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과 나림, 민중을 믿지 않되 깊이 연민한 당대의 거인

조광수 나림연구회 회장·전 한국아나키즘학회 회장 2024. 5. 13.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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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주 문학과 인문 클래식 <5> 나림의 거북한 교사:루쉰②

- 의사 자격 취득 단 1년 남기고
- 문학도 되려 의학 그만둔 루쉰
- 日서 귀국한 그를 기다린 것은
- 신해혁명 뒤끝이 안겨준 환멸
- 이를 바탕으로 쓴 ‘아큐정전’
- 나림은 10번 넘게 읽고 곱씹어

- 난세에도 소신을 꺾지 않아서
- 혹독한 세월을 겪어낸 두 사람
- 무력하고 비겁한 민중을 향한
- ‘분노’와 그 아래 깔린 ‘애틋함’
- 둘의 대표작에 고스란히 담겨

루쉰은 일본 유학 시절 양사(良師) 둘을 만난다. ‘후지노 선생’이란 소품에서 그리움을 표현한 센다이 의대의 은사 후지노(藤野)와 타계 며칠 전 미완성 만사(輓詞)를 바친 국학 대사 장빙린(章炳麟)이다. 해부학 교수 후지노는 유학생 루쉰의 필기를 매주 주필(朱筆)로 봐주고 때로 간절한 충고도 해준 따듯한 스승이었다. 학문 있는 혁명가 장빙린은 의학을 포기하고 문학을 작정한 루쉰에게 혁명의 열정을 심어준 전사(戰士) 스승이었다. 나림 이병주는 ‘후지노 선생’에서 인생의 기미(機微)와 루쉰의 소신을 읽는다.

나무위키에서 루쉰을 검색하면 중국에서 만든 루쉰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다. 그 작품에서도 루쉰은 매우 중요하고 비중이 큰 작가로 나온다. 사진은 다큐멘터리 한 장면.


나림은 위대한 사상이나 명성은 없지만 그래도 자상하고 훈훈한 후지노란 인물보다 ‘후지노 선생’을 쓴 루쉰을 대단하게 여겼다. 이 소품은 1926년 루쉰이 샤먼(廈門) 대학에 재직할 때 쓴 글이다. 항일과 배일 풍조가 중국 천지를 지배하던 시절이다. 그 대목에서 “내가 스승으로 모신 분 중 가장 나를 감격시키고 격려해 준 사람”이라며 일본인 이름을 밝힌 것 자체가 상당한 용기다. 평범하면서도 특별한 한 인물을 위대한 스승으로 기억하고 발표한 루쉰을 나림은 높게 평가한다.

그 작품에서 루쉰은 의사 되기를 포기하고 문예 운동 하기로 마음을 다지는 계기를 설명한다. 수업 시간에 슬라이드로 본 러일 전쟁 한 장면이었다. 스파이 혐의로 처형되는 중국인과 무표정하게 바라보는 동포의 모습, 그 광경에 만세를 부르며 박수 치는 일본 동학들, 그리고 그 교실에 단 한 사람 중국인인 자신. “아아. 이 이상 할 말이 없다. 그때 그 자리에서 나의 생각이 변한 것이다.”

루쉰은 의학 공부를 분연히 그만두고 동포의 정신 개조에 나섰다. “우약(愚弱)한 국민은 체격이 아무리 좋고 건강해서 오래 살아도 기껏 본보기의 재료나 되고 그것을 구경하는 구경꾼이 될 뿐이기” 때문이다. 나림은 루쉰의 이 결정에 주목한다. 1년 남짓만 더 하면 의사가 되는데, 그리고 보통의 경우 의사 자격을 일단 얻은 뒤 문학을 해도 좋다고 타협하기 마련인데 루쉰은 시작부터 소신에 철저한 지사(志士) 문인이었다는 것이다.

▮루쉰, 식인(食人)과 맞닥뜨리다

루쉰의 일본인 스승 후지노 교수.


용기와 소신의 루쉰은 장빙린의 훈도를 받고 유일(留日) 7년 만에 귀국한다. 교사도 하고 교육부에서도 근무한다. 신해혁명에 나름 참가도 한다. 나름 참가했다는 것은 혁명이란 명분으로 어중이떠중이가 사리(私利)를 취하는 풍조에 거리를 유지했다는 뜻이다. 그 끝은 군벌의 횡행이었다. 왕조를 전복하고 공화국을 세웠으나 그저 허울뿐 민족이 지닌 병폐가 일시에 노출되고 세상은 지리멸렬 수렁이 됐다. 과연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렸나 싶었다. 루쉰의 환멸과 적막은 심각했다.

루쉰은 자기 혼을 마취시키고 고대(古代)로 침잠했다. 고비(古碑)의 사본을 뜨고 고문헌을 들추는 고전 연구는 마취의 효과는 있었다. 장미와 와인 대신 고전 공부에 천착했다. 하지만 적막과 슬픔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친구 진신이가 ‘신청년’에 기고를 제안한다. 루쉰은 자신의 적막감을 청년들에게 전염시키지 않기 위해 승낙한다. 그렇게 탄생한 ‘광인일기’는 중국 문학사와 루쉰 모두에게 기념비적 작품이다. 최초 백화문 소설이고, 루쉰 소설의 원형이다. 귀국 9년 뒤, 혁명 7년 뒤인 1918년 일이다.

나림의 ‘광인일기’ 독감(讀感)은 탁발하다. 광인 앞에 나폴레옹과 라스콜리니코프를 등장시킨다. 루쉰의 시대는 온갖 지식인이 나타나 전통과 서구화 사이에서 고민을 백가쟁명 하던 시절이다. ‘타도! 공자’부터 중체서용(中體西用), 전반적 서구화까지 춘추전국시대에 이은 제2의 사상의 전성시대였다. 루쉰은 근대 사상으로 전통을 조명하는 시도는 모두 허망하다고 느꼈다. 유교 이데올로기를 내면에서 비판하려 했다. 피해자 하나를 등장시켜 그 피해자가 가해자로 전환하는 과정을 묘사하는 수법을 썼다.

“모든 일은 연구해야만 알 수 있다. 나는 역사책을 들춰 조사했다. 이 역사책에는 연대도 없고, 어느 페이지에나 인의도덕(仁義道德)이란 글자가 너절하게 쓰여있었다. 잠도 오지않고 해서, 한밤중까지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글자와 글자 사이에서 진짜 글자가 보였다. 책 꽉 차게 쓰여 있는 두 글자는 식인(食人)이었다.” 루쉰은 유교 이데올로기를 사람 잡아먹는 사람이 사람에게 먹히고 사람에게 먹히는 사람이 또 사람을 먹는 상황을 만든 사상이라고 풀이했다.

▮나림, ‘아큐정전’을 놓지 않다

루쉰이 ‘광인일기’를 기고한 ‘신청년’.


나림은 내용과 취의(趣意)는 다르지만 루쉰의 방법이 도스토옙스키 ‘죄와 벌’과 통한다고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인간 유형으로서 나폴레옹을 고학생 라스콜리니코프의 심상에 집어넣어 개인 나폴레옹의 의미를 인간의 의미로 확대 심화한 것이라고 나림은 해석했다. 나림은 ‘아큐정전’을 10번 이상 읽었다. 첫 독후감은 농민문학도 아니고 혁명 문학도 아닌 듯한데 뭔가 석연하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두 번째는 아큐가 총살당하는 장면을 중심으로 읽었으나 작가의 잔인한 시선만 보였다. 루쉰은 아큐에 대한 동정도 관중에 대한 공감도 없다고 느꼈다.

다음엔 우승기략(優勝記略) 즉 정신 승리법에 초점을 맞춰 읽었다. 그래도 미진했다. 루쉰의 다른 작품을 읽으면서도 결국 ‘아큐정전’으로 되돌아오곤 했다. ‘아큐정전’은 확실히 난해한 소설이다. 나림의 결론은 이렇다. 루쉰은 신해혁명에 실망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게 없다. 민중 생활도 지배층 생태도 그대로다. 루쉰은 혁명을 무효 선언한 것이다. 혁명을 횡령당하고도 무력하게 굴종하고 있는 민중을 증오했다. 아큐처럼 산 놈은 아큐처럼 죽어도 싸다. 아큐를 멸시하는 놈, 아큐를 잡아 죽인 놈, 아큐의 처형을 시시덕거리며 구경하는 놈 어느 누구도 아큐보다 나은 건덕지가 없다. ‘아큐정전’은 루쉰의 분노의 책이다.

▮그리운 두 거인

루쉰이 일생 행복했다고 하긴 어려울 것이다. 다만 쉬광핑(許廣平)을 만난 이후 10년만큼은 화양연화였다. 나림은 루쉰과 쉬광핑 사이에 오고 간 135통의 서신 ‘양지서(兩地書)’를 읽고 “루쉰은 사랑에 있어서 승리자”라고 상찬했다. 45세와 28세의 사제로 만나 애인으로, 다시 동지로, 그리고 부부로 화합하는 과정이 그야말로 천의무봉의 아취(雅趣)를 풍긴다고도 했다. 적막감과 슬픔, 분노에 몸과 맘을 상했지만 사랑에서 승리했으면 그것으로 족한 일 아닌가.

쉬 여사가 남긴 ‘루쉰 회억록’을 비롯한 책 3권을 나림은 안나 도스토옙스키의 ‘남편 도스토옙스키의 회상’과 더불어 보물로 간직하고, 고민 있을 때마다 이곳저곳 넘겨보곤 했다. 난세에 소신을 지키며 살기 힘들다. 난세의 처신에는 세 가지가 있다. 힘든 때일수록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신으로 현장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한 방법이다. 천하는 천하에 두면 된다는 심정으로 관조하고 인퇴(引退)하는 것이 또 하나다. 그도 저도 아닌 하루 살면 하루 넘긴다는 심정으로 어영부영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난세의 소신은 때로 목숨과 바꿀 수도 있다. 나림 이병주와 루쉰은 소신을 지키다 혹독한 대가를 치른 공통점이 있다. 친구도 많았고 적도 많았다.

나림은 루쉰의 유언 중 특히 이 대목에 주목한다. “나의 적은 너무 많다. 나를 미워하는 놈은 나를 미워하도록 놔둬라. 나는 한 놈도 용서하지 않을 테다.” 나림은 자신의 청춘을 위한 만사 ‘관부연락선’을 마무리하며 “운명, 그 이름 아래에서만 사람은 죽을 수 있는 것이다”고 했다. 타계 10년 전 쓴 또 다른 만사 ‘세우지 않은 비명’에서는 “역성(歷城)의 풍(風), 화산(華山)의 월(月)”이라는 왕어양(王漁洋)의 시구를 인용하며 “마르셀 프루스트처럼 인생을 치밀하게 슬퍼하는 것도 좋지만 한시처럼 풍월적으로 인생을 슬퍼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요컨대 인생은 슬퍼하면 되는 것이니까”라고도 했다.

하지만 이런저런 레토릭을 걷어내면 나림의 진심은 “나 모두 용서하리라”이다. 나림의 유언은 “기서호(其恕乎)”다. 회색인이란 사려 깊은 사람이다. 민중을 믿지 않지만 민중의 어리석음을 알기에 깊은 연민을 갖고 있다. 어리석음에 분노하고 좌절하지만 끝내 애틋하게 여긴다. 그리고 큰 지식인은 세상을 비판적 시각으로 보는 수준을 넘어 문명적 시선으로 살핀다. 문명적 시선이란 약자를 배려하고, 과거 현재 미래를 통시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이 시대엔 사라진 폐족 거인족이다. 거인 루쉰과 나림이 더욱 그리운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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