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원기의 외교포커스] 국제정치에서 小國과 大國

파이낸셜뉴스 2024. 5. 12. 18: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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小國·大國 우호적 관계는
상호존중 바탕에서 가능
굴복하고 타협해선 안돼
최원기 국립외교원 교수
2017년 7월 싱가포르 외교가가 갑자기 발칵 뒤집혔다. 세계적 명성의 싱가포르 국립대에 리콴유 대학원을 설립하고 13년째 초대 학장을 맡고 있던 키쇼어 마부바니 교수를 전직 외교장관과 대사들이 공개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이다. 발단은 '소국은 언제나 소국답게 행동해야만 하는 것'이 국제정치의 불문율이며, 싱가포르는 남중국해 등 중국이 중시하는 사안에 대해서 함부로 나서지 말고 극히 말조심해야 한다는 마부바니의 언론 기고문이었다.

마부바니는 '소국'인 싱가포르는 '대국'인 중국의 심기를 거스르는 말과 행동을 삼가고, 때로는 원칙을 굽히고 타협하는 것이 실리 확보를 위한 현명한 외교라고 주장했다. 싱가포르의 대표적 베테랑 외교관 출신인 마부바니의 이런 주장에 대해 그의 옛 동료들이 싱가포르 국익을 해치는 극히 위험한 발상일 뿐만 아니라 국부로 추앙받는 리콴유가 정립한 국익중심 원칙외교에 대한 모욕이라고 발끈한 것이다.

싱가포르는 서울보다 조금 넓은 면적에 인구도 570만 수준으로 그야말로 진짜 '소국'이다. 외교 상대는 모두 자신보다 덩치가 큰 '대국'들이다. 마부바니의 옛 동료들은 싱가포르가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발전에 성공하고 국제사회에서 당당한 주권국가로 인정받고 있는 이유는 마부바니의 주장과 달리 1965년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한 이래 결코 한 번도 '소국답게' 외교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비판했다.

특히 외교차관과 유엔대사 등을 역임한 빌라하리 카우시칸은 강대국이 좌우하는 국제정치에서 '소국' 싱가포르는 소국이라는 사실만으로 무시당하거나 강대국 간 흥정의 대상이 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소국답게 행동'하는 순간 전략적 존재감은 사라지고 국익을 지킬 수 있는 기반도 하루아침에 허물어진다고 마부바니를 맹비난했다. 그는 만약 싱가포르가 독립 이후 이웃의 덩치 큰 '대국'들의 수많은 외교적 압박에 스스로 알아서 굴복하고 타협했다면 이미 지도상에서 사라졌을 것이라고까지 했다. 그래서인지 마부바니는 그해 말 학장직을 그만두었다.

지도상에서 동남아의 '작은 붉은 점'으로 불리는 싱가포르는 적을 만들지 않고 모든 국가를 친구로 만드는 외교를 추구해 왔다. 이는 소국으로서 당연한 외교 지향이다. 하지만 싱가포르는 강대국들의 자발적 선의에 기대거나 우호적 국제환경에 대한 어떠한 환상도 배제한 냉정한 현실주의 외교를 추구해 왔다. 또 국익과 원칙에 기반해 정립한 외교정책은 강대국의 어떠한 압력과 요구에도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다는 일관된 외교규범을 지켜왔다.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를 비판하며 대러제재에 동참한 나라는 동남아에서 싱가포르가 유일하다. 중국의 온갖 회유와 압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만에 보병·기갑·포병 합동 전술훈련을 할 수 있는 훈련장을 3개나 유지하면서 대만과 군사교류를 지속하고 있다. 미군이 1990년대 초 필리핀에서 철수하자 다른 동남아 국가들의 비난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군사협력 협정을 맺어 미국 항공모함이 창이 해군기지에 기항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역내에서 힘의 공백을 방지하고 군사적 균형을 유지하고자 한 '소국' 싱가포르의 전략적 결단이었다. 또 전투기 등 미국의 첨단 군사장비를 꾸준히 도입하여 유사시를 대비한 상당한 국방력도 보유하고 있다. 바로 이런 점들이 '소국' 싱가포르가 중국을 비롯한 주변 '대국'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배경이다.

싱가포르 소국 논쟁의 결론은 명확하다. 소국은 결코 '소국답게' 행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대국과 소국의 우호적 관계는 굴종이 아니라 상호존중의 바탕 위에서만 가능하다. 소국이 자발적으로 굴복하거나 타협한다고 해서 대국의 존중을 받는 경우는 거의 없다. 상대의 요구에 국익과 원칙을 타협하고 선의를 기대하는 것은 실리외교가 아니다. 더구나 국제정치에서 소국과 대국은 절대적인 구분이 아니라 상대적 개념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외교를 어떻게 하는가이지 나라 크기가 아니다. 외교가 곧 국력이다.

최원기 국립외교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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