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 진상 규명에 평생 헌신하신 아버지… 진실 알려 뜻 이을 것”

이형주 기자 2024. 5. 13. 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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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대를 잇는 5·18]
〈上〉 김양래 前 5·18기념재단 상임이사의 자녀 김아람 씨
《올해로 5·18민주화운동이 일어난 지 44년이 됐다. 5·18은 한 세대(世代)를 넘어 반세기(半世紀)를 향해 가고 있다. 이제 5·18은 한국을 넘어 세계 인권의 나침반 역할을 하고 있다. 올해 5·18기념행사의 표어는 ‘모두의 오월, 하나 되는 오월’이다. 5·18이 세대와 국가를 넘어 모두의 자랑스러운 오월이 되자는 의미를 담았다. 광주에는 5·18 진상 규명과 전국화·세계화를 위해 일생을 헌신했던 시민운동가들이 많다. ‘민주·인권·희생’의 가치를 실천했던 시민운동가들 자녀의 눈에 비친 5·18은 어떤 모습인지를 3회에 걸쳐 싣는다.》




아버지 집념 빼닮은 연주자로 김 씨가 네 살 때인 1989년 광주의 한 유치원 발표회가 끝난 뒤 아버지 김양래 전 5·18기념재단 상임이사의 품에 안겨 환하게 웃고 있다. 김아람 씨 제공
김아람 씨(38·여)는 5월만 되면 어린 시절 아버지 김양래 전 5·18기념재단 상임이사의 목말을 타고 광주 동구 충장로를 걸을 때의 추억을 떠올린다.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아버지와 반갑게 악수하는 이들이 무척 많았다는 것이다. 아람 씨는 “당시 아버지가 충장로에서 인사를 나눴던 지인들 중 상당수는 5·18민주화운동 유족회, 부상자회 회원들이었다”고 회고했다.

지난해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김 전 이사는 전남대 농과대 임학과 4학년에 다니던 중 5·18과 마주했다. 당시 풍물패를 이끌고 시위에 참여했다가 붙잡혀 1980년 7월부터 107일 동안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천주교 광주대교구 정의평화위원회(정평위)에서 11년 동안 간사로 활동하며 5·18 진상 규명에 앞장섰다.

당시 김 전 이사의 사무실은 충장로 인근 광주 동구 금남로 광주가톨릭센터에 있었다. 5·18 진상 규명 목소리를 내던 광주가톨릭센터가 ‘항쟁의 거리’ 금남로에 있었던 것을 감안하면 김 전 이사가 시내에서 지인들과 자주 조우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 아람 씨의 또 하나 추억은 광주 북구 운암동 집이 항상 손님들로 북적이는 하숙집 분위기였다는 것이다. 당시 김 전 이사의 집은 5·18민주화운동 관련자들이 공안당국의 추적을 피해 따뜻한 밥 한 끼 먹고 잠시 몸을 뉘일 수 있는 안식처였다. 아람 씨는 시인, 화가, 신부, 목사 등 민주인사들의 무릎에 앉아 책을 읽고 재롱을 부렸다.

아람 씨에게 아버지는 따뜻하고 정이 많으셨지만 항상 바쁜 분이었다. 아버지가 바쁘게 사신 것은 5·18 진상 규명과 전국화·세계화를 위해 온 열정을 바쳤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중에 알았다. 김 전 이사는 광주대교구 정평위 간사를 맡았던 1987년 지인들과 함께 ‘오월 그날이 다시오면’ 사진첩과 ‘광주 비디오’ 영상을 제작, 배포하는 일을 주도했다. 사진첩과 비디오는 신군부가 광주를 유혈 진압하면서 보여준 잔혹성을 국민에게 알리는 데 큰 몫을 했다.

김 전 이사는 광주 임동성당 지하에서 1년 동안 숨어서 사진첩과 비디오를 만들었다. 아람 씨는 “아버지가 지하실에서 일하다 수차례 조사를 받았고 고된 작업으로 기관지에 이상이 생겨 오랫동안 고생하셨다”고 말했다.

김 전 이사는 이후 광주시민연대 운영위원장, 법무부 광주출입국사무소 사회통합위원회 위원장, 광주평화방송 총무국장, 광주인권평화재단 이사 등을 역임했다. 2015년부터 2018년까지 3년 동안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로 활동했다. 2017년 유엔 본부에서 제37주년 5·18민주화운동 기념식을 개최하는 데 공헌하는 등 5·18 전국화·세계화에 매진했다. 5·18 진상 규명을 위해 미국 정부 기관 극비 자료를 확보하는 데도 힘썼다. 김 전 이사는 외국인에게 5·18을 알리기 위해 늦은 나이에 영어와 일본어 공부를 했다고 한다.

아람 씨는 “아버지가 영어교사이시던 어머니에게 야단을 맞으며 영어를 배웠던 것도 외국인에게 5·18을 알리고 민주화 과정을 겪는 다른 나라의 단체들과 연대하기 위한 노력 중 하나였다”고 말했다.

아람 씨는 광주 설월여고와 서강대를 졸업했다. 2009년 탱고 음악에 감명을 받아 탱고의 본고장 아르헨티나로 가 탱고를 배웠다. 부에노스아이레스 필하모니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했고 세계 각국을 돌아다니며 공연을 하다 2019년 귀국했다.

아버지 집념 빼닮은 연주자로 김아람 씨는 대학을 졸업한 후 탱고의 본고장 아르헨티나에서 음악을 공부했다. 현재 김 씨는 세계 각국을 돌며 탱고 연주를 하는 등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김아람 씨 제공
아람 씨는 네 살 때부터 바이올린을 배웠지만 대학에서 영문학, 경영학을 전공했다. 고등학교 때부터 탱고가 너무 좋아 대학을 졸업한 뒤 아르헨티나로 가 본격적으로 늦깎이 연주자 공부를 시작했다. 아람 씨는 “탱고에 매료된 이유는 열정과 여유, 명랑함과 비장함 등 다양한 색깔을 가진 음악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람 씨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아버지의 5·18에 대한 집념과 묘하게 닮았다. 아람 씨는 “아버지에게 5·18은 정말 중요한 의미였다. 시대적 소명을 다하기 위해 아버지는 5·18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평생을 바쳤다”고 강조했다.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도 “김양래 전 상임이사처럼 5·18에 대해 애정을 갖고 진실하게 일했던 사람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정 전 회장은 “김 전 이사는 2022년 투병 생활을 하면서 700쪽짜리 ‘영암 사람들의 5·18 항쟁기’라는 책을 만들 정도로 열정이 넘쳤던 분이었다”고 회고했다.

김 전 이사는 1980, 90년대 5·18 희생자들이 잠들어 있는 광주 망월동을 찾은 사람들을 안내해주며 ‘하얀 셔츠 사나이’로 불렸다. 2000년대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를 맡을 때는 5·18 진상 규명을 위해 뛰고 5·18 왜곡에 대응하며 ‘불도저’라는 애칭도 얻었다.

아람 씨는 “5·18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던 민주인사들의 삶을 어릴 때부터 봐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며 “아버지처럼 그들은 5·18이 지역을 넘어 인권을 상징하는 보편적 의미가 되도록 확장시킨 주인공들”이라고 말했다.

“일부 청소년들이 5·18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이 너무 안타까워요.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를 알리는 일이 아버지가 남긴 5·18의 유산을 지키고 이어가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형주 기자 peneye09@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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