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가장 무서우니까…동물학대 기사에 대한 변명

이유진 기자 2024. 5. 12.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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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서울 건국대의 마스코트로 사랑받던 거위 ‘건구스’가 폭행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동물자유연대 제공

이유진 | 오픈데스크팀장

거위가 사람을 물면 기사가 안 되지만 사람이 거위를 때리면 기사가 된다.

지난달 11일 60대 남성이 서울 광진구 건국대학교 캠퍼스 안 호수에 살며 재학생들과 시민들에게 사랑받던 거위 ‘건구스’의 머리를 손으로 여러 차례 세게 내려쳤다. 폭행 당시 음주 상태도 아니었다는 이 남성은 “거위가 먼저 공격해 때렸다”고 주장했다.

말 못 하는 건구스는 억울해도 반박도 못 하는 상황. 다행히 폭행 장면이 담긴 영상이 남아 있었다. 영상 속 건구스는 먼저 공격하기는커녕 남성의 거친 손길에 머리가 바닥에 거의 닿을 정도였다. 머리를 다친 건구스는 피까지 흘렸다.

보는 사람에 따라 잔인하다고 느낄 수 있는 이 영상을 기사에 첨부했던 이유는 건구스에게 ‘목소리’를 주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선빵’을 날리지 않았노라고. 대신 기사 상단에 ‘이 기사에는 동물 학대 영상과 사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라는 안내 문구를 넣었다. 독자에게 ‘뒤로가기’를 누를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동물 학대 기사를 데스킹(손질)할 때마다 선택의 갈림길에 선다. 글로도 충분히 전달될지, 사진을 넣는다면 모자이크 처리를 해야 할지, 영상을 넣을지 말지 등을 고민하다 보면, 정답 없는 질문을 마주하는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지난 3월 오픈데스크팀장이 된 뒤 데스킹한 동물 학대 기사를 추려보니 8건, 일주일에 1건꼴이니 결코 적다고 할 수 없다.

올 3월 이웃 주민에게 폭행당한 뒤 세상을 떠난 7살 반려묘 ‘희동이’ 기사를 내보낼 때도 취재기자와 함께 고민이 많았다. 건물 1층 현관 밖으로 세게 내던져져 길거리에 힘없이 쓰러진 희동이의 마지막 모습이 담긴 영상을 확보했지만 선뜻 기사에 넣을 수가 없었다. 최근 미디어에서 동물 학대 상황을 선정적으로 묘사하는 사례가 많아졌다는 지적이 나오는데 우리의 선택 역시 희동이의 고통을 전시하는 데 그칠까 봐 우려됐기 때문이다.

결국 영상을 넣게 된 결정적 이유는 “길고양이인 줄 알았다”는 가해자의 ‘궤변’ 때문이다. 반려묘가 아닌 길고양이라면 때리고 던져 죽여도 괜찮다는 말인가. 동물보호법 위반 혐의로 검찰에 송치된 가해자가 합당한 처벌을 받게 하기 위해서라도 그의 범행을 있는 그대로 전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이제까지 우리의 판단이 100% 옳았을까, 솔직히 자신이 없다. 아직까지 국내에는 동물 보도 가이드라인이 없다. 동물권행동 ‘카라’에서 2020년 자체 제작한 ‘동물 출연 미디어 가이드라인’이 내가 참고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국내 자료다. 이 가이드라인의 주된 목적은 영화·드라마 등 촬영 현장에서 동물들이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지만 동물 학대 보도에 적용할 만한 몇 가지 준칙도 담고 있다.

이에 따르면 미디어는 신체적·물리적 폭력과 언어적·정신적 폭력, 성폭력 등을 선정적인 볼거리로 묘사하지 않아야 한다. 또 동물 학대를 관용적인 시선으로 다루거나 불법행위를 정당화하지 않아야 하며 사소한 일로 다루지 말아야 한다. 동물보호법 등을 위반하는 행위를 가볍게 다뤄 심각성을 상쇄시켜서도 안 된다.

그리고 최근 국외 동물 보도 가이드라인을 찾다가 우리의 고민을 조금은 덜어줄 수 있는 문장을 발견했다. “거짓 중립을 피하라.” 스페인 폼페우 파브라대 동물윤리센터에서 만든 ‘비인간동물에 대한 윤리적 보도 가이드라인’에 나오는 문장이다. 이 가이드라인은 “힘의 우위를 점하고 있는 인간과 이에 대항할 수 없는 다른 종들 사이에는 분명한 힘의 불균형이 존재한다”며 “언론인은 이 상황에서 ‘중립적인 태도’가 윤리적인지 반드시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건구스는 한동안 모습을 감췄다가 지난달 24일께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하지만 한 매체에 따르면 전에는 가까이 가도 경계심이 없던 건구스가 사건 이후로는 사람들을 피해 다닌다고 한다. 다시 한번 느끼지만, 사람이 가장 무섭다.

yjl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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