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소포비아에 국익은 없다 [세상읽기]
박록삼 | 언론인
루소포비아. 러시아 혐오의 역사는 길고도 넓고도 깊다. 1901년 첫번째부터 시작해 몇해 동안 노벨문학상은 가장 수상이 유력했던 당대의 대문호 톨스토이를 거푸 외면했다. 스웨덴이 경제적, 종교적으로 러시아와 불편한 관계였기에 한림원도 그 영향 아래 있었다. 이는 하나의 상징과 같은 사건이었다. 이후 미국과 소련의 체제·이념 대결을 거치며 이러한 루소포비아는 더욱 심화됐다.
과거의 얘기만도, 서구권 나라들의 얘기만도 아니다. 1776년 창립된 이후 냉전 시기를 거치면서도 ‘백조의 호수’ ‘파리의 불꽃’ ‘호두까기 인형’ ‘스파르타쿠스’ 등 대표작을 세계 곳곳 무대에 올렸던 볼쇼이 발레단의 공연은 2024년 봄 한국에서 막혔다. 지난달 중순 예정됐던 러시아 볼쇼이 발레단 세종문화회관 방한 공연 무산은 루소포비아가 한국 사회에서도 예외가 아닌 흐름임을 보여줬다. 어디 이뿐인가. 학술 연구 분야도 마찬가지다. 오는 8월 말 부산에서 열리는 세계지질과학총회(IGC) 참가 예정이던 러시아 학자들은 한국조직위원회로부터 “러시아 아닌 다른 나라 소속으로 바꿔야 총회 참가가 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애꿎게 정치와 외교의 도구로 전락해버린 예술과 학술이 불쌍할 따름이다.
러시아를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로 격상시켰던 한국에까지 이러한 러시아 혐오 정서가 전이된 진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2년을 훌쩍 넘긴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첫째 이유다. 동맹국들에 일방적 선택을 강요하며 극단적 대결의 전선으로 들어오라는 미국의 요구는 난감하다. 한데 한국 정부의 제재 동참은 시늉을 넘어 적극성까지 띠었다. 한국 정부는 기꺼이 두차례에 걸쳐 러시아 수출 통제 품목을 1159개로 확대했다. 그것도 모자라 지난달 북·러 군수물자 운송에 관여한 러시아 선박 2척과 러시아 기관 2곳 등을 독자적으로 제재 대상에 포함시켰다.
낡은 이념과 동맹의 허울 속에 펼치는 아마추어식 외교 정책이 둘째 이유다. 한국을 비우호 국가로 분류한 러시아로서는 촉각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지난해부터 삼성, 엘지(LG), 현대차 등이 줄줄이 러시아 시장에서 철수한 것은 자의 반 타의 반의 제 살 깎아먹기 행위였다. 러시아 한인회장을 30년 동안 입국 금지시킨 러시아의 조치는 미-러 대결이 자칫 한-러 대결로 본격화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남의 장단에 춤추듯 시작된 러시아 혐오가 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미래를 위기로 몰아넣을까 심히 우려된다.
그럼에도 정부는 낙관적이다. 지난 9일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 2주년 기자회견에서 “러시아와 협력할 것은 협력하고 반대하고 경계할 것은 하면서 경제협력과 공동의 이익은 함께 추구해나가는 관계로 관리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3월에는 신원식 국방부 장관이 외신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러시아군의 반인륜적 전쟁범죄로 평가받는 ‘부차 학살’에 대해 놀랍게도 “아직 실체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다”고 답했다. 부차 학살에 대한 신중한 접근이 러시아를 향한 유화적인 손짓일 수 있다. 그럼에도 순진하다고 해야 하나. 안일하다고 해야 하나. 상대방을 정서적으로 자극하는 행위를 바로잡지 않은 채 말로만 협력을 얘기하는 것은 근본적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국민들 사이에 팽배해진 반러시아 인식과 정서는 짧은 시간 동안 이미 중국에 대한 차별과 혐오 못지않게 바뀌었다. 차별과 혐오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인류의 이익은 없다. 더욱이 외교안보는 국가의 이익과 국민의 안전이 걸려 있는 일이다. 이념을 앞세우거나 혐오의 정서를 자극하는 언사로 얻을 수 있는 국가와 국민의 이익은 더더욱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천년만년 갈 리 없다. 전쟁은 곧 끝나게 된다. 전쟁과 휴전을 둘러싼 미국, 러시아, 유럽 등의 이해관계가 복잡하듯 한국의 외교안보적 이해관계 또한 고차원 방정식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다. 남북문제를 비롯해 미국, 중국, 러시아, 일본 등 국가들과 관계 맺기는 이념의 잣대로 접근할 일이 아니다. 복잡한 문제는 복잡한 만큼 냉철한 이성과 합리적 자세로 풀어가야 한다. 쾌도난마적 강퍅한 외교로는 한반도의 평화도, 경제적 이익도, 국민의 안전도 모두 담보하기 어렵다. 러시아 혐오와 악마화에는 어떠한 국익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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