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응 못하는 권력은 그저 헐벗은 존재 [전쟁과 문학]

이정현 평론가 2024. 5. 12. 1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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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스쿠프 전쟁과 문학 19편
2차 대전 참전한 유제프 차프스키
포로수용소서 특별한 강의 진행
기억에만 의존해 프루스트 강의
절망적 상황서 문학으로 영혼

작가 유제프 차프스키는 소련군의 수용소에 갇혀 1년간 끔찍한 생활을 견뎠다. 그와 그의 동료들이 수용소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건 정신적 활동 덕분이었다. 차프스키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생애와 작품을 강의하며 암울한 수용소에 희망을 심었다. 진실한 고통은 삶을 이어나가는 힘을 주기 때문이다.

소련군의 카틴 학살로 수만명의 폴란드 지식인이 사망했다. 사진은 카틴 학살 추모제.[사진=연합뉴스]

1940년, 폴란드군 예비 장교로 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유제프 차프스키(Jozef Czapskiㆍ1896~1993년)는 소련군에 포로로 잡혀 악명 높은 스타로벨스크 수용소에 갇혔다. 수용소에서는 날마다 수십명의 포로들이 사망했다.

1000명이 넘었던 차프스키의 동료들은 금방 50명으로 줄어들었다. 그래도 그는 운이 좋은 편에 속했다. 소련군이 자행한 '카틴 학살'에서 살아남은 차프스키는 그랴조베츠 수용소로 이송됐다.[※참고: 카틴 학살은 1939년 폴란드를 점령한 소련이 폴란드의 재기를 막기 위해 교수, 기자, 장교, 성직자, 예술가 등 폴란드 지식인 수만명을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소련군은 스몰렌스크 인근 카틴 숲에 이들을 집단 매장했다.]

소련군은 폴란드군 포로들을 가혹하게 다뤘다. 질병과 굶주림으로 사망자가 속출했고, 탈출하다가 처형당하는 포로들도 부지기수였다. 포로 중 일부는 소련 붉은 군대에 포섭돼 군복을 바꿔 입었다.

소련군은 차프스키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경력을 인정해 그에게 약간의 자유 시간을 허락했다. 수용소의 포로들은 무엇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강제노역이 끝난 후 영하 45도의 추위에 시달리면서 필사적으로 지적인 활동을 수행하려고 노력했다.

수용소 내 수도원에 모인 포로들은 각자의 전공 분야를 살려 강의를 하면서 서로에게 지적인 자극을 줬다. 에를리히 박사는 책과 인쇄술의 역사를, 카밀 칸타크 수사는 영국사를, 시엔느니츠키 교수는 건축의 역사를, 오스트로프 중위는 남아메리카 지리를 강의했다. 차프스키는 회화 이론과 프랑스 문학을 맡았다.

수용소 안에는 책이 없었기에 포로들은 개인의 기억에 의지해 강의를 진행했다. 차프스키는 유학 시절에 읽은 프랑스의 대문호 마르셀 프루스트(1871~1922년)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강의했다.

그는 놀라운 기억력을 발휘해 소설의 문장을 발췌했고, 프루스트의 개인사와 작품 해석을 연결하며 강의를 전개했다. 또한 그림과 글을 섞어 자료를 만들었다. 수용소의 인문학 강의. 그것은 정말 비극적이고 부조리한 풍경이었다. 포로들은 지적인 활동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지킬 수 있었다.

"우리는 당시 우리의 현실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던 '정신'의 세계를 생각하고 그것에 반응할 수 있었다. 그 큰 옛 수도원의 식당에서 보낸 시간들은 온통 장밋빛이었다. 이 기묘한 수업은 영영 길을 잃어버린 것 같다고 느끼던 우리에게 다시금 세상 사는 기쁨을 안겨줬다."

유제프 차프스키는 수용소에서 프루스트의 작품을 강의하며 버텼다.[사진=PAP 제공]

폐쇄적인 수용소에서 차프스키가 프루스트를 강의한 것은 적절한 선택이었다. 프랑스 작가 마르셀 프루스트는 9세에 발병한 급성 천식 탓에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다. 지팡이를 짚고 겨우 걸음을 옮길 정도로 쇠약했던 프루스트는 사회생활을 거의 하지 못했다. 학교에서도 천식으로 조퇴하는 일이 잦았고, 조금의 먼지라도 마시면 기관지가 마비될 정도로 발작을 일으켰다.

프루스트의 어머니는 그런 아들을 위해 날마다 청소와 환기를 하고, 책을 읽어줬다. 청년기에 잠시 증상이 좋아진 프루스트는 사교계를 드나들고, 문학살롱에서 문인들과 친분을 쌓으면서 '향연'이라는 동인지를 결성했다.

어머니가 사망한 후 다시 악화한 천식 발작으로 프루스트는 세상과 단절해야만 했다. 미세한 꽃가루와 먼지에도 발작을 일으켰고, 소음에 예민한 탓에 창문 틈을 코르크로 막아야만 견딜 수 있었다. 온종일 방에서 홀로 지내다가 사람들이 잠든 새벽에만 잠시 서재로 나와 필요한 자료를 찾은 다음 다시 방으로 들어가 조금씩 소설을 집필했다. 가끔 호텔 종업원이나 하인들이 들려주는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프루스트는 1910년부터 13년에 걸쳐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썼다. 1913년 소설의 제1부 '스완네 집 쪽으로'를 자비로 출판했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1918년에 제2부 '꽃피는 아가씨들의 그늘에'를 발표했다. 세상은 뒤늦게 프루스트가 쓴 소설의 가치를 인정했다. 1918년에 공쿠르상을 받아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가가 됐지만 그는 평생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나는 동굴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보다도 더 헐벗은 존재였다. (…) 그러자 추억이 저 높은 곳에서부터 구원처럼 다가와 도저히 내가 혼자서는 빠져나갈 수 없는 허무로부터 나를 구해줬다."

프루스트의 문장은 세월을 건너 수용소에 갇힌 포로의 가슴에 각인됐다. "기억이 없다면 인간은 헐벗은 존재일 뿐"이라고 여겼던 프루스트에게 문학은 망각과 싸우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포로들은 감금 상태에서 창작한 프루스트의 소설을 해석하는 차프스키의 강의를 들으며 불안과 공포에 맞설 힘을 얻었다.

1941년, 독일이 소련을 침공하자 소련 정부는 폴란드 정부와 우호 협정을 체결하고 폴란드군 포로들을 석방했다. 자유의 몸이 된 차프스키는 폴란드군에 재입대해 소련 수용소에서 학살당한 폴란드 장교들을 수색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1944년, 전쟁 막바지에 차프스키의 부대는 이탈리아 전선에 파견됐다. 폴란드군은 몬테카지노 전투 등에서 엄청난 사상자를 냈으나 차프스키는 끝내 살아남았다.

전쟁이 끝난 후 차프스키는 로마에서 「스타로벨스크의 추억들」이라는 책을 발간하고, 실종된 동료들을 찾으려고 소련 정부에 끊임없이 탄원서를 냈다. 1947년부터 누나와 함께 파리에 정착한 차프스키는 화가로 활동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전쟁 기간에 세계 각지로 흩어진 폴란드 청년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유럽에 대학을 설립할 계획을 세운 차프스키는 파리, 제네바, 브뤼셀, 뉴욕, 토론토, 런던 등에서 전시회를 개최해 재원 마련에 나섰다.

그랴조베츠 수용소에서 그가 진행한 '프루스트 강의록'은 파리에서 창간한 잡지 '쿨투라'에 게재돼 세상에 알려졌다. 그 강연록을 책으로 펴낸 것이 바로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다.

프루스트의 고통과 글쓰기가 차프스키와 동료들을 살게 만든 것처럼, 진실한 고통은 타인을 다시 살게 만든다. 기억하고, 사유하고, 쓰는 행위는 인간만이 지닌 능력이다. 타인의 고통을 학습하고, 감응하면서 어른이든 아이든 권력자든 시민이든 모든 인간은 비로소 거듭난다. 숱한 고난에도 여전히 이 세계가 유지되는 이유다.

이정현 평론가 | 더스쿠프
21cbach@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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