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설에 담긴 사회적 맥락 [삶과 문화]

2024. 5. 12.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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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게 전라도라는 뎁니다. 전라도 사람들은 욕 많이 하는 걸 탓하면, 욕도 못 하면 무슨 수로 사느냐고 맞섭니다."

평생 욕 한 자 모르고 살아온 선량한 분들을 위해, 숨겨진 네 글자를 순한 맛으로 채워보자면, '야속한 분'이나 '못된 사람' 정도가 될 것이다.

욕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바란다면, 욕하는 이만을 탓할 것이 아니라, 욕이 생겨나는 기이한 세상의 '못된 사람'들을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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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룹 뉴진스 소속사 어도어의 민희진 대표이사가 지난달 25일 서울 서초구 한국컨퍼런스센터에서 긴급 기자회견을 열고 어도어 측의 공식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박시몬 기자

"아니 하고 싶은 말보다 욕이 더 많으니 저게 어찌 된 일입니까?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왜 이곳 사람들은 욕을 그렇게 많이 합니까?"

"그게 전라도라는 뎁니다. 전라도 사람들은 욕 많이 하는 걸 탓하면, 욕도 못 하면 무슨 수로 사느냐고 맞섭니다."

조정래 선생의 대하소설 '태백산맥'의 한 구절이다. 1948년 여순사건 직후, 경기 수원 출신 외지인의 질문에, 전라도 벌교에서 나고 자란 김범우는 핍박받는 이들이 쓰는 욕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 욕은 인간의 삶에서 중요한 소통 수단이다. 정체성이나 소속감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단순히 부정적인 의미만을 가지지 않고, 때로는 긍정적이거나 필요악으로 역할하기도 한다.

저항의 언어로서 욕은 세상에 순응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의 모순과 부당함에 불만을 느끼고, 각성한 사람들이 고개를 들고 내뱉는 언어다. 고개 숙이고 있는 사람의 마음에도 분노의 불을 지피는 선동이다. 욕은 입에 담기 힘든 단어의 조합으로 이뤄지므로, 실제로 입 밖으로 내뱉는 데에는 큰 용기가 필요하다. 이는 내가 사는 세상이 이만큼이나 황폐하고 추악하다는 생생한 고발이다. 그 정도가 필설로 옮기기 어려울 정도로 적나라할수록 그 울림은 크다.

세계적인 그룹 '뉴진스'를 만들고 키워낸 민희진 대표의 기자회견이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편집된 영상만 봐도 그 파격성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매력적인 사람의 기이한 모습에 놀라곤 하는데, 사실 기이한 구석은 역설적이게도 그 사람의 매력을 한층 더 올려주는 역할을 하곤 한다. 영국 일간지 파이낸셜타임스도 이 사건에 대해 흥미로운 분석을 내놓았다. 'K팝 가부장제와 싸우는 스타 프로듀서'라는 제목으로, 많은 한국 여성들이 '가부장적인 직장과 싸우는 젊은 여성'의 구도로 받아들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이 업을 하면 욕이 안 나올 수가 없다. 이 XXXX들이 너무 많아가지고···"

많은 이들이 공감하고, 시원함을 느꼈던 부분을 어렵게 옮겼다. 평생 욕 한 자 모르고 살아온 선량한 분들을 위해, 숨겨진 네 글자를 순한 맛으로 채워보자면, '야속한 분'이나 '못된 사람' 정도가 될 것이다. 이 맥락에서 중요한 것은, 엔터업뿐만 아니라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업이 욕 없이는 안 된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욕은 평소에 입에 올렸던 말들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와야 참맛이다. 그 표현이 아니면 안 되는 적확한 자리가 있다. 반죽이나 떡 같은 것이 끈기가 많다는 뜻으로 쓰는 '찰지다'라는 표현을, 욕을 수식할 때도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버스 안에서 들리는 어린 학생들의 일상화된 욕설 대화에는 이런 찰진 느낌이 없다. 약해 보이기 싫어서 설익은 욕으로 어설프게 꾸민 외피로 느껴져 안쓰럽다.

욕은 한 사회의 불편한 진실을 거침없이 드러내는 도구로 작용한다. 각각의 욕설이 가진 무게나 맥락은 그 사회의 깊은 상처나, 현재 진행 중인 갈등을 반영하기도 한다. 욕을 단순히 비속어로만 여기기보다는 그것으로 공명하는 감정의 연대와 사회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도 필요하다. 욕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바란다면, 욕하는 이만을 탓할 것이 아니라, 욕이 생겨나는 기이한 세상의 '못된 사람'들을 바꿔야 한다.

오흥권 분당서울대병원 대장암센터 교수·'의과대학 인문학 수업' '타임 아웃'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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