요당한 것과 다름없었다. 장 씨가 사망하고 며칠 지나지 않아 한 여승이 A 씨 집으로 찾아와 "당신이 살인했다고 말하지 않으면 당신 아들에게 큰일이 생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덜컥 겁을 먹은 A 씨는 "아들을 위해 거짓으로 자백했다"고 털어놨다. 여기에 경찰도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며 A 씨를 진짜 범인으로 몰아갔다.

이때 여승의 반전 정체가 밝혀졌다. 바로 사건을 수사하던 담당 형사의 친누나였다. 죄 없는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기 위해 여승인 누나를 이용, '가짜 범인'을 만든 것이다.

A 씨가 집 앞에 던졌다는 패물도 발견되지 않았고 다른 증거도 없어 결국 그는 용의선상에서 제외됐다. 이후 유력한 용의자가 없어 수사는 사실상 중단, 미궁 속으로 빠졌다.

서울 서대문구 경찰청에서 과학수사대 관계자가 지문 채취 과정을 시연하고 있다. (사진은 기사 내용과 무관함) / 뉴스1 ⓒ News1

◇12년 만에 나타난 용의자, '거짓' 반응에도 '무죄', 왜?

경찰의 초동 수사 실패로 미제로 남아있던 사건은 12년 만인 2017년 돌파구를 찾았다. 1㎝ 쪽지문을 분석해서 누구의 지문인지 확인하는 데 성공하면서다.

12년의 세월이 흐른 끝에 용의자로 지목된 이는 인근 동해시에 살던 남성 B 씨(당시 50)였다. 지문 특징점 15곳이 일치한 B 씨는 사건 당시 경제적으로 궁핍했으며 과거 동거녀를 폭행하고 억압, 강간한 뒤 현금과 목걸이 등을 강탈해 징역 7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한 사실이 있었다.

특히 B 씨는 범행 시간대에 지인이 운영하는 동해시의 한 술집에 있었다고 주장했지만, 주변인 수사를 통해 B 씨가 당시 술집에 없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알리바이가 정확하지 않았던 B 씨는 거짓말 탐지기 조사에서도 모두 '거짓'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B 씨는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다. 그는 강릉에 간 적도 없으며 전과자라는 이유로 경찰이 범인으로 몰아간다고 주장했다. 쪽지문이 나온 문제의 테이프에 대해서는 "오토바이를 타고 다닌 적 있는데 그 안에 테이프가 있었다"면서 이후 오토바이를 도난당했다고 설명했다.

경찰은 여러 정황을 근거로 B 씨에 대해 강도 살인 혐의 등으로 검찰에 송치했고, 기소가 이뤄졌다. B 씨는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고, 재판부는 이를 받아들였다. 법정 공방 끝 1심에서 배심원 9명 중 8명이 B 씨를 무죄로 판단했고, 재판부도 같은 판단을 내렸다.

재판부는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증거는 범죄 현장에서 발견된 박스 테이프 안쪽 속지에서 발견된 B 씨의 지문이 유일하다"며 "이 지문은 사건 범행과 무관하게 알 수 없는 경위로 남겨졌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 없다"면서 쪽지문만으로 유죄로 판단하기 부족하다고 봤다.

또 B 씨가 이 사건으로부터 약 12년 후에야 범인으로 지목된 점을 언급하며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여러 증거가 흩어지고 일부 없어져 무죄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를 제시하기가 어렵게 됐다"고 B 씨의 방어권 문제도 지적했다.

(KBS 교양 갈무리)

◇항소심 무죄→검찰, 상고 포기…19년간 '미제 사건'

검찰은 B 씨 범행 현장에 있었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B 씨의 진술 분석, 심리 전문가 의견 등을 추가로 법원에 제출해 항소했다. 하지만 2심 재판부도 1심의 손을 들어줬다. 항소심 재판부는 "범행 현장에서 발견된 피고인의 쪽지문만으로는 유죄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판단된다"고 밝혔다.

무죄 선고 직후 법정을 나선 B 씨는 "죄가 없으니까 무죄 판결이 난 거 아니겠느냐. 난 모르는 사건"이라고 말했다. 이 사건이 대법원까지 갈 것으로 예상됐지만, 검찰은 1·2심 판단을 번복할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판단해 상고를 포기했다.

이로써 B 씨의 무죄는 확정됐고, 이 사건은 다시 미제로 남아 19년 동안 피해자 장 씨의 한을 풀지 못하고 있다.

이 사건을 조사하고 전 과정을 지켜본 황준식 당시 홍천경찰서 지능범죄수사팀장은 "모든 정황을 종합해 보면 정 씨가 범인이 맞는데 무죄를 받아 안타깝다. 대법원까지 갔으면 원심이 파기됐을 수도 있지 않을까"라며 아쉬워했다.

sby@news1.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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