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광장]평양냉면과 소울푸드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2024. 5. 13. 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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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밍밍하고 슴슴하고 특별한 맛이랄 게 없다. 게다가 비싸기까지 하다. 먹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 음식인데 특별한 맛이 없는 그 맛이 자꾸 생각난다. '맛없음의 맛있음'이라는 그 미묘하고도 희미한 맛은 쉽게 낼 수가 없어서 유명한 전문점 아니면 잘 가지 않게 된다. 중독성 강한 평양냉면은 맛을 들이는 순간부터 고생길 시작이다.

반가운 소식이 들렸다. 2022년 재개발로 문을 닫은 을지면옥이 2년여 만에 다시 장사를 한다는 것이다. 필자가 처음 냉면에 입문한 곳이다. 재영업 사흘째인 지난 4월24일 오픈시간 전부터 사람이 길게 줄을 섰다. 다들 그리웠던 것이다. 다행히 일찍 도착한 덕분에 문이 열리자마자 입장했다. 천장이 높아 쾌적하고 조명도 환하다. 새 건물의 넓고 깨끗함만큼 비싼 냉면 가격도 낯설다. 맛만 그대로다. 맛이 변하지 않으니 추억도 그대로다. 지난날 다 허물어져가는 건물에서 냉면과 제육을 안주 삼아 낮술을 마신 기억들이 내게도 청춘의 삽화로 끼워져 있다. 소주 한 잔 마시고 제육 한 점 입에 넣은 후 사발 들고 육수 한 모금, 그리고 면을 한 젓가락 집어 후루룩 빨아들이니 이곳은 다시 허름한 2016년 봄날의 면옥, 나는 그리운 이와 함께 마주앉아 있었다.

백석이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라고 한 '국수'도 실은 냉면이다. 소래섭은 책 '백석의 맛'에서 "국수를 먹는 일이란 공동체의 의식이기도 하다. 국수를 기다리는 것은 화자 개인만의 바람이 아니다. 이 작품에서 제시되는 모든 감각적 경험들은 온 마을 사람들의 공유물이다. …. 그들의 먼 조상들 또한 국수의 구수한 맛을 즐겼다. 국수를 향유하는 주체는 공간뿐만 아니라 시간적으로 확장된다"고 말했다. 국수는 그저 한 그릇의 음식이 아니라 유대와 결속의 의미는 물론 감정과 기억 그리고 시간적 차원까지 거느리는 우주인 셈이다.

누구에게나 소울푸드에 대한 기억에는 엄마가 있다. 몇 해 전 인터넷에서 많은 사람을 울린 글이 있다. 돌아가신 어머니가 담가주신 김치가 냉장고에 딱 한 통 남았는데 차마 먹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걸 먹어버리면 이제 이 세상에 '엄마 김치'는 사라지게 되니까. 평양냉면이 내 30대의 소울푸드라면 유년의 소울푸드는 경양식 돈가스다. 초등학교에서 상장이라도 받아오면 부모님 손잡고 경양식집에서 먹던, 세계지도의 아프리카 대륙을 닮은 그 돈가스가 얼마나 맛있었는지 모른다. 지금도 가끔 먹는데 일식 돈가스는 영 낯설어서 경양식 돈가스만 고집한다. 하지만 어릴 적 먹던 그 맛을 내는 집은 드물다.

평생을 관통한 소울푸드는 역시 엄마의 음식이다. 엄마표 오이소박이와 두부조림은 언제나 그 맛 그대로다. 아니다. 어릴 땐 신나는 맛이었다면 이제는 뭉클한 맛이다. 20대 때는 생일이면 나가 놀기 바빴는데 몇 해 전부터는 일부러 엄마를 귀찮게 한다. 아침 일찍 엄마 집에 가 생일상을 차려달라고 떼쓴다. 엄마도 아들 밥 해먹이면서 기쁠 것이다. 얼마 전 엄마 생신엔 동생이 직접 잔칫상을 차려 가족들을 초대했다. 불고기와 잡채, 미역국을 맛보니 동생 솜씨가 엄마 못지않다. 그래도 흉내 낼 수 없는 게 있다. 당신 생신인데 엄마는 조카가 좋아하는 육전과 동생이 좋아하는 양념게장,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오이소박이와 두부조림을 바리바리 챙겨왔다.

냉면을 먹으려면 땡볕 아래에서 줄을 서야 하지만 엄마의 음식은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다. 다만 언제까지나 먹을 수는 없다. 그래서 소중하다. 이제는 엄마가 해준 음식에서 시간의 쇠잔한 나이테가 보인다. 그믐으로 기울어가는 달빛이 보인다. 사람의 일생이란 따뜻한 밥 한 끼 먹기 위해 온 세상을 떠돌아 헤매는 일이 아닌가. 아까시 냄새가 달큰한 이 계절, 나는 그 밥 한 끼를, 눈물겨운 엄마 집밥을 또 먹었다. 그러니 잘 살아야 한다. 잘 살아봐야겠다. 내년 생신에는 투플러스 한우를 사드릴 것이다.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이병철 시인(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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